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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로 자랑하게 하시는 분 (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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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가면서 자랑거리가 없다면 얼마나 심심할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현대를 ‘P.R.시대’라고 합니다. Public Relation,홍보 활동, 선전 계몽을 뜻하는 말이지만, ‘피할 것은 하고 알릴 것은 알리는 것’ 이라고 우스개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현대인들은 광고와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해도 결코 과장된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일 배달되는 신문에 끼워 있는 전단부터 TV를 켜면 나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광고는 쏟아져 나옵니다. 하도 광고에 시달린 사람들이 외면을 하니까 아예 어느 스포츠 신문에는 20여 면을 온통 맥주 광고로 도배를 하기도 하고, 외국에서는 같은 시간대에 모든 채널에서 똑같은 광고를 방송하는 기발한 시도를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광고의 내용은 하나같이 저마다 자기가, 제것이 제 일이라는 자랑 일색입니다. 광고 대로라면 세상에 겁낼 것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약광고를 보면 못 고칠 병이 하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자동차 광고는 그 차를 타고 사고가 나도 전혀 다칠 것 같지 않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자동차 광고가 자동차보다 성능이 더 좋습니다.
광고는 결국 자기 자랑입니다. 얼마나 그럴듯하게 하느냐 하는 것에 성패가 달려 있는 것이기에 과장될 수 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그 광고를 믿고 제품을 구입했다가는 실망하는 경우가 있곤 합니다.
이런 자랑을 야고보서에서는 ‘허탄한 자랑’ (약 4:16)이라고 합니다.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사실과 다르게 과장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경 다른 번역을 보면, ‘허영에 들떠 장담하는 것’, ‘우쭐되며 자랑하는 것’ 이라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허탄한 자랑을 많이 보게 됩니다. 자랑할 수 없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허탄한 자랑입니다. 고린도서에서는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전 3:21)고 하십니다. 사람은 결코 자랑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랑을 하지 않으면 입이 가려운데, 자랑하지 않으면 심심한데, 그러면 자랑하고 싶은 땐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자랑해야 할까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허탄한 자랑을 생각해 봅니다.
허탄한 자랑은 사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자랑하는 것은 결국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건강과 나이를 자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시편 90:10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이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나이 자랑을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감히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니다”라고 시편 기자는 말씀합니다. 젊음은 자랑할 만 합니까 젊은도 날아가는 것같이 신속히 지나갈 뿐입니다. 젊음의 자랑은 자칫 객기가 되기 쉽습니다.
건강 자랑은 또 어떻습니까
한번은 친구 목사님들과 모여 얘기를 나누는 중에 건강에 대해 신경 써야 한다는 말이 나오자 모두가 동감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건강 관리법을 말하는데 한 목사님이 자기가 목욕탕엘 가면 가끔 만나게 되는 60세쯤 되는 분이 있는데 얼마나 신체 단련이 잘되었는지 젊은 자기가 오히려 기가 죽어 창피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동안 보이지 않기에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얼마 후에 그분이 중풍이 들어 반신 불수가 되었더라고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건강, 그렇게 자신만만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들 감기 때문에 콜록콜록하는데 ‘난 감기에 잘 안 걸려’하는 사람이 금방 감기 걸리지 않습니까
또 성경은 소유를 자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히스기야 왕이 깊은 병에 걸렸다가 나았습니다. 인접한 나라 바벨론에서는 그의 치유를 축하하기 위해 사신과 함께 예물을 보내왔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반갑게 그들을 맞이하고 극진한 대접을 했습니다. 바벨론의 사신들이 체류하는 동안 왕은 왕궁 곳곳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왕궁 안에 있는 진귀한 보화들도 빠짐없이 보여 주었습니다. 은금과 향료와 각종 보물들이 가득 들어 있는 보물 상자들을 다 보여 주었습니다. 이렇게 갖가지 것들을 다 보여준 것은 바벨론의 호의에 대한 보답일 수도 있습니다만 강대국 바벨론 앞에서 은근히 자기의 보화를 자랑하므로 이스라엘의 국력을 알리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왕궁에는 진귀하고 값비싼 보화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솔로몬의 부귀영화를 말해 주는 각종 보물들은 선조의 유산으로 왕궁 창고에 쌓여 있었을 것이고 히스기야 왕은 그것들을 바벨론의 사신들에게 자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바벨론의 사신들이 돌아간 다음 선지자 이사야가 왕을 찾아왔습니다. 이사야는 “그 사람들이 어디서 왔느냐”고 왕에게 물었습니다. 왕은 그들이 바벨론에서 온 사신들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왕은 “내 궁전에 있는 것은 그들이 다 보았습니다. 내 보물은 보이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사야는 정색을 하며 히스기야 왕에게 말합니다.
“왕은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그들이 모든 보물을 보고 갔으니 언젠가 반드시 그 보물을 빼앗으러 침공해 올 것입니다. 그들은 왕의 집에 있는 모든 소유물과 보화를 바벨론으로 가져갈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아 세력을 강화한 바벨론은 얼마 후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왕궁의 모든 보물을 다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자기과시의 자랑은 위험한 것입니다.
이솝의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높은 나뭇가지 위에 까마귀 한 마리가 맛있는 고기를 물고 앉아 있었습니다. 꾀 많은 여우 한 마리가 마침 그 밑으로 지나가다가 까마귀를 보고는 그 고기를 빼앗아 먹을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까마귀에게 말을 건넵니다.
“까마귀님, 까마귀님은 노래를 잘 부르신다지요 까마귀님의 고운 목소리로 아름다운 노래 한 곡조만 들려주실 수 없을까”
이 소리를 들은 까마귀는 우쭐해서 목청을 가다듬어 “까악 까악”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노래를 마친 까마귀는 칭찬을 기대하면서 나무 아래를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여우도 없었고, 물론 물고 있던 고기도 없어졌습니다.
병거와 말을 자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저희는 굽어 엎드러진다”고 합니다. (시 20:7) 전쟁에서 병거와 말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 없습니다. 병거와 말은 전쟁을 수행하는 전투력입니다.
현대전에서의 첨단 과학 무기의 위력은 얼마나 대단합니까 다국적군의 신식 무기 앞에 그 막강을 자랑하던 이라크 군이 며칠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병거와 말을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것을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병거와 말을 자랑할 때는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그렇지만 병거와 말은 없어도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셨습니다. 기드온의 삼백 용사는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지혜는 자랑할 만 합니까
그 지혜를 필적할 사람이 없었던 솔로몬은 “지나치게 지혜자가 되지 말라”고 합니다. 참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머리가 좋다고 좋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의 지능지수가 지나치게 뛰어난 사람들은 거의 다 정신 질환을 심하게 앓고 있다는 것입니다. I.Q가 170 이상인 경우가 그렇다고 합니다. 지나치게 지혜자가 아닌 것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평범한 것도 감사의 조건입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전 1:18)
권세는 자랑할 만 합니까
백일 붉은 꽃이 없다고, 올라갔다고 자랑할 것만도 아닙니다. 새 정권이 들어선 후 서울 시장으로 취임한 분은 불과 백여 일만에 퇴임을 하였습니다. 얼마나 허무합니까 그래도 그분이 신앙인인지라 오히려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고 간증집을 내었더군요.
사도 바울은 그가 지금까지 자랑으로 여겼던 모든 것, 전통과 가문과 학벌과 명예, 신분 등의 그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여긴다고 고백합니다. 그것들은 한 때 자기에게 유익했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명예와 권세와 재물과 건강, 다 필요하고 유익한 것이 사실입니다. 또 자랑할 만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것들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길 수 있는 것은 그 이상의 자랑거리를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환점입니다. 우리는 이제 전환점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나의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랑거리가 바뀌어야 합니다. 이제는 해야 할 자랑을 해야 합니다. 그 자랑은 하면 할수록 좋은 자랑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십시오. 하나님은 나로 자랑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자랑거리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자랑거리는 무엇입니까
나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은 어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셀라)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1-5절)
그렇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나에게 응답해 주시고, 높이 들어주시며,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또 우리의 도모를 이루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원래 이 시편은 승리를 기원하는 노래입니다. 왕을 위해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 시편은 전쟁에 출정하면서 하나님의 주시는 승리를 기원하면서 불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에는 간절한 바램이 있습니다. 3-5절에 “원하노라 원하노라 원하노라”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간절히 드리는 기도에 귀를 기울여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것을 믿고, 또한 그렇게 경험했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금 승리를 하나님께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기도에 귀를 귀울여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자랑할 만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자랑하시는 우리 갈보리의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도우심은 환난의 때에 임하는 것입니다. ‘환난의 날’-정확하게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뜻하는 것입니다. 전쟁은 얼마나 참혹합니까 우리 민족은 동족 상잔의 쓰라린 전쟁의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때로 소설이나 영화 같은 데서 전우애를 말하고, 휴머니즘을 강조하지만 경험하신 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단지 생존의 본능만이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차지할 자리는 없고 승리를 위한 극한 투쟁만이 있는곳, 그곳이 전쟁터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환난의 날에 나에게 응답하시고, 나를 높이 들어주시고, 도와주시며,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됩니다. 6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낙하시리로다” 아멘!
하나님은 자기에게 속한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어떻게 구원해 주십니까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낙하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몹시 소중히 여기십니다. 시편 8편에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야곱아 너를 조성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라”(사 43:1-4)
우리들은 하나님이 보장하신 승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휘날립시다.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깃발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의 깃발을 휘날리며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시는 여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를 세우는 일이 얼마나 멋있고 신나는 일입니까 야구 경기를 하면서도 응원기를 얼마나 힘차게 흔들며 외쳐댑니까 나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며 그 이름을 소리쳐 외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랑거리를 주셔서 자랑할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자랑하는 사람은 또한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고 하십니다.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학자 메튜 헨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목자를, 목자는 교회를 자랑하는 그 자랑이 가장 큰 기쁨이다.” 그렇습니다. 주안에서 자랑하는 것은 주의 사랑 가운데 서로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가끔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면 유난히 목소리가 큰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의가 교인들입니다. 어떻게 아느냐 하면 교회 얘기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런 분들이 교인이라는 것이나, 교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대화의 내용이 대 부분 교회 흉을 보는 것 일색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어떻고, 어느 권사가 어떻고, 글쎄 시종일관 그런 류의 이야기를 합니다. 하기야 남의 이야기하는 것이 재미는 있겠지요. 하지만 목소리라도 작으면 좋겠는데 그러지도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그런 얘기하고 싶거들랑 좀 작은 목소리로만 말씀하셔도 꽤 교양 있고 품위 있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기왕이면 우리 갈보리 교회 교인들의 특기가 교회 자랑이면 좋겠습니다. 교인은 목사를 자랑하고, 목사는 교인을 자랑하는 교회가 우리 갈보리 교회이어야 합니다. 집사님은 우리 권사님처럼 이쁜 사람 없다고 칭찬하면 얼마나 보기에 좋습니까 구역장은 구역 식구들을 자랑하고, 구역 식구들은 구역장을 자랑하는, 이런 자랑은 좀 지나치다 싶어도 좋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이런 말씀을 합니다.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후 1:14) 사실인즉 고린도 교회는 바울 사도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로 유명한 교회입니다. 사도권을 무시하고, 사생활을 비난하고, 있는 말 없는 말로 마음의 고통을 주고 있는 교회입니다. 교회 내의 문제도 좀 많았습니까 그런 고린도 교회를 향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서로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서로 자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서로의 사랑을 더욱 깊게 해 줄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어줍니다. 형제끼리 서로 허물을 들추며 다투는 것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아픕니까 허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서로 덮어줄 때 사랑은 더욱 깊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자랑할 것이 많이 생기게 됩니다. 자기 자식이 왜 이쁩니까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세상에 자기 부인이나, 자기 남편 같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랑하기에 자랑하고 싶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말씀드리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저의 집 아이가 좀 느린 편입니다. 어지르는 데는 선수고 치우는 것을 잘 못합니다. 그 버릇을 고치느라고 집사람이 꽤나 애를 쓰는데 아이가 학급신문을 만든다고 토요일만 되면 반 아이들이 몰려와 난장판을 만들어 놓곤 합니다. 그 아이들에게 치우고 가라도 해도 간 다음에 보면 굉장합니다. 몇 주 그러다 보니 집사람은 그래도 우리 아이가 낫다고 그럽니다. 그 아이들의 부모들도 똑같이 말할 겁니다. 우리 아이가 그래도 낫다고. 왜 서로 자랑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자랑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로 이기게 하시며,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우리의 고백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할 때 하나님은 응낙해 주십니다.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응낙하소서” “여호와여 구원하소서”-“호산나”라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외칠 수 있는 말입니다. ‘호산나’-우리로 자랑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입니다.
하면 할수록 좋은 자랑을 합시다.
그것은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안에서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 찬송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나로 자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림으로 약속된 은혜와 복을 충만히 받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승리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94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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