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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돌들이 외치리라 (눅 19: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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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그가 세운 목적만큼 가치를 누리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목적이 천하면 그 사람됨이 천합니다. 목적이 고상하면 고상한 생을 살 것이요, 목적이 없으면 허무한 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실패는 죄가 아닙니다. 목적이 잘못된 것이 죄입니다. 또 문제가 되는 것은, 목적은 세운 듯한데 목적과는 달리 사는 생을 너무 오래 산다는 데 있습니다. 목적은 동(東)으로 간다고 하면서 살기는 서(西)로 가고 있습니다. 목적은 하늘에 두었다고 하면서 살기는 땅으로 지향해서 삽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다가 죽음 직전에 가서야 '잘못 살았다'하고 끝납니다. 참으로 허망한 일입니다. 모름지기 이상적 목적과 실질적 목적이 일치해야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늘 목적을 재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도대체 나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목적을 향해서 직선적으로 바르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물어보고 계속적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가 섬기는 주(主), 그가 섬기는 왕 만큼 영광을 얻으면서 삽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의식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사람은 자신이 섬기는 자가 있습니다. 성경은 증거 합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해 죽을 자도 없다고. 결국은 무엇인가를, 누군가를 섬기면서 삽니다. 문제는 내가 무엇을 섬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천하디 천한 돈을 섬깁니다. 돈을 매먼(Mammon)으로,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은 결국 돈만큼 천합니다. 어떤 사람은 별것도 아닌 명예를 위해서, 선한 일을 위해서는 한푼도 내놓지 않으면서 그 하찮은 명예를 위해서 엄청난 돈을 바칩니다. 그러고는 마지막에는 그토록 허무할 수가 없어요. 명예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더란 말입니까 내가 그것을 섬겨온 것입니다. 그것을 나의 왕으로 섬겨온 것입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섬겨온 것입니다.
이차대전 직전에 독일사람들은 히틀러(Hitler, Adolf)를 주로 섬겼습니다. 하일 히틀러를 외치면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온 세계가 통일되는 것 같고, 온 세계를 점령하는 것 같고, 독일의 영광이 온 세계에 미치는 것 같아서 히틀러를 왕으로 섬겼는데,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차대전이 끝났을 때, 독일 사람들은 전국민적으로 얼마나 부끄러워졌습니까 독일인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끄럽게 여길 정도로, 히틀러를 섬겼다는 데 대하여 굴욕감을 맛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마르크스와 레닌(Marx and Lenin)을 섬긴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40년 아니 70년 동안 그들의 동상을 세워놓고 섬겨온 추종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데올로기(ideologie)를 섬겨왔던 그들은 이제야 그것이 허상이었으며 잘못임을 깨닫고 얼마나 부끄러워했습니까 소련의 어느 대학 교수가 하는 강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신들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이데올로기를 잘못 따라간 탓에 역사적으로 큰 실수를 했고, 이렇게 부끄러운 생, 가난한 생을 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이제야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70년 동안이나 굉장한 실수를 해온 것입니다. 주인 한번 잘못 만나서 섬긴 탓에 이런 부끄러움을 사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주인을 바로 섬겨야 합니다. 섬길 자를 섬겨야 합니다. 사람은 그가 누리는 자유만큼의 의미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양심적으로 자유롭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약 오늘이 마지막날이라면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습니까 영혼의 자유, 도덕성의 자유, 경제적 결백의 자유사람은 죄로부터 자유 할 때에 그 자유만큼 의미 있는 생을 삽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그 자유를 의미합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그 전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호칭이 복잡하게 여러 가지로 있었습니다마는 사도행전 이후에는 '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주를 Lord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주'라는 것은 주인을 의미합니다. 왕과 백성이 주종관계를 이루었을 당시에 백성은 왕을 가리켜 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노예가 주인을 향하여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만이 '주'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를 경망 되이 입에 올릴 수가 없어서 '주'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 곧 큐리어스(Kurios)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메시야이시며 종말론적인 왕이 되신다고 믿고 고백하고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유명한 영국의 물리학자 뉴턴(Newton, Isaac)은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첫째, 인생을 기피하려는 요나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있는 줄을 알면서도 안하고, 당연히 말해야 할 것도 자신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한 일이 여기 있는 줄 알면서 기피하고, 인생 되기를 기피하고, 사람답게 살기를 기피하는 사람, 힘든 일은 요리조리 피하고 쉬울 것 같은 일만 찾는 사람, 기회주의적이고 기피주의적인 생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 말을 타고 가되 달리는 말의 모가지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것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말을 잘 타는 사람은 아무리 거친 말이라도 일단 올라타면 먼저 고삐를 쥐고 나서 그 말을 마음대로 제어합니다. 이리 갈 수도 있고, 저리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을 잘탈 줄 모르는 사람은 급하게 달리는 말 위에서 덩달아 초조하고 조급해합니다. 떨어지면 죽는다는 생각에 아무리 고삐를 낚아채지만 그 말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달리는 말에 매달린 사람, 지금 놓치면 죽는다는 생각에 말의 모가지를 꽉 붙든 채 끌려가는 모습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평생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엔가 계속 끌려가는 사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물을 겨를도 없이 어딘가로 무작정 끌려가듯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셋째,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을 알고, 자기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고 그 하나님께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위탁하고 평안과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분명히 이 셋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실 때에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의원으로 알려집니다. 가는 곳마다 병을 고치심으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희한한 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는 잘 가르치시고 봉사하시므로 봉사자, 랍비로 알려집니다. 그리고 율법을 잘 가르치시므로 율법의 해석자로, 이적을 행하시므로 권세의 사람, 능력의 사람으로 알려지고 인정받게 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대속주(代贖主)로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을 자를 살리기 위하여 대신 죽으시는 대속물로, 대속주로 오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제사장이시요, 죄인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왕이시라는 이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치의 병을 고쳐주시는가 하면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눈뜨게도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기도 하는 권능을 보여주십니다. 당신이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저들에게 나타내고 계시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는 여러 측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그의 사죄권(赦罪權) 행사임을 우리는 잊지 말 것입니다. 네 죄를 사함받았느니라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저는 가끔 성경과 신학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이런 시험문제를 낼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거하라 저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채점을 하다가 만약 답안에 속죄권을 행사하셨다는 설명이 없으면 낙제점을 줍니다. 예수님의 속죄권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목적도 그가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남의 죄를 용서할 수는 있습니다. 혹은 내가 사과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사할 수는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죄사함의 권세를 행사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당하게 네 죄를 사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죄권을 행사하십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은 본래부터 하나님이요 말씀으로 오셨습니다마는 계시하시는 과정은 발전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적인 모습을 한두 가지 나타내시고 부활하신 다음에는 만왕의 왕으로 이해되고 있음이 사도행전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요, 영원히 살아계실 왕이요, 재림하실 분이요, 역사를 심판하실 분이라고 이해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복음서의 결미에서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이것은 종말론적이며 동시에 현재적인 말씀입니다. 항상 함께 있으리라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성경의 예언에는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나타납니다. 선지자, 제사장, 왕을 통합적으로 이상적으로 종말론적으로 말씀한 것이 메시야입니다. 참선지자요 참제사장이요 참왕이 바로 메시야입니다.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 7:27)예수님께서 당신의 피로써 단번에 제사를 완성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종래의 제사는 실제의 예표와 상징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피를 가지고 참 제사를 이룸으로써 참 제사장이 되십니다. 마침내 그는 영원한 왕이 되십니다. 이 세상의 왕이라고 하는 것은 임시적인 것입니다. 어느 정권이든 어느 권력이든 오래 가는 것이 없습니다. 다 무너집니다. 그리고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 백성을 억압하고 백성을 노예로 삼아 힘으로 다스립니다. 백성을 위한다고 하면서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위한다고 하면서 나라를 망칩니다. 평화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평화를 그르치는 권세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영원한 왕이시며 동시에 영계(靈界)와 속계(俗界), 영적인 세계와 물질적인 세계를 통합하여 사랑과 진리로 다스리시고 온 백성을 자유케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진정한 왕이십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방에 울리는 나팔소리 속에 군마를 타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나귀새끼를 타고 조용하게 오셨습니다. 조그마한 나귀새끼를 타고 보좌로 올라가신 것은 이스라엘의 전통에 따른 것입니다. 왕은 겸손해야한다, 권력자의 절대조건은 겸손이라고 하는 중요한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왕이 비록 나귀새끼를 타고 올라가지만 이것은 대관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나귀새끼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나라에는 나귀가 없지만 외국에 가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중국에만 가도 쉽게 볼 수 있어요. 나귀는 다른 타는 짐승보다 조그마한 편입니다. 어떤 것은 사람이 올라타면 발이 땅에 닿을 정도입니다. 사람을 태우고 그 조그마한 짐승이 아장아장 걸어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참 잔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빨리 달리지는 못하고 발랑발랑 걸어가는 그 조그마한 모습이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여 거절하지 않고 사람을 태운 채 걸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뒤로 물러남이 없이 앞서 가십니다. 왕은 권한의 길을 앞서 갑니다. 지금 앞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엄청난 사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여기에 위용이 있습니다. 놀라운 위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전고투 끝에 간신히 얻어낸 영광이 아니요 승리가 아닙니다. 먼저 승리하고 나서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승리는 이미 있는 것이고 결정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당당하게 올라가는 것입니다.
둘째, 왕권을 행사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예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맞은편 마을에 매여 있는 나귀새끼를 가져오되 주인이 물으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대답하라고 명하십니다. 이렇듯 주님께서는 남의 소유를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왕권입니다. 모든 것이 왕의 소유입니다. 아마도 그 나귀의 주인은 주님을 알아봤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능력을 보았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으리라고 짐작됩니다. 그는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에 군소리 없이 내놓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쓰시겠다고 내놓으라 하십니다. 선뜻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물질도 돈도 명예도 때로는 생명도 그렇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는 그 순간에 군말 없이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주께서 쓰시겠다'여기에는 어떤 이의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왕의 권세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모든 오해를 무릅쓰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지금 로마의 속국입니다. 로마가 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대관식 같은 행렬을 펼치다니 가능한 일입니까 많은 정치적 오해가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당당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 올라가십니다. 정치적인 오해 따위는 문제삼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모든 오해를 다 피하려들면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 일도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모든 일을 지혜롭게 해오셨지만 이제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서는 어떤 오해도 개의치 않으십니다. 정치적인 문제도 전혀 개의치 않으십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거침없이 밀고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옷을 예수님의 가시는 길에 깔고,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의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Hosannah)'를 외칩니다. '호산나'는 영어로 'Save us now(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가 됩니다. 종교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주여,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는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맡깁니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렬을 따르며 '호산나'를 외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과 갈채요, 찬양과 송영(誦詠)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충성을 맹세하는 함성입니다.
무리 가운데 바리새인들이 이를 보고 예수님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39절)라고 말합니다.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된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40절)-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전혀 잠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잠잠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소리를 질러야 하고, 전파되어야 하고, 영접 받아야 하고, 환영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역사는 절대로 잠잠할 수가 없는 것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돌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돌, 성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말씀이 있은 후 40년만에 예루살렘은 망하고 성전은 무너집니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반드시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어떤 사건이나 어떤 여건에서도 하나님의 권세는 그대로 집행될 것임을 말씀함입니다.
우리가 즐겨 듣고 부르는 성담곡 가운데「메시야」가 있습니다. 작곡가인 헨델은 몸이 약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워 많은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빚으로 고소를 당해서 결국은 감옥 생활까지 했습니다. 그는 믿음이 깊은 사람으로 감옥에서도 날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는 환상을 경험합니다. 이 환상은 「메시야」의 작곡으로 이어졌는데 그 원악보에는 아직도 그 때 흘린 눈물자국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는 눈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기도하며 그 음악을 지었습니다. 이것을 작곡하고 얼마 후에 그는 실명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좀 흐른 뒤, 고난주간에 「메시야」를 친히 지휘하고는 그 다음날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분, 「메시야」를 자세히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사가 있습니다. '그가 다스리신다. 그가 다스리신다. 만왕의 왕, 그가 다스리신다. 역사를 다스리시고 온 우주를 다스리신다. 그 고난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가 다스리신다'-무려 마흔세 번이나 '그가 다스리신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담곡 「메시야」입니다. 헨델은 이 음악을 통하여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세계,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세계를 높이 찬양하고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사이러스(Cyrus)왕이 이웃나라를 쳐들어가서는 그곳의 왕자와 그 부인, 그리고 아이들을 포로로 잡아왔습니다. 재판을 하고 사형을 집행하려는 순간, 왕이 묻습니다. “왕자여, 만일 내가 당신을 놔주면 어떻게 하겠소” “내 모든 재산의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아이들을 놔준다면……”하고 다시 묻자 “재산의 전부를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마지막으로 사이러스왕이 묻습니다. “당신의 부인을 놔준다면 어떻게 하겠소” 왕자는 “그러면 내 생명을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사이러스왕은 그 대답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는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고 하면서 본인은 물론 아이들과 부인까지 모두 풀어줍니다. 아무 조건 없이 풀어줍니다. 무사히 돌아온 왕자와 왕비는 기뻐하면서 그 동안 겪었던 일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긴 이야기 중에 왕자는 그 아내에게 “사이러스왕, 참 늠름하고 잘생겼지. 너무나도 훌륭한 왕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전 못봤는데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럼 당신은 그 시각에 무엇을 봤소” 왕비는 대답합니다. “저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겠다고 하는 당신의 얼굴만 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 아닌 다른 것에 한눈을 팔아서는 안됩니다. 나를 위하여 죽으신 분 말고 어디를 보겠다는 것입니까 누구를 따르겠다는 것입니까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만 충성을 다할 것이요, 그 메시야만을 섬길 것입니다. 이렇게 섬길 때에 비로소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그 평화스러운 나라의 백성이 되고, 그분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도 어떤 고난 앞에서도 '호산나, 당신은 왕이십니다. 나는 당신에게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맹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 그리스도인 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함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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