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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교베데스다의 병자 (요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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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 하는 못 옆에 있었던 한 장기환자의 일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의 이름의 뜻은 자비의 집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그 연못에는 자비의 치유의 역사가 있어서 누구든지 천사가 내려와서 연못을 휘저어 놓을 때에 먼저 들어가는 한 사람에게 치료의 역사가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병이든 묻지 않습니다. 어떤 환자인지 묻지 않습니다. 무조건 뛰어 들어가는 자에게 그 자비는 임하는 못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못을 찾은 예수님의 눈에 한 환자가 보입니다. 그는 병색이 완연하였고 오랜 병상생활에서 몸에 밴 청승스러움이 배어나왔습니다. 이 환자에게 예수님은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원하느냐 라고...
저는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께 몇가지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 환자에게 낫고자 원하느냐 고 물으셨을까요 이 연못에 있는 자치고 낫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왜 이런 엉뚱한 질문을 던지셨을까 하는 의문 한가지입니다. 이 질문에는 답이 필요없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굳이 이 질문을 던지셨을까요

자비의 연못이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베데스다의 기적이나 선택받은 한 사람의 치유에 대해서 관심이 없으십니다 자비의 못이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애써 그 자리를 외면합십니다. 자비의 자리가, 치유의 자리가, 행복의 자리가, 출세의 자리가... 이미 그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를 왜 외면하셨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저는 먼저 왜 이런 질문을 드렸을까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이 환자에게는 의문이 필요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일에 열중하다보면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빠져들어 있는 때가 있습니다. 이 환자는 38년간을 이 자리를 지켰던 사람이었습니다. 매일 같은 반복적이고도 지루한 삶 속에서 그에게는 아마 내가 왜 여기 누워 있어야만 하는지도 모르는 단순한 사람으로 전락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 깜짝 놀랄 만한 가장 단순한 질문을 합니다. 네가 낫고자 원하느냐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자비를 구하고 구원을 얻으면 하늘나라의 비밀을 깨닫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됨을 추구하고 믿음생활을 하다가 보면 그 믿음의 본질적인 면을 잊고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한순간, 한시간, 한사람이 소중하다고 생각되기 보다는 그저 오늘도 못이 흔들리나보다... 하면서 아무런 변화나 충동이 없는 그저 그런 삶으로 전환되기 쉽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환자에게는 왜 여기 누워 있어야 하는지의 이유를 깨닫게 해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2. 이 환자에게는 개인의 의지표현이 필요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소망하고 있는지... 그에게는 개인의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결단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3. 죵종 신약에서 예수님의 질문은 엉뚱한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그에게 가진 관심을 나타내십니다. 그 관심은 질문을 받는 사람의 의사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 받아들이는 사람의 반응이 어떠하든지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관심을 나타내십니다. 이 질문의 속에는 내가 너를 낫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는 완곡하고도 절실한 예수님의 결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은 물음표로 볼 수 없다는 신학자들의 의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그가 얼마나 낫고 싶어 하는지를 말입니다.

4. 예수님은 그의 관심을 베데스다에서 끌어내셔야만 했습니다. 그는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넣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하소연합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이 먼저 내려가는 안타까운 현실을 말하면서 그는 깨닫게 됩니다. 이미 베데스다는 긍휼의 집이 아니다!! 자비의 집이 아니다!! 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목적을 가지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내어 주면서까지 이 세상을 창조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모든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세상을 창조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긍휼과 자비의 터전으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땅은 인간의 경쟁과 양육강식의 동물적 논리로 아비귀환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곳은 경쟁의 집니다. 이곳은 전쟁터입니다. 내가 남을 밟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되는 처절한 삶의 경쟁지입니다. 한번이 한 사람만이 들어가는 이 경쟁의 세상은 이미 자비의 집이 아닙니다 그런 자비의 집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학생들은 기회의 균등이다, 잘먹고 잘사는 지름길이라 하면서 베데스다의 못에 남보다 더 먼저 뛰어 들어가는 연습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회의 교육입니다.
경쟁하지 않으면 죽는다!! 남이 먼저 들어가면 너에게는 이미 이 세상이 기회의 터전이 아니라 고생문이 훤하다! 밟아라! 그리고 앞서 가는 사람은 뒷덜미를 잡아서라도 네가 먼저 베데스다에 들어가라! 그러면 너는 병을 고칠 것이다 라는 논리입니다. 이 논리에는 열심히 노력했으니 당연히 잘먹고 잘 살 수 있다는 위험한 논리가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교육도 이러한 베데스다 못의 경쟁논리에 빠져 있습니다. 베데스다의 법에 지배받습니다. 그들을 베데스다의 통치에 적응하도록 훈련시킵니다. 예수의 법, 예수의 통치에 맡기는 교육이 되어야 할텐데 조금만 그들에게 영적인 교육을 시키펴고 하면 '공부할 시간이 없다' '학원에 가야 한다' '부모님이 집에서 못 나가게 한다'라는 이러 저러한 핑계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함에 대한 이유를 댑니다.

예수님의 영적인 질문에 자신의 현실론만을 되뇌이면서 '안돼요!', '전 낙오자예요!' 라고 외치는 이 환자는 얼마나 억눌린 사람입니까 이미 그는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혀 있을 정도로 남에 대하 혐오감과 나 스스로 구원을 깨닫고 얻지 못하는 나약함에 빠져 있었습니다.

영혼과 몸은 하나입니다. 몸이 병들어 있으면 마음에도 병이 찾아 옵니다. 육체만 병들어 있을뿐만이 아니라 그 환자의 마음에 또 하나의 병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네 탓이다'라는 병입니다. 다른 사람때문에 내 병이 낫지 못한 것입니다. 남이 나보다 더 설치니 내가 잘 안된다 라고 생각합니다.

5. 예수님께서는 베데스다와의 타협을 단호히 거절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연못에 철조망을 두르고 남을 못 들어가게 하면서 이 사람을 못에 넣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을 불러서 이 사람을 번쩍 들어서 제일 먼저 못에다가 집어 넣으라고 자비를 베푸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너의 의사와는 내가 관계하지 않겠다. 네가 그동안 그렇게 살아왔다면 좋다. 나는 이제 새로운 길로 너를 인도하겠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 가라!!6. 예수님은 긍휼의 집을 참된 긍휼의 집으로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의 지배구조와 논리에 적합치 않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구원으 방법은 늘 독특했습니다.
너도 힘으로 맞서려고 하지 마라. 나의 방법을 택하라.. 믿음이 이긴다. 믿음이 최후로 너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베데스다의 논리에 물들지 마라.. 베데스다와 타협하지 말라!

베데스다는 현대의 우상이다. 현대의 환상이다. 그 환상을 깨야 한다. 맹목적으로 서로의 인간을 짓밟는 우리를 보아야 한다.

하늘 나라는 이미 와 있다.
그 나라로 돌아 서기만 하면 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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