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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하나됨을 지킵시다 (엡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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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작가 헤밍웨이의 작품 가운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있습니다. 누구나 이 작품을 책을 통해서건 영화를 통해서건 한 번쯤은 다 보았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스페인 내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인 공 파블로는 파시스트 세력의 배후 지도자로서 매우 기회주의적인 인물로 묘사되었습니다. 아군의 군대가 적의 다리를 폭파시키기 직전에 그는 다이 나마이트를 가지고 도주합니다. 진실하고 정직한 아내 필라는 이런 남편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완전히 실망했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도망갔던 파블로 가 예상을 뒤엎고 다시 돌아옵니다.

 파블로가 돌아온 이유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되어 돌아온 것도 아니고 갑자기 잃어버렸던 애국심이 발동해서 돌아온 것도 아니고 또 아내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다시 돌아온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 돌 아왔느냐는 동지들의 물음에 그는 단순한 말로 대답합니다.

나는 너무 고독했다.

지금까지 그가 속해 있던 공동체에서 탈출하여 느끼게 된 혼자라는 소외감 이 그를 못 견디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나는 이제 혼자다라는 감정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작가 헤밍웨이는 이 작품을 통해서 인간 소외의 비극, 인간은 결코 홀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원서 표지에는 존 던의 시가 인용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결코 외따로 떨어진 섬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대륙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한 가족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제일 어려운 것은 그 동 안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환경 속에서 계속해서 살기가 어렵다는 사실입니 다. 우선 친구가 바뀝니다. 그리고 예전에 싫어했던 것을 좋아하게 되고 예 전에 좋아했던 것을 이제는 싫어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몸담고 살아왔던 환 경 속에서 옛날처럼 그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결국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 거듭난 사람, 구원받은 사람 들은 옛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떠난다는 것이 우리를 고독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순간, 예수 믿고 구원을 받게 하시는 순간, 우리를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에 속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교회 가족의 일원 으로서 살게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 교회 안에서 한 지체가 되어 그 안에서 함께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 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는 아빠도 있고 엄마도 있고 언니, 오빠, 형, 누나 도 있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한 가족입니 다. 그러나 한 가족이라는 말과 그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 됨을 경험하면서 그런 하나 됨을 실현하며 사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부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형제들 사이에 시샘이 일어나면 그들 은 한 지붕 밑에 살면서도 전혀 하나라는 감정을 체험하지 못하면서 뿔뿔이 고독하게 살아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가족이 어떻게 하나 됨 을 이루어 나가느냐 하는 것은 한 가정의 과제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으로 한 가족 되게 하셨습 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 하나 됨을 진정 우리의 교제 가운데서 실현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에베소서 4 장 3 절 말씀에서 바울은 평안의 매는 줄 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주의 깊게 보면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성령은 이미 우리를 하 나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거듭나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우리는 이미 한 가족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한 가족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평안함 가운데서 아름다운 교제를 이루어 나가야 할 책임이 우리게게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힘써 지키라는 것은 명 령입니다. 이 명령은 우리에게 노력의 응답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 됨을 힘써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까

본문 말씀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이 하나 됨을 실현해 나가기 위한 그리 스도인들의 교제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우리가 한 가족으로 교제하게 된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4-6 절 말씀을 보면 바울 사도는 교제의 근거를 제시 합니다. 우리가 한 가족이라는 증거, 우리가 한 가족으로서 하나 됨의 교제 를 나누어야 할 이유는 일곱 가지나 됩니다.

4절부터 살펴보면 몸이 하나이고, 성령도 하나이고, 소망도 하나이고, 주 (主)도 하나이고, 믿음도 하나이고, 우리의 신앙 고백인 침례(세례)도 하나 이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아버지도 한 분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일곱 가지가 하나인 것이 우리가 하나라는 근거입니다.

 이 일곱 가지 근거는 다시 세 묶음으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4 절부터 6 절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세 가지를 추려 보십시오. 우선 4 절에서 는 성령입니다. 5 절에서는 주, 즉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6 절에서 는 하나님 아버지가 주요 단어입니다. 정리하면 성령님, 주 예수님, 하 나님 아버지(성부 하나님), 이렇게 크게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가족이 되는 근거 세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 성령

4 절의 한 몸, 한 성령, 한 소망은 성령 안에 다 묶을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예수 믿는 순간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가 되게 하 는 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를 믿자마자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는 것도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 다. 그래서 우리는 한 성령의 역사(役事)를 체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 주(主)

5 절의 한 주님, 한 믿음, 한 침례(세례), 이것이 또 하나의 묶음을 이룹 니다. 이 세 가지 근거는 주님으로 대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습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 신앙의 동일한 대 상이 되십니다. 그 한 주님을 우리는 함께 동일한 믿음으로 믿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반드시 신앙 고백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 리가 침례(세례)를 받는 것은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 모두 같은 신앙 고백 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셋째 / 하나님 아버지(성부 하나님)

6 절의 하나님이 우리가 한 가족이 되게 하는 세번째 큰 근거입니다. 우리 는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하나 가 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성삼위(聖三位) 하나님을 언급할 때 순서를 항상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 순 서가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이 나오고 그 다음에 성자 하나님이 나 오고 마지막에 성부 하나님이 나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한 설교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경험적인 순서대로 서술한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과정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성삼위 하나님 가운데 제일 먼저 만나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바로 성령입니다. 우리가 죄 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회개하게 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되는 것 은 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사실을 인식하든 인식하지 않든 신앙 생 활이 시작되는 과정에서 최초로 만나는 대상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만 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을 마음 에 모시게 되면 그 다음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은 경험적 순서에 따라서 성 령을 말하고 성자를 말하고 그 다음에 성부 하나님을 말한 것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입니까 바울은 한마디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 님으로 고백하고 또 같은 성령님을 체험해서 우리가 같은 소망을 갖게 되었 다면,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만하면 우리는 충분히 한 가족이 아닌가 요

인간은 모두 외로운 존재들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만날 때마다 서로의 공통 분모를 찾습니다. 같은 점이 어디 있는지 서로 알아봅니다. 한 국 사람의 경우에는 제일 먼저 묻는 것이 고향입니다. 고향이 다르다고 해 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학교는 어디 나왔는지 따집니다. 대학교, 고등학교, 중학교, 국민학교는 물론 유치원까지 따지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하여간 우리는 같은 것이면 무엇이든 찾아냅니다. 그래야 직성이 풀리나 봅니다. 남자들은 군대 생활을 어디에서 했는지 빼놓지 않고 확인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것이든 공통 분모를 찾아서 같이 외로움을 나누고자 합니 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런 것이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한 가지 질문이면 족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는지 물으면 됩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는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서로 형제요 자 매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 됨을 이루 어 나가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들고 있습니다. 같 은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고백 하고 성령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같은 소망을 갖게 되었다면 우리는 한 운 명 공동체에 속한 것입니다. 한 형제와 자매요 한 가족인 것입니다.

 하나 됨을 견고히 하는 행동

우리는 정말 이 한 가족 됨을, 하나 됨을 실현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 다면 원인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하나 되게 하신 그 교제를 우리가 더욱 든 든하게 하고, 성도들을 만날 때마다 그 교제 속에서 이 외로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삶에 대한 희망과 삶의 의미를 얻을 수 있는 길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본문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우리의 교제를 지켜 나가기 위한 행동,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 절 말씀이 그 해답입 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겸손, 온유, 오래 참음, 그리고 사랑 가운데 용납함, 이런 것들이 우리의 교제를 더욱 든든하게 세워 나가고 지켜 나가는 인격적인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태도 이상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인격적인 덕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덕목 이상의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들을 차라리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으로 강조합니다.

 1 절을 보면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 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했습니다. 행하라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2 절 말씀은 단순한 태도가 아니라 겸손한 행동, 온유한 행동, 오래 참는 행동, 그리고 사랑으로 용납하는 행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러한 행동만이 우리의 교제를 더욱 든든하게, 그리고 아름답고 깊이 있게 가꾸어 나갈 것입니다.

 바울이 가르치는 교제를 든든히 하는 네 가지 행듬을 자세하게 공부해 봅 시다.

 첫째 / 겸손 겸손이라는 말을 원어로 살펴보면, 그 뜻이 우리의 생각이나 자세를 낮 춘다입니다. 이는 종의 자세, 혹은 종으로서의 행동을 뜻하는 말입니다.

종의 자세의 반대는 뭡니까 다른 사람을 부리는 자세, 지배하는 자세, 혹 은 남을 조종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때 아름다웠던 성도의 교제가 피해를 입고 상처를 입는다면, 그것은 반 드시 우리 중에 누군가가 겸손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 리 중에 누군가가 상대방을 이용한다든지 주장한다든지 함부로 부리려 할 때 우리는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겸손만이 우리의 교제를 세울 수 있습 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성경이 기록되던 그 당시의 문화, 헬라 문화나 혹은 그 다음에 일어나게 되는 로마 문화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겸손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없었다고 합니다. 겸손이란 말은 있었어요. 그러나 그 당시의 겸손은 비겁하다는 뜻을 가진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로마의 문화 는 겸손이라는 덕목을 낮추어서 생각했던 것입니다. 겸손은 차라리 비겁 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겸손이라는 단어가 가져다 주는 따뜻함, 겸손이라는 단어의 질적인 아름다 움과 그 의미를 회복시켜 겸손을 위대하게 만드신 분은 누구입니까 그분 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 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 과 같이 되었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던(빌 2:6-8) 분, 그분은 겸손을 진정한 의미의 겸손으로 만드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이라(마 20:28)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겸손을 실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는 당신과 저는 지금까지 얼 마나 겸손한 삶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네비게이토 선교 단체의 회장을 지낸 론 쎄니에게 어느 날 한 대학생이 찾 아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종의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하는데 어느 수준까지 가야 종의 자세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제가 종의 태도, 겸손한 태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저 스스로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론 쎄니가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것은 자네가 종으로 취급당할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안다네.』 당신이 종처럼 취급당할 때, 그때 정말 종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까 그렇 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와 달리 우리는 아직도 종의 이상 (理想)을 우리의 삶에서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도의 교 제를 견고하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행동으로 겸손을 강조합니다. 저와 당신은 오늘도 내일도 이 겸손을 추구하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둘째 / 온유

우리는 보통 온유하다고 하면 연약한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온유 라는 단어는 연약함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래 온유라는 단어의 뜻은 강력한 힘이나 격한 감정들이 철저하게 다스려져 통 제되고 있는 모습을 뜻합니다. 영어로 power under control이라고 합니 다. 힘을 제어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온유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입니다. 아주 사나운 야생마가 한 마리 있다고 칩시다. 보통 사나운 것이 아닌 야생마였는데 그 말을 훈련시 켰더니 훌륭한 준마(駿馬)가 되었습니다. 이때 헬라 사람들은 그 말을 가리 켜서 『프라오테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온유해졌다는 뜻입니다.

 야생마는 자기의 힘을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야생의 힘이 아직도 내재 하고 있지만 그 힘을 잘 통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서 격정이 일어 나고 힘이 솟구칠 때, 올바른 목표와 올바른 자세를 위해서, 또 이웃의 유 익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감정과 권리를 통제할 줄 아는 사람을 성경은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배들은 한평생 온유를 추구했던 사람들입니다.

두 사람만 살펴봅시다.

 1.아브라함

아브라함이 자기 조카 롯과 더불어 살다가 종들끼리 싸움이 나자 두 사람 사이도 불편하게 되었습니다. 둘이 떨어져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때 물론 기득권은 아브라함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땅을 선택하고 나누 는 과정에서 롯을 어떻게 대합니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창 13 9).

 이는 롯이 먼저 땅을 선택하고 나면 남는 땅을 자기가 갖겠다는 말입니 다. 선택의 우선권을 롯에게 주었습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 쪽 땅이 아주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롯이 그 쪽을 선택합니다. 아브라함은 좀 안 좋아 보 이는 다른 쪽 땅을 선택했습니다.

 모든 것을 양보할 수 있었던 아브라함의 태도는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그 에게는 우리의 문제,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이 아시므로 모든 일을 주님 악 에 다 맡기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또한 땅 문제 가지고 상처받고 갈등 하기보다 손해를 보더라도 평화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결의 가 있었습니다. 장래 문제를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평화를 추구했던 아 브라함의 결단에서 그가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다윗

다윗을 시기하여 다윗의 목숨을 노리던 사울 왕의 추적은 대단히 집요했습 니다. 어느 날 다윗은 굴 속에 숨어 있다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만납니 다(삼상 24 장 참조). 그때 사울은 용변을 보고 있었습니다. 원수를 처치하 기에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그런데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의 옷자락만 조금 베었습니다.

또 한번은 사울이 다윗을 뒤좇아 황무지로 내려왔습니다(삼상 26 장 참 조). 밤이 되어 사울은 진(陣) 가운데 누워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이때 다 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 꽂혀 있는 창으로 사울을 해할 수 있었으나, 그는 단지 사울 머리맡에 있던 창과 물병을 들고 나옵니다.

 다윗은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사울을 죽여도 비난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사울이 다윗 손에 죽어 도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복할 수 있는 권리를 사용하지 않고 올바른 목표를 위해서, 올바른 삶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제어했던 이 다윗이야말로 온유한 사람 중의 온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도의 교제 가운데 위기를 경험하게 되고 상처를 입게 되는 경우 는 어떤 때입니까 어떤 사람들의 자기 주장이 지나치게 강할 때 그와 교제 를 나누는 사람들이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지나친 자기 주장의 배후에 는 종종 자기 신뢰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기를 믿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이 아니라 자기의 신념, 자기의 생각을 믿고 있기 때문에 도무지 양보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제를 깨뜨리고 상처를 입힙니다.

 내 주장보다 상대방의 생각이 더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교제가 지속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판단하실 하나님, 그분 악에 마지막 결정을 맡기고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의 평화를 위해서 자신 의 생각을 양보하고 자신의 권리까지도 철회하며 평화를 추구할 수 있는 인 격을 성경은 온유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교제를 더욱 든든하고 아름답게 세워 나가기 위하여 저와 당신은 진실로 온유를 추구하는 사람이 됩시다.

 셋째 / 인내

오래 참음이 우리의 교제를 돈독히 하는 세번째 행동입니다. 인내의 뜻이 뭡니까 인내란 어떤 역경, 어떤 위기, 어떤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지금 처한 환경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이것이 하나님 이 허용하신 환경이라 믿고 있는 사람, 고통스럽고 짜증 나는 역경 속에서 도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신뢰하는 사람은 오래 참습니다. 하나님 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말씀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인내합니 다.

오늘의 고통을 내일의 영광으로 바꾸어 주실 하나님, 오늘의 좌절을 내일 의 희망으로 바꾸어 주실 하나님, 오늘의 나의 손해를 내일의 축복으로 바 꾸어 주실 그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합니다.

이것이 인내입니다.

 그러나 인내는 아무 과정이 없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인내의 인격, 이것은 과정을 통해서만 형성됩니다. 그러나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 인들의 문제는 과정 없이 결과만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인내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만 인내하는 과정은 싫어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영국의 독실한 그리스도인 백작 부인 한 사람이 어느 날 자기의 신앙 생활 을 점검하다가 인내가 모자라는 것을 발견하고 주님 악에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인내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제가 참을 수 있는, 인내하는 사람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기도한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도 종종 열심히 기도하고 기도한 것을 잊어버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 백작 부인도 자기가 기도한 것을 잊 고 지냈습니다.

그런던 중 그 집에 새로운 가정부가 들어왔습니다. 이 가정부가 하는 일마 다 실수투성이입니다.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이 하는 일마다 망치는 겁니다. 그러니 백작 부인이 볼 때 얼마나 가슴 아프고 답답하고 신경질이 나겠어요

백작 부인이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분하고 속상해서 쩔쩔매는데 갑 자기 몇 달 전에 자기가 한 기도가 생각나더랍니다. 하나님 저에게 인내 를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던 사실을 기억하면서 실수투성이의 가정부가 온 것이 기도 응답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얼마나 인내를 연습하기 좋 습니까 가정부가 하는 일마다 신경질 나게 만드니 그때마다 참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얼마나 훌륭한 인내의 훈련장입니까 오늘 우리는 그 과정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인내는 과정 없이는 절대로 만 들어지지 않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만 참으로 오래 참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이 오래 참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형제 자매들과의 교제를 든든하게 지켜 나갑니다. 우리들의 교제는 한 사람의 조급함 때문에 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께서 저와 당신에게 이 오래 참는 성품을 주시기를 기도합시 다.

 넷째 / 용납

용납도 교제에서 없어서는 안 될 덕목입니다. 그런데 그냥 용납하라는 것 이 아니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가르칩니다. 쉽게 말하면 용 납한다는 말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 대로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인간 관계의 위기가 왜 생깁니까 한마디로 상대방이 내 마음에 안 들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드니까 상대방이 변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상 대방이 변하기를 기대할수록 바뀌지 않는 상대방을 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더 속상해 합니까 당신은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용의가 있 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관점에서 상대방을 바라보고 비판하고 험담하고 또 욕합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속상해집니다. 이것이 인간 관계가 당면한 위기의 악순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강조합니까 서로 용납하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 납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무슨 뜻입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성경이 강조하는 사랑의 의미는 상대방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 고 상대방의 유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자리에 서 보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자리에 서면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의 배경을 살펴보고 그 사람이 자라난 배경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삶의 형태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상대방을 도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상대방을 용납할 수 있습니다.

이 용납이야말로, 이 관용이야말로 우리의 교제를 얼마나 아름답고 진실하 고 위대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한국인의 의식 구조』로 유명해진 이규태씨가 최근에 『한국인이 버려야 할 버릇』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저자는 그 책에서 한국이 현대화되어 가 는 과정에서 한국인이 잃어버린 미덕 가운데 하나가 관용의 미덕이라고 했 습니다. 좁은 땅 덩어리에서 산업화가 이루어지니까 경쟁이 치열합니다. 경 쟁에서 이기려니 사람들이 다 원수가 됩니다. 다 적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은 관용의 미(美)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소중했던 이 관 용의 미덕이 산업화에 밀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현대의 한국인을 가리켜서 마치 독 속의 게와 같다고 했습니다. 항아 리 속에 게를 집어 넣으면 어떻게 될까요 게들은 항아리 밖으로 나오려고 탈출을 시도합니다. 그래서 막 기어올라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한 게가 기어올라가면 다른 게가 뒷다리를 붙들고 늘어집니다. 한 마리가 올라 가려고 하면 다른 한 마리가 붙들고 늘어지기 때문에 항아리 밖으로 기어나 오는 게는 거의 없습니다. 이런 게들의 생활 철학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너 죽고 나 죽자입니다.

 제가 군대 생활을 미군 부대에서 했습니다. 그래서 미군과 같이 사는 여자 들도 많이 보았는데, 그들은 남자에게 신경질이 나서 대들 때 말이 안 통하 니까 가슴만 쳤습니다. 어느 날 한 여자가 제게 오더니 너 죽고 나 죽자 는 말을 영어로 어떻게 표현하느냐고 물어요. 그런데 제가 갑자기 생각이 안 나서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 질문을 한 여자는 너무 화가 나니까 미군을 붙들고 You die / me die / OK 하고 소리쳤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도 이런 삶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과연 누 구일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 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우리는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사랑으로 용납하는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제가 성경 공부를 인도하면서 이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한 교우가 제 애 기에 반발하듯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렇게 살다가는 이 세상에서는 망해요.

겸손하고 온유하고 인내하고 용납하다가는 이 세상에서는 망한다는 겁니 다. 그 교우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이런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손해를 볼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손해를 볼지도 모릅니다. 자존 심에 손해를 볼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바보처럼 산다는 비판을 받 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손해만 볼까요 우리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으로 용납 하는 삶을 추구하다 보면 어떤 사람이 됩니까 겸손한 인격, 온유한 인격, 인내하는 인격, 그리고 사랑으로 용납하는 인격의 사람이 됩니다. 이런 인 격의 가장 훌륭한 모델이 있다면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친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니(마 11:29).

 예수님은 겸손하고 온유하셨을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도 오래 참으셨습니 다. 그리고 사랑 가운데 우리를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인격 을 추구하다 보면 누구를 닮습니까 주님을 닮습니다.

 우리에게 물질적인 손해가 있을지 모르고 다른 사람들에게 바보 소리를 들 을지도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주님을 닮아 가는 데 있다면, 그 빛나고 아름다운 주님의 인격을 닮아 가는 것이 손해일까요 우 리의 삶이 끝나는 순간, 심장이 멈추는 순간 우리가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세상에서의 출세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때는 단 한 가지밖에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 악에 어떤 사람인가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 사람인가

우리의 삶에 인간적인 손해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주님의 빛나고 놀라운 인격을 닮아 갈 수 있다면,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양보와 온유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견고하게 세울 수 있다면, 그리고 이러한 자 세를 통해서 우리가 모일 때마다 성도의 교제가 신나고 아름답고 풍성하고 달콤한 사귐으로 발전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그리스도인 형제와 자매를 만 날 때마다 그 교제를 통해서 쓸쓸하고 외로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힘과 용기를 얻어서 이 세상을 이길 수만 있다면, 이것이 손해입니까

우리 서로 하나 됩시다. 그리고 하나 됨을 지켜 나갑시다. 주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하나 되게 하신 이 위대하고 놀라운 교제를 더 깊이 더 아 름답게 발전시켜 주시기를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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