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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다시 오리라 (요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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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든 사람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하기 위하여 대 신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고는 그 다음에 다시 아버지께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처소 를 예비하고 그 후에 다시 우리를 데리러 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셨다면 주님께서 가실 때에 다 데리고 가시지 왜 놔두고 가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어렵게 만드시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 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익하게 하시지 손해 보게 하려고 그러지는 않는 것입니다. 즉 우리로 하여금 실족케 하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살면서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있어 서 가장 힘든 문제가 바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를 믿으니 세상 사람같이는 못하겠고, 그렇다고 언제 오실지도 모르는 예수님을 믿 고 있다가 드디어 약은 꾀를 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슨 꾀입니까 그때 그때의 형편을 봐서 세상 방법으로 살기도 하고, 또 살다가 곤란하면 한 번씩 와서 통회 자복도 하고, 한 번 회개하면 몇일 동안은 그럭저럭 지나가고 다시 또 반복되는 엄 벙덤벙되는 삶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본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주님을 기다리는 긴 시간이 오히려 우리를 실족케 하며 손해보게 하며 슬픔에 잠기게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이 타당하게 보이면서도 정장치 못한 질문임을 알 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님의 말씀인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겠다'는 말씀을 중심으로 그 의미를 추적해 보고자 합니다.

 구원은 넓은 의미로서의 구원이 있고, 좁은 의미로서의 구원이 있습니다. 좁은 의 미로서의 구원을 이야기 할 때에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서 저주받은 우리의 신분 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구원을 얻었다, 중생하였다'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넓은 의미로 쓸 때에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영혼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흠도 없고 점도 없고 주름잡힌 것이나 티나 부족함이 없는 완 전한 수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좁은 의미로서의 구원을 보통 `중생'이라고 표현한다면 넓은 의미로서의 구원은 `성화, 영화'라고 합니다. 성화 란 거룩하게 되는 것을 말하며, 영화란 영화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중생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인간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손댈 것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홀로 우리를 위하여 베푸시는 독자적인 사역이십니다. 그래서 요6 44절에 이런 설명이 나옵니다.

나르 ㄹ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 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여기서 `아버지께서 이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이 일에 있어서 주도 권이 전혀 우리에게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그 뜻을 홀로 독자적으로 간섭하시며 행하신다는 뜻입니다. 요12:32절에도 그 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이끌어 붙여 주지 않으면 아무 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우리를 이끌려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접하러 오신다고 말합입니다. 이끈다 는 말이나 영접한다는 말이 큰 차이가 없는 말입니다만 사실은 좀 다른 의미를 내 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끈다'고 할때의 '이끈다'는 말은 영어로 ` take'라는 뜻입니다. 즉 `내가 너를 붙잡겠다, 내가 너를 잡아 오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우리를 '영접하여' 데려 간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rece-ive'로서 받아들이기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제 구원 이후에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 자신이 주도적으로 해야 되는 책임이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 이끈다는 것과 영접한다는 차이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의 변화를 하는 것 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수준의 변화의 차이로서 그 책임의 소재가 다르다는 것입 니다. 다시말해 좁은 의미에서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피값으로 우리를 죄 가운데서 붙잡아 내시며, 사망 가운데서 잠자던 우리를 불러 내시는 중생의 사역으 로 전적으로 하나님 쪽의 사역이라면, 반면에 넓은 의미에서의 구원은 영적으로 죽 었던 우리가 살아나 이제 반응하는 자로서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수준의 변 화를 일으켜야 할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넓은 의미에서 의 구원을 성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시간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제 막 중생된 영적인 어린아이 수준에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계획하시는 온전한 자리의 수준까지에 이르는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엡4:13절에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 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여러분 갓 태어난 어린 아이들을 보면 분명히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눈꼽도 끼고 손톱 밑에 때도 끼입니다. 그러나 그 아기를 사람이라고 그 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밥만 먹으면 다 인간이 아니라, 인간다와야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 니까 사람 구실을 하는데는 육체적으로 최소한 18년 정도는 지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 정도 되어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군대에서서도 이때 부릅니다. 또한 사람의 인격과 수준에 있어서 철났다고 하는 때가 이 쯤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철이 나는데는 개인적인 차이가 많습니다. 마흔이 넘어도 철이 못나는 사람이 있고 스물이 안 되어 철이 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미 부름받아 출생한 자들이므로 하나님 자녀로서의 성장과 변화를 이루어 철이 드는 자리에 까지 나아가는데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성장과 철이 들어야 할 기간이 오히려 성장을 멈추고 뒤로 물러 가며 낙망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눅18장에는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눅18장은 항 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에 대한 비유입니다. 어떤 도시에 불의한 재판관 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부가 그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찾아갔으나 들어주지 않더니 나중에는 하도 귀챦아서 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 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비유입니다. 여기서 과부에 대하여 거들떠 보지도 않는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간절한 요구에 마침내 들어 주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맺힌 소원을 푸어주는 것은 더 말할 것이 있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비유의 핵심은 무조건 매달리면 된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간절히 매어 달려도 응 답이 더디어 지는 문제에 대한 성도들의 자세에 관한 것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라! 기도한 것이 아직도 응답이 없는 것은 너희들에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며, 능력이 없어서가 아 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뜻이 너희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다가 응답 이 오지 않는다고 의기소침해 하거나 낙심치 말라! 더구나 너희를 사랑하는 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왜 응답하고 싶지 않겠느냐 다 이 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믿음의 수준을 응답이 더디고 없어도 끝까지 낙망치 말고 기도하는 수준으로까지 믿음을 넓히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주시면서 주님께서 무슨 우려를 하시는지 아십니까 눅18:8절을 보시면: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주님께서 신자들이 절망하고 의기소침해 할 일이 있을 것을 생각하여 끝까지 낙망 치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계속 기도하며 기다리는 믿음을 가져라고 특별히 이 비 유로 당부의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과연 그러 한 믿음을 얼마나 보겠느냐'는 우려를 나타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려서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실제로 많은 신자들이 오늘날도 예수님의 이 우려 처럼 늘 의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혼동하고 넉심하며 넘어지고 있는 것입니 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끝까지 하나님과 나와의 사랑의 관계성을 의심치 않고서 계속 기도하며 무응답도 응답이 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온 천하만물 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으며, 구하는 것을 받을 수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정작 살아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하는 것을 다 주시지는 않습니다. 정말 내가 필요해서 간절히 구하고 있는데도 구하는데 로 응답을 안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에 빠지게 되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73:1-9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 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끌어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 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 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 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 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이 시를 쓴 사람은 의롭게 사는 것이 도무지 이익이 없다는 것에서 시험에 걸렸습 니다. `의롭게 살고 선하게 사는 것에 대해서는 상을 안 주셔도 좋사오니 제발 저 악당들을 징계하시고 제거 시켜 주시기 원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 저렇게 활개 를 치고 잘먹고 잘다니 이게 어떻게 된 영문입니까'하면서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이럴 바에야 의롭게 살 이유가 어디 있느냐 저 원수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 습니다. 살 때 잘 살았으면 죽을 때에라도 고통을 느끼면서 죽어야지..늙어 죽도록 건강합니다. 자녀들은 공부만 잘하고 아무 재앙도 없습니다. 홍수가 와도 그 집은 무도 안 찹니다. 그러니 저들이 얼마나 교만하고 얼마나 강포하며 말을 막 해 대고 있습니까 `야! 너희들은 예수는 믿어서 뭐하냐'고 빙정거립니다. 그런 말을 하고 도 저들은 문둥병도 안 걸리고 멀정합니다. 얼마나 살이 쪘는지 눈이 다 솟아 나오 고 하는 일마다 다 잘됩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불신자들은 하는 일마다 형통하 고, 신자는 하나도 형통하지 않아 보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뭐라고 하는지 아 십니까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롬 5:1-2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로마서 5장은 4장까지 한 얘기를 근거로 이제 을 지으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 는 것입니다. 앞 부분의 이야기는 '우리가 얼마나 희망이 없었던 존재였던가 그러 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았는가'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5장으로 넘어와 `그러므로 그렇게 되었으니 하나님과 화평 을 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미래적이라는 말입니 다. 그래서 롬5:3-4절에 이르러: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는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켜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이제 부터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이 남아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 다. 물론 그 환난이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환난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조금 전에 우리가 본 시편 73편과 같이 세상 사 람들이 안 당하는 일을 우리가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그렇게 당해야 합니까 그것은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밖에는 더 이상 남은 일이 없는 사람이고, 우리는 영원한 나라에 걸맞는 시민과 자녀로 형성되고 완성되 어야 할 일이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하나님께 는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어려움과 부딪치게 하사 인내를 만들어 내고 연단을 이루고 소망에 거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가 불신자들 보다 형통해 보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이 환난앞에서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이 루어 간다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인내란 `Constancy'로서 `여일하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어려움을 당하면 어느 신자나 막론하고 꼭같이 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신자가 어 려움을 당하였을 때에 처음에 어떤 식으로 기도가 어옵니까 `감사하고 고마우신 하나님!' 이렇게 나옵니까 대체로 어떻게 시작합니까 `하나님 이렇 수가 있습니 까 하나님 잠깐 내려와 보세요. 이게 말이 됩니까'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그래 서 울고불고 합니다. 하지만 어느 신자나 그 기도의 끝은 '감사와 맡김'으로 마무 리 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해서 꼭 온갖 아우성을 쳐 놓고 결국은 `여기에는 하나 님의 무슨 깊은 뜻이 계신 모양입니다'라는 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편을 보면 그와 같습니다. 시편은 대부분 전반부는 기도문이고, 후반부는 찬송 시입니다. 시편 150편 중에서 거의 절반을 다윗이 썼습니다. 이 중에 대부분이 기 도인데 대개가 아우성치면서 하나님께 덤벼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어 느 때까지니이까 아직도 아닙니까 언제까지 침묵만 지키고 사람들에게 괄시받게 합니까 저만 괄시 받는 줄 아세요 하나님도 지금 같이 괄시 받는다고요 이래도 가만 있으십니까'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어떤 기도문도 그것으로 끝나지는 않습니 다. 끝에 가면 또 역시 `하나님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선하시도다'인 것입니다. 앞 에서 한 아우성과 뒤의 이 항상 다릅니다. 꼭 딴 사람이 쓴 것 같습니다. 환난 을 당했을 때에 신자와 불신자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신자 는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하나님이 없습니 다. 신자가 처음에는 온갖 아우성을 지르다가 끝에 가서는 비로소 돌아 옵니다. 주 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으로 걱정하지 않 도록 보장해 주시겠다고 하셨지, 내 욕심을 다 채워 주시겠다고 하신 적은 없는 것 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아우성 치던 것이 미안해 지고 하나님께서 내게 약 속한 세상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그 엄청난 약속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아! 주님께서 원래 세상이 그렇다고 하셨지 하면서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다시 처음부 터 신앙을 바로 정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신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이런 식으로 합니다. `하나님,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되도록 좋게 만들어 주세요!' 이건 하나님의 의도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시고 환난을 당케 하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한 번 생각나게 하기 위함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확인케 하기 위하 여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환난을 누가 보냅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것입 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가서 환난이 안 오게 해 달라고 그러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 세상에서 고통 없이 잘 먹고 잘 살다가 편안하게 지옥가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 고 무었습니까 그것을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게 신앙입니까 그게 축복입니 까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삶 속에서 얼마나 빈번히 하나님을 찾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느 냐하는 그 빈도수에 따라 축복의 정도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찾는 일이 적 은 만큼 손해라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얼마나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여러 분이 얼마나 잘 먹고 잘 사셨는지는 모르지만, 얼마나 박수받고 칭찬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얼마나 형통하고 행복했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거의 찾은 적이 없 었다면 그것은 큰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을 찾지 않고도 잘 살수 있었다는 것은 저주일 뿐입니다. 그러나 생활이 편한가 힘 든가를 불문하고 하나님을 찾을 일이 많았다면 그것은 축복이요, 행복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잘 살게 해 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도라고 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한 심하시겠습니까 어려워 져서 하나님을 찾는 일이 없게 해 달라고 예수를 믿고, 헌 금을 내는 거라면 한심한 줄 아셔야 합니다.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낳는다고 합니 다. 연단이란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다 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삶에서 더 이상 놀라지 않게 됩니다. 세상이 우리를 괄시하고 밟으면, 우리는 세상이란 믿 을 만한 곳이 아니고 우리가 영원히 있을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산으로 자주 다니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산사람이다. 산은 인간 처 럼 거짓말을 하지 않아서 좋다'고 말합니다. 물론 사람은 배신을 하고 상처를 입힙 니다. 반면에 자연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람을 멀리하고 자연을 가까이 하겠다는 것이 결코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자연에는 기대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대가 없었으니 상처를 안 받는 것이고, 사람은 기대를 했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기대할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는데, 일평생이 걸립니다. 인간에게 기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단지 사랑을 주고 받을 뿐입 니다. 즉 따뜻한 마음은 주고 받을 수 있지만, 인간을 신뢰하거나 믿을 만한 대상 은 못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을 대상은 하나님 뿐입니다. 이 세상은 믿을 곳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믿음의 대상과 사랑의 대상을 구별하는 것이 환난을 통해 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돈이 별 것이 아니라는 것과 건강이 별 것이 아니라는 것과 사람의 박수가 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환난을 통 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누구에게 우리 자신을 항복시키는 지 아십니까 `오직 나의 의뢰할 이는 하나님 이시요, 나의 소망도 하나님이시며, 내가 사랑해야 할 분도 예수 그리스도 뿐이로다!'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 다. 이것을 배우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깨닫고 배우면 그리스 도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 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게 됩니다.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야 그런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장성해 나가게 됩니다. 서서히 악한 모습에서 발을 빼며,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더러운 방 법을 동원하는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그것을 취해봤자 별것 아니라는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씩 고쳐 나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조금씩 이루어 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 아름다운 하늘 나라를 만들어 놓으시고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실 그 때에 우리를 그 곳으로 영접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마침내 흠이나 점과 티가 없는 거룩한 자가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일이 여러분 생애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겠습니까 어렵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에게 이루어지고 만들어지 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때 우리는 그 고난이 고통과 슬픔과 좌절이 아니라, 보람 이요, 축복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교회가 언제나 신자들에게 깨우쳐 주고 강조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적인 성공을 위하여 하나님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인생의 무대는 내가 그리 스도 안에서 갈고 딱고 훈련하여 변화되어야 할 부분을 위해서 하나님을 도입하여 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독교 백년에 신앙을 붙잡고 있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벅찬 역 사였었습니다. 그것은 일제 시대나 공산 치하에서 예수 믿는 것을 거절 당했기 때 문에 그 신앙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그것이 전부가 되는 것처럼 되어 왔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만은 내가 포기할 수 없다.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는 놓치지 않겠다!'라는 소극적으로 지키는 정도 이상은 신앙이 펼쳐지지를 못했던 것 입니다. 나중에 해방이 되고 자유스러운 분위가가 되자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 분위 기가 `따발총을 쏘아도 나는 끝까지 믿겠다!'라는 부정적인 처절한 각오로 싸우는 분위기와는 전혀 그 싸움이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죽어도 믿겠다!'가 몸에 벤 자 들이 `이제 이 신앙을 가구어 나갑시다!'하는 포근한 세월이 오자 항상 들이받는 밖에 할 줄을 몰라서 6.25사변이 끝나고 나서 여태까지 한국 교회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해 온 역사였던 것입니다. 서로 잘 났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잘못한 것만 지 적하고 있었지 누구도 내 인생을 통하여 아름다운 신앙의 빛을 발하게 하는 일에는 제대로 그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무서운 싸움은 따발총이 아닙니다. 일본 순사의 갈도 아닙니다. 오늘날의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돈이요, 쾌 락입니다. 돈과 쾌락은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무서운 대적입니다. 슬슬 녹이고, 눈 감게 만들므로 어지간히 힘을 쓰지 않고서는 이겨 내기 어려운 싸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어려운 싸움을 우리가 잘 통과하여 준비된 자로서 천국으로 영접되 어지기 위하여 다시 오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역사적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지만, 개인적인 종말은 죽음입니다. 우리는 죽으면 곧 하나님께로 가야만 합니다. 어떤 분이 아무래도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하는 말이 `결과를 보지 않아도 당신은 99% 암인것 같습니다. 3개월 을 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마음에 준비를 하셔야 하겠습니다'라는 것입니다.

눈 앞이 캄캄해 졌습니다. 3개월 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먹고 사는 문제가 문 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다른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빚도 갚아 야겠고, 잘못했던 사람들에게 이제 잘 하고 가야겠고, 자기가 살아 온 인생을 마감 하기 위한 3개월은 너무나 짧았습니다. 3년, 아니 1년, 아니 6개월만 되었어도 어 떻게 할텐데 하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엑스레이 사진 나오는 3일 동안을 눈 물로 뒤척이며 안타까와 하다가 다시 병원으로 찾아 갔습니다. 의사가 대답했습니 다. `최송합니다. 지난번에 오진을 했었습니다. 암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에 갑자 기 하늘이 푸르다는 것도 감사하고, 자기 머리 털이 바람 결에 흩날리는 것도 감사 하고, 의사 선생이 흰옷을 입고 있는 것도 감사했습니다. 얼굴에 희열과 감사가 넘 쳤습니다. 의사가 충고했습니다. `이런 일이 가끔 있는데요. 좋다고 펄펄 뛰어도 그 기븜이 한 달 가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 각오와 그 기분으로 평행을 유지 할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 번 해보도록 하십시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에게 죽음이 3개월 앞으로 다가 왔다면 아마 사는 모습이 달 라지지 않겠습니까 최소한 먹고 살기 위해서 애쓰는 일 만큼은 하지 않을 것입니 다.

 여러분은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온갖 위험들이 우리 주변에 도사리 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난폭한 운전사들이 우리 곁에 있으며, 질병과 사고와 위험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으며, 쉴줄 모르는 세월이 우리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준비해야 될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면하고 요구하시는 것들을 놓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다시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수준이 어느 정도에 도달하였는지를 정검하셔야 합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공부가 재미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는 것이 재미 있어야 합니다. 신앙을 가지며, 한 단계씩 올라 갈수록 그것이 여러분에게 자랑이 요, 보람이요, 축복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승리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셔야 합니 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강력한 권면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마 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렇습니다. 인생을 근심할 것이 아닙니다. 먹고 살 문제를 두고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 닌 것입니다. 죽음을 3개월 앞둔 사람의 마음 속에서도 먹고 사는 세상 일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완성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만족이 있고 거기에 자랑이 있 으며 거기에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제 매일의 삶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살아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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