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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학코레의 생수 (사 55:1-3, 요 04:2-24)

첨부 1


우리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갈증이 있습니다. 하나는 음식에 대한 갈증이고 하나는 물에 대한 갈증입니다. 이 두 가지 갈증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기본적으로 본능적으로 우리 몸에 생리적으로 장치되어 있는 갈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경험한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물에 대한 갈증이 음식에 대한 갈증 보다 더 참기 어렵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 은 물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몸은 그 70%가 물로 되어 있다 는 것만을 생각해 보더라도 우리가 물 없이 살 수 없음을 말해 주고 있다 고 하겠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수상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안개 속 에 들어가게 되었고 통신장비 등이 고장나서 어쩔수 없이 안개 속을 헤메 다가 조난을 당해 위치를 알지 못하는 망망한 대양 가운데에 불시착을 하 여 일주일을 바다에서 표류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러한 상황에서 배고픈 것보다 목이 갈한 것이 더 견디기 어렵더라는 체험담을 했습니다.

목이 갈할때 나중에는 소변을 받아 먹을수 밖에 없는데, 그것으로도 갈증 은 갈증을 해소가 되지 않게 되면 결국 바닷물을 마시게 된다는 것입니 다. 그러나 그 갈증에서 바닷물을 먹으면 죽는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그들 조난 당한 해양경찰관들 중 한 간부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갈증을 참지 못해 결국 죽을 줄 알지만 바닷물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오 래 전에 들은 이들의 조난 당한 경험담을 듣고 크게 감명 깊었던 일을 지 금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삼손이란 위대한 사사를 익히 알 것입니다. 천하의 장사였던 삼손도 갈 증에는 못 견디었습니다. 삼손이 동족에게 붙잡혀 굵은 밧줄로 결박 당하여 불레셋 군에게 넘겨졌습니다. 그 때에 불레셋 군은 열광을 했습니다. 삼 손 때문에 이스라엘을 마음대로 약탈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제 그 삼손을 잡았으니 그들이 기뻐하지 않을 수 없어습니다. 그러나 이 때 삼손은 그 를 묶었던 밧줄을 썩은 새끼줄을 끊듯이 끊고 죽은 나귀의 턱뼈를 주워 가지고 그것으로 불레셋 군대 1천명이나 죽이고 그들을 패주게 했습니다.

그 전투 끝에 삼손은 참기 어려운 심한 갈증을 느꼈습니다. 기진맥진하였 습니다. 그는 살려 달라고 하느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 하느님이 우 묵하게 꺼진 곳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여 삼손은 그 물을 마시고 다시 일어나고 기운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곳이 유명하게 되었고 후대까지 엔학코레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전해 내려 오게 되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하느님께 부르짖어서 솟은 샘'이라는 뜻입니다.

갈증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때 하느님이 생명을 주는 물을 주 어 삼손이 다시 살아나게 되고 또 기운을 차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때 삼손이 목이 갈했던 것은 물론 신체적으로 목이 갈했던 것이 사실 이지만, 그 이야기에서 갈증과 물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 니다. 여기서 '갈증'은 하필 물을 갈급해 하는 신체적인 갈증보다 생명을 주는 어떤 원천적인 힘에 대한 갈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 니까 영적 갈증을 함축적으로 의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여기서 '물'은 단순히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시는 물을 의미하기보다도 생명과 생기를 주는 원천적인 어떤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 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행을 하시다가 사마리아에 들렸을 때 그 는 갈증을 느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갈증은 몸의 갈증, 신체적 갈증입 니다. 뜨거운 열대지방을 도보로 여행하면 많은 땀을 흘리게 되고 또 그 러면 몸은 물을 요구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목이 타고 기운이 다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기진맥진합니다. 예수님이 그런 지경에 이 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마침 우물에 물길으러 나오는 여인을 보 고 물을 한 잔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나 물 한 그릇을 달라는 그의 간 청을 사마리아 여인이 거부하자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전혀 다른 종류의 갈증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전 우물을 가지고 있다시피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희는 물을 청하는데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 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 을 것이다.(요한 4:10) 사마리아 여인을 향하여 '내게 물을 달라고 청했을 것이다'라고 하여 그 여인이 어떤 갈증이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의 갈증이 무었이겠습니까 물론 신체적인 갈증을 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전혀 다른 종류의 갈증을 말하고 있습니다. 생의 의미에 대한 갈증, 마음 의 평화에 대한 갈증, 행복에 대한 갈증, 명예에 대한 갈증, 군력에 대한 갈증, 등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이고 그런 의미에서 정신적 갈증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명예, 학 문, 부, 지위, 권력, 건강, 정수, 자식번식 등 여러가지에 대한 갈증이 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갈증을 채웠다 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갈증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지식과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아무리 권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민곤을 느끼고 갈증을 느끼기 마련입니 다. 그것은 의미에 대한 배고픔이고 목마름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학식 과 재산과 권력을 많이 가질 수록 배고픔과 목 마름이 더 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의 전도서를 쓴 저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늘 아래 알려진 모든 우물을 마셨다. 지식과 지혜의우물, 사상가들이 파놓은 우 물, 천재들의 우물, 음악과 노래, 예술과 시의 우물, 이 모든 물을 다 마 셔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갈증을 느낀다는 것이 전도서를 쓴 저자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그가 고백하는 것은 의미를 찾아서 해갈한다고 해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갈증은 해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곧 영적 갈증입니다.

여기 예수님이 정말 이 여인에게서 본 갈증에는 이러한 정신적 갈증도 포함되어 있겠지만, 무엇 보다도 영적 구원에 대한 갈증이었다고 생각합 니다. 이 여인 자신이피력하지 않았으나 그것이 곧 그 여인의 마음 속에 구원의 갈증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런 동경, 본능이 그의 말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 속에 있었던 것 으로 보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기에 인간은 유한성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목마름이 있습니다. 인생은 안개와 같으며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고 풀잎과 같은 덧없는 존재라는 것이 성서가 묘사하고 있는 인생이고 실존주의자가 묘샤하고 있는 허무한 인생 이며 우리가 직접 체험하는 인생입니다. 성서에 모든 인간은 죄를 지은 존재이고(롬 3:23)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롬 6:23)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러기에 인간은 이 유한에서, 이 죽음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갈증이 있습니 다. 이것이 영적 갈증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 영적 갈증을 느끼고 이 갈 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헤메이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구원에의 갈증입니 다. 로마서에 이 사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모든 피조물은 하느 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니다....우리는 모든 피 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 니다. 피조물만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 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 음하고 있습니다.(롬 8:18-23) 예언서에 보면 하느님이 우리 인간에게 생명수에로 초청하시고 있습니 다.(이사야 55:1). 도 신약에 보면 예수님이 우리의 갈증을 채워주시고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결단코 목 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는 말씀은 곧 우리 인간이 영적 갈증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하고 구원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게 나아올 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목마름이 축여집니다.

묵시록에 보면 어린 양 예수님이 여러분을 초청하십니다. 목마른 자들 은 모두 와서 마시라는 초청입니다:목마른 사람도 오십시오. 생명의 물 을 원하는 사람은 거저 마시십시오(묵 22:17) 어떤 물로 초대하시는 것 입니까 성서가 우리들에게 와서 마시라고 초청하는 물은 성서를 통해서 살펴볼 대 대체로 세 가지로 성격을 지우고 있습니다.

첫째 이 물은 생명을 주는 물입니다. 곧 살아있는 물(즈가리아14:8) 또는 생명의 샘(묵 7:17, 21:6)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어린 양의 보 좌에서 직접 흘러나와서 도시 한가운데로 흐르는 강물이라고 했습니다.

묵시록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의 도성 한 가운데를 수정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묵 22:1-3)이 흐른다고 했습니다. 이 강물은 곧 생명의 물 이어서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물은 모 든 환란을 견디어 낸 순교자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묵 7:17, 21:6)이고 마시게 하실 것입니다. 또 하느님은 의로운 사람들에게 자유로 이,공짜로 그 물을 마시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목 마른 자에게 생명 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둘째 이 물은 치유하는 물입니다 예언자 에제키엘은 성전에 대한 계 시를 보았는데 그 성전 제단에서 샘물이 솟아나서 큰 강물이 되는 계시를 보았습니다. 그 강물이 메마른 광야 한가운데로 흘러 사해로 흘러들어 가 는데, 사해로 들어가서 사해의 짠물을 단물로 변하게 하고, 이 물 속에 온갖 생물들이 번창하며 살 수 있고, 고기가 득실거리고, 강가 양쪽 언덕 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며 잎이 시드는 일이 없으며 그 열매는 양식이 되고 그 잎은 약이 된다(에제키엘 47:1-12)고 했습니다. 치유의 잎을 싱 싱하게 하는 물이 바로 이 물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물은 구원하는 물입니다. 생명을 주는 물은 야훼 하느님 의 구원의 능력의 표지이고 상징입니다. 생명의 샘물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사건과 체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야훼 하느님께 서 사막을 방랑하는 이스라엘 민에게 샘물을 주시는 축복과 이에 감사하 는 소위 '우물에 대한 찬양'이 나옵니다. 거기보면 하느님이 모세에게 명 하여 그가 주시는 물에 대하여 백성들이 모여 노래하게 하고 있습니다.

샘물아 솟아라. 너희들 샘물에 맞추어 노래 불러라. 홀과 지팡이를 가지 고 지휘관들이 파고 백성의 귀족들이 터뜨린 샘이란다.(민수21:17-18)여 기 지휘관들과 귀족들이 판 우물은 곧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들이 팠다 는 말입니다. 이 무물의 노래는 하느님은 사막에서 갈증으로 죽게 된 이 스라엘에게 생명의 샘을 주시어 구원하신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또 사사기에 보면 야훼 하느님의 구원의 위업을 노래할 때 우물 가에서 하도록 명하고 있는 점이 주목됩니다. 우물 가에 모여 기뻐하는 사람들 아, 야훼의 승리를 노래하여라. 이스라엘을 거느리시고 거두신 승리를 노 래 하여라.(판관기 5:11). 여기서 야훼의 승리는 곧 이스라엘을 적의 침 략에서 구원해 주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에언서 이사야서에 보면 하 느님의 구원을 약속하실 때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 라(이사야 1

2.3)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훼 하느님의 구원하는 행적 을 말할 때 물과 샘에 관련시키고 있는 점이 주목됩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 현대인이 얼마만큼 이러한 생명수를 갈망하고 사모하 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열대 지방인 팔레스틴에 살았던 이스라엘민족은 어린 새끼를 가진 암사슴이 제일 갈증을 느낀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심 한 갈증을 말할때 암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듯 갈증을 느낀다는 것을 묘 사했습니다.

물이 풍성한 대륙성 기후의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갈증을 경험하는 일 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얼마든지 물을 마실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세게인 팔레스틴은 열대지방이고 사막지방이어서 물이 아주 귀합니다. 물 을 만나면 사람이 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사람은 살 수없습니다.

물은 곧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물을 위한 싸움은 곧 생존의 싸움으로 되 어 있습니다. 갈증에 대해서 자주 말하고 있는 이유도 이런 데에 있는 것 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종교인이 관찰하면, 추운 북쪽 지방에서는 과학, 기계공학이 발달 한데 비해, 뜨거운 남쪽 지방에서는 종교가 발생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 이 맞는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 기원한 유교를 제외하고 유대교, 기독교, 이스람교, 등은 뜨거운 열대 지방인 중동에서, 마호메트는 역시 열대지방 인 인도에서 발원했습니다. 뜨거운 열기에 목이 갈한 시련을 겪고 살아가 는 사람들이 위대한 종교신앙을 창건한다는 것은 정말 역설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서울의 한 풍경운 도봉산이나 북한산, 또는 서울 근교의 산들에는 생수를 긷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서울 사람들은 생 수를 찾아 헤맵니다. 가정 집에 들어오는 수돗물은 중금속이 포함되어 있 고 온갖 균이 들어 있어 그 물을 마시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이 상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많은 서울 사람들은 생수를 사서 먹 거나 직접 산으로 가서 맑은 생수를 길어다 마시고있습니다. 생수를 긷 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씁니까 어던 음식점에서는 '우리는 수돗물로 요 리를 하지 않고 우리 가족이 매일 산에서 길어오는 생수로 요리한다'라고 선전하는 곳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적 생수를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가 하는 것을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육체적 삶에서 생수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 는 뼈저리게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생수를 길으러 먼 곳을 마다하지 않고 다니고 무거운 물통을 지고, 들고, 실어 나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영적 생수를 위해 그만큼 목마름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질 문을 해 봐야 할 것입니다.

엔학코레의 샘에서 해갈을 받는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 까 학자들은 성서에서 말하는 생명수가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하여 그 것은 성령을 의미한다고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성 령의 능력으로 생기를 얻고 기운을 얻을수 있습니다. 또한 성서에서 말하 는 생명수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생명의 원천이 되고 인간을 살리는 신통한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생 명수는 성도의 친교, 곧 교회라고 할수 있습니다. 교회는 지상의 교회가 여러 가지 문제와 결함을 가지고 있고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보이지 않는 완전한 교회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교회는 성도의 친교인데 이 친교에서 생명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삼손이 목이 말라 죽을 지경에 이르러 하느님께 부르짖어 엔학코레의 샘에서 갈증을 해소하고 살아났습 니다. 오늘 우리들은 과연 엔학코레의 샘에서 목축인 체험이 있습니까

설교를 듣고 응답하는 교우의 기도 이 땅에 고인 물을 다 마시고도 채워지지 않을 갈증에 허덕이는 영혼을 영원한 생명의 물가로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 당신의 생명수로 자라난 모 든 감사와 찬양을 받으소서. 당신께서는 죽음의 사막 같은 세상 한 가운 데 소망과 회생의 우물을 넘치게 베푸시고 목마른 자 누구든 오라고 부르 셨습니다. 그러나 혀 끝에 타는 당장의 갈증만 급급하여 아무 물에나 목 을 축이고 당신의 초청을 잊고 사는 어리석음을 용서하시옵소서.

살아계신 생명의 물길이신 하느님! 땅에서 솟는 물로는 씻어 낼 수 없 는 저의 심령의 갈피마다 당신의 말씀의 생수로 채워 주시옵소서. 가뭄에 논 바닥이 갈라터지듯 안타까운 삶의 이랑에는 소생의 물줄기가 터져서 모든 죽어가는 생명이 되살아나게 하옵소서. 이 땅의 역사 저 밑바닥으로 부터 우렁찬 통일의 물기둥이 솟아올라 타는 목마름을 안고 심음하는 모 든 형제들과 함께 반 백년 가뭄을 이기고 희년의 축복에 흠뻑 젖게 하시 옵소서.

하느님! 당신은 오직 믿음으로만 찾을수 있는 청청한 생명수인줄 믿사 오니, 그 믿음으로 화해와 평화의 터전을 가꾸도록 지켜주시옵소서. 날마 다새로운 소망과 치유의 생명수이신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 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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