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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나단과 다윗 (삼상 2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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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신앙의 인물이요, 사랑을 중심에 지닌 덕이 많은 왕이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삶 속에서 그대로 결정을 이룩하는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블레셋이 골리앗을 앞세워 이스라엘을 위기로 몰아넣었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며 물맷돌을 던져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큰 승리를 안겨 줬던 것입니다. 그가 승리의 장군으로 개선할 때 많은 여인들이 나와 『사울이 죽인 자의 수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의 수는 만만이로다』하고 창화하며 온 성을 진동케 했습니다.
이것이 사울왕의 마음에 맺혔으며, 자기의 왕위를 그에게 빼앗길 것 같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그때부터 사울왕의 마음 속에서는 시기와 질투와 교만이 둥지를 틀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상18:10-11을 보십시오.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사울왕은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몇 번 창을 던졌으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다윗을 신속하게 보호하사 피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오늘날도 사랑하는 그 자녀들이 위기에 있을 때에 극적으로 구출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격렬한 교통사고 시에도 그 아들을 논두렁 속으로 던져 박히게 하여 보호하시는가 하면, 공산당원이 죽이려고 권총을 겨냥할 때 벌로 그 눈을 쏘게 하여 머리를 숙이므로 뒤통수를 향해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게 하여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신속한 보호는 예나 지금이나 이 땅에 신기한 기적의 역사를 엮어 가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왕의 왕자로서 사울왕과는 아주 판이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한 다윗의 공을 사실 그대로 인지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적수 블레셋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때 자기 동족과 자기 생명이 존재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스라엘이 있음으로 내가 존재하며, 다윗이 있음으로 이스라엘과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의 광영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음은 저의 마음 밑바닥에서 울리는 양심의 소리였던 것입니다.
賊反荷杖(적반하장), 背恩忘德(배은망덕)등의 말은 사울왕과 같은 사람의 행동을 보고 만들어 낸 말이 아닌가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사울왕은 『요나단아.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왜 그리 어리석으냐? 저 다윗이 왕이 되는 날은 너의 왕의 자리는 무너지는 것이 아니냐? 다윗을 살려 두는 날에는 반드시 우리의 비참하고 굴욕적인 날이 오고야 말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탄식하였습니다.
어디까지나 사울은 자기 중심이요, 이기주의적이며 세상적인 생각이요, 교만한 사단이 내주하여 흉계와 살인을 자행하기에 적합한 심성을 지녔던 것입니다. 진리에서 너무나 어긋난 변태심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요나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보다도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했고, 자기 나라를 위해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 곧 다윗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이 다윗을 붙들고 계심을 볼 줄 아는 지혜로운 눈을 그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8:1을 보십시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聯絡(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요나단과 다윗! 이 두 사람이야말로 管鮑之交(관포지교)보다도 우월한 우정의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울의 왕궁에 또 月朔(월삭)이 찾아왔으며 왕궁에서는 월삭의 호화찬란한 산해진미의 파티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왕이 음식을 먹을 때에 왕은 평소와 같이 벽곁에 자기 자리에 앉았고, 요나단은 섰고 아브넬은 사울의 곁에 앉았으며 다윗의 자리는 비어 있었습니다. 악령이 같이하는 사울왕의 야료와 다윗에 대한 적개심이 날이 갈수록 더하므로 다윗은 그 자리를 피하여 에셀바위에 숨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과 다윗은 벌써 둘이서만 아는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요나단이 그 부왕의 의중을 진단하여 다윗에게 알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존대하는 마음이 있으면 요나단이 아이를 데리고 에셀바위 가까이 와서 활을 쏘고 『화살이 아이 이편에 있다』 하리니 너는 평안 무사할 것이요, 사울이 다윗을 학대하는 모습을 보이면 다윗이 숨어 있는 에셀바위가 있는 들에 나와 활을 달려가는 아이 위로 지나치게 쏘고 『화살이 네 앞에 있지 아니하냐?』하면 너 다윗은 이곳을 떠나 네 길을 가라고 두 사람은 약속을 했던 것입니다.
결국은 월삭파티의 다윗의 불참이 문제가 되는데 요나단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러했습니다.
사무엘상 20:30-34를 보세요.
『사울이 요나단에게 노를 발하고 그에게 이르되 패역 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수치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요나단이 그 부친 사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치려 한지라. 요나단이 그 부친이 다윗을 죽이려고 결심한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식사 자리에서 떠나고 달의 제 이일에는 먹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 부친이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함이었더라』
요나단은 심히 격분하여 그 자리를 떴으며 비애의 화살을 마음껏 당겨 달리는 아이 너머로 쏘게 되었습니다. 『화살이 네 앞에 있지 아니하냐?』 요나단의 비통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순간 바위 뒤에 숨을 죽이고 숨어 있는 다윗의 낙담은 형용할 길이 없으며, 에셀바위보다 더 무거워졌습니다. 하늘은 맑건만 이 세상은 어둡기만 했을 것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이 땅에 던지는 어두운 영향이 얼마나 짙으며 자기만을 위한 포악이 이 사회에 끼치는 독소가 어떠하다 하는 것을 알 듯한 것입니다.
화살을 줍는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돌아갔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슬픔! 요나단과 다윗만이 아는 秘史(비사)가 보이지 않는 안개처럼 에셀바위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잠언 18:24에 보면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다』고 했습니다.
이 달은 청소년의 달입니다. 지금 청소년의 범죄율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이 땅은 공해로 말미암아 생명이 좀먹어 가고 있는가 하면 청소년을 좀먹는 정신적 공해가 증가해 가고 있습니다. 이런 공해는 친구를 잘못 사귀는데서 기인함을 유의하지 아니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5에 보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은 『주님과 나』의 친구로서의 교제의 그림자요, 모형인 것입니다. 『주님과 나』사이에는 믿음의 비밀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의 문제도 타인에게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죄도 다 주께 다 고해야 하겠습니다. 청소년에게 소개해야 할 친구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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