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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결 (요 1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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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장부터 16장까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두고 이제 마지막으로 제자들 에게 권면하고 설명하셔야 할 것들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17장에서는 예 수님의 기도가 나오고 그 이후에는 십자가 사건으로 연결이 되어집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나오고 이어서 저녁 식사 이후에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 기시는 것이 필요한 일이라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베드로의 차례가 와서 베드로가 '주님께서 제 발을 씻는 것을 감당치 못하겠으니 저는 사양하겠습니다.'라고 하자 8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 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일종의 봉사나 겸손이나 섬김에 관한 이야기 이 상의 뜻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9절에서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그러니까 이미 목욕한 자는 다시 다 씻을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발만 씻으면 된 다고 그럽니다.

오늘 이 말씀을 중심으로 구원과 성화에 관한 신앙 생활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하 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기간을 거의 다 보내시고 이제 이 세상을 하직할 때가 이르 렀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제 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끝까지'라는 표현 속에는 이런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곧 뒤에 나오는 것같이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즉 배신자가 있을 것을 아십니다. 요13:21절을 보시면: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 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팔 자가 있을 것을 알고 계씨고, 또 베드로와 같이 자기를 부인할 자가 있을 것도 아십니다. 요13:37-38절을 보시면: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쑤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더더욱 나중에 게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실때 예수님께서 참으로 힘들게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에게도 동참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3번이나 와서 보니까 3번 다 제자들이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의 말씀대로 끝까지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얼마나 은혜로운 약 속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유다 같고, 베드로 같고, 또한 주인과 스승되신 분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는 어리석은 제자 들 같으나 끝까지 사랑하셔서 사랑을 이루어 내고야 마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어떻게 끝까지 사랑하시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기록된 바와같이 발을 씻기심으로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성경에서 '씻긴다'고 하는 대목만 나 오면 피로 우리 죄를 씻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씻는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자녀로 옮겨지는 중생을 위한 죄씻음 이외에 성결에 관한 의미도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구약 성전의 구조를 살펴보면, 성전 사방에 벽을 쌓아 만든 뜰이 있었습니 다. 그리고 뜰 안에는 성소가 따로 있었습니다. 성소 안은 둘로 나누어서, 네모난 데를 둘로 나누어서 안을 지성소라고 합니다. 이곳은 가장 거룩한 곳입니다. 그 안 에는 속죄소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일년에 꼭 한 번밖에 못 둘어가는데 그 것도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들어가서 이스라엘 모든 민족의 죄를 속죄하는 것입 니다. 그렇지 않고 잘못 들아가면 죽게 되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반 나눈 앞 쪽은 보통 제사장들이 늘 드나들 수 있는 장소 입니다. 거기에는 언제나 불이 켜져 있는 촛대와 향 냄새를 나게 하는 향단, 그리 고 떡을 늘 놓아 두는 상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세가지는 그 성소 안에 늘 있습니다 지성소 성소는 휘장으로 막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휘장이 위로부 터 둘로 갈라졌다고 하는 것이 바로 여기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오면 뜰입니다.

뜰에는 문에서 들어서자마자 단이 놓여 있습니다. 놋으로 싼 큰 네모난 단에서 모 든 제물을 잡습니다. 여기서 제물로 가져온 송아지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를 가져 오는 대로 여기서 잡아서 각을 뜨고 피를 쏟고 그 고기들을 이 위에 올려 놓고 불 사름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이 단과 성소 사이에 세수 대야 라는 것이 놓여 있습니다. 보통 주의를 집중하지 않는 물건 중의 하나입니다. 여기에는 말하자면 제물로 인하여 깨끗해진 자만이 들 어가는 것입니다. 즉 피 없이 는 성소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히9:11-12절을 보시면: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 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그러니까 성소에는 제물이 있어서 속죄하는 피가 있은 다음에야 들어갈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 성소는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인이 라서 그냥 들어가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죄를 대속하는 속죄제를 드리고 나서야 비로소 성결함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대속되 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약식으로 말하자면 구속받고 중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번제단 과 성소 사이에 물그릇이 또 놓여 있습니다. 히9:19-22절을 다시 보십시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 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쫓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는 말씀은 곧, 피로 죄를 속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죄를 속하여 이제 성결케 된 자도, 신분적으로 거룩하게 된 자도 수준적으 로의 성결을 위하여 물로 씻는 일이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제물을 잡고 그 피로 우리를 정결케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소에 들어가는 중간에 꼭 물그릇이 있어서 자 기를 씻고 들어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식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으로 그냥 벌거벗고 성소에 들어가리라고 쉽게 생각해서는 안된 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우리의 구원은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를 벌거벗은 사람으로 구원해 내지는 않습니다. 구원은 언제나 완성을 향한 목표가 있습니다.

복음서의 다른 곳에 나온 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어떤 부자가 잔치를 열고 이웃 사 람들을 불렀는데 아무도 안 오겠다고 합니다. 다 바쁘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인이 종들에게 이렇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길거리에 나가서 누구든지 잡아오너라.' 그 래서 모든 사람을 강권해서 잔치에 불러 들였습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나중에 와서 이렇게 판정을 내립니다. '예복을 입지 않는 자는 쫓아내라!' 성경이 이야기 하고 있는 구원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 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이상 당신께서 사랑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택한 자를 성결케 하지 않는 자는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반드시 붙어 다니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조건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 는 것이 그 다음부터는 놀고 있어도 된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입시철이 되면 부모님에게 가장 큰 효도를 하는 것은 학교에 합격하는 것입니다.

학교에 떨어지지 않고 합격하는 것처럼 기쁜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합격하면 그 것이 끝입니까 붙은 자와 떨어진 자 중에 어느 쪽이 편합니까 만일 여기서 재수 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떨어진 사람은 이제 그 하기 싫은 공부를 안 해도 됩니다. 그러나 입학한 자는 그 다음부터 또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공부하 기 위해서 합격한 것이지 놀기 위해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구원이란 언제나 이와같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십자가로 구원을 얻으신 자녀라면 그 다음부터 당장 요구되는 작업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발을 씻는 것입니다. 즉, 성결케 되며, 거룩케 되며,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로서 의 완성의 길을 걷도록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해당된 하늘나 라 학교의 점수를 다 채우기 까지는 이 세상을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이 대목 에서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할 때에 '끝까지'는 한번 사랑하시면 절대로 놓지 않 으신다는 의미입니다. 다시말해 내가 배신하고, 내가 혹 실수를 하고, 실패를 한다 고 할지라도 나를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여기서 이 같은 사랑이 우리의 죄도 덮어주고, 실수도 덮어 주고, 아무래도 좋다는 뜻일까요 물론 그런 뜻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하여 제단에서 당신의 몸을 불사르신 예수 그 리스도께서 우리를 성소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꼭 물로 씻는 일을 해내시고야 만 다는 뜻입니다. 다시말해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서 철저히 간섭하셔서 우리를 고쳐 내시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이 물로 씻는 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가 엡5:22-27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 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긋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 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 이니라 여기에서 부부라는 것은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놀라운 직분이라는 것을 알 게 됩니다. 부부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상징입니다. 남편은 주 예수 그리스도 의 상징이 되고, 아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모든 관심의 대상인 그의 몸된 교 회입니다. 교회란 여기서 모든 신자들을 총칭하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되 시면 가정에서 남편의 말에 꼭 순종하셔야 됩니다. 남편에게 주어진 권위는 명령하 고 폼재고 대접받기 위해서 주어진 권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으로서 존 재한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내는 신자의 상징입니다. 그러기에 종종 예수님같지 않은 남편의 명령에도 예수님 앞에서 순종하는 자의 모습을 가져 야 되기 때문에 어려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예수님 모습을 잘 안 만드니 까 나도 신자의 모습을 잘 못하겠다 이렇게 부창부수하지 마시고 남편이 어떠하든 지 간에 아내는 또 아내로서의 자기 책임을 다 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구절이 나옵니다. 엡5:26절에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 게 하사 거룩하게 했다고 합니다. 물로 씻는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떤 것이냐 하 면 '말씀으로'입니다. 모든 신자는 구원을 얻은 이후에 말씀으로 성결케 됩니다.

왜 말씀이 여기에 등장하느냐 하면 그것은 우리가 영원한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것들은 우리가 다 경험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무 엇이 즐거우며, 무엇이 자랑할 만한 것이며, 무엇을 잴 것인지를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신령한 세계의 영원한 것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그 영역의 것들은 우리가 원래 알고 있던 것들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내용들은 약속되어 있는 것이며 미래에 관한 것들이지 우리가 과거에 경험한 것들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믿 음 속에서 확보하고, 확인하고, 경험하고, 커가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 싸 움이 어렵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경험한 것들에 관한 싸움이라면 경험과 경험을 놓고 사실과 사실을 놓고서 비교하면 공격과 방어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가 질 수 있을 것입니다만, 신자들의 싸움이란 약속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얼마만큼 분명하게 머리 속에 그리고 있느냐 하는 것이 성결케 되는데 있어서의 첫번째의 싸움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의 출애굽 사건을 볼 때마다 놀라는 것은 어쩌면 그토록 많은 기적 속 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에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 에 제대로 순종하지 않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것입니다. 애굽은 그들에게 있어서 경험이 있는 곳이지만 가나안이라는 데는 들 어가 본 적이 없는 곳입니다. 그들이 지금 가나안을 향해서 가고 있지 가나안 속에 있지는 않은 것입니다. 가는 길은 광야의 길이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과 애굽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과 광야를 비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비록 종으로 살았을지언정 애굽이 더 낫다는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있었을 때에는 마늘도 있고, 부추도 있고, 고기도 있고, 떡도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보이는 것이 아침에도 만나, 점심에도 만나, 저녁에도 만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럴 바에야 왜 애굽에서 나왔느냐'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호소로서 가장 어려운 시험거리였던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가나안이었지 광야는 아니 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노상에 있기 대문에 비교할 수 있 는 경험이라고는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여기와 과거의 경험했던 그곳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었을 때와 안 믿었을 때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낫습니까 예수 를 안 믿었을 때가 훨씬 낫습니다. 그 때는 죄를 지어도 최소한 양심의 가책이 없 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죄를 조금 덜 짓는데도 불구하고 그때보다 더 불편합니다.

그때는 악하게 살았어도 성공했었는데 지금은 정직하게 살아도 만사가 불통입니다.

그래서 늘 우리는 혼동하게 됩니다. 도대체 지금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 잘하는 짓 인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결국 이것인가 이게 과연 가치있는 길인가 하는 혼 동과 착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꾸만 말씀을 보셔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 때, 이것이 어디로 가는 통로인가를 알게 되고 이 통로 끝이 무엇인가 를 자꾸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그 길이 넓어서 많은 사름들이 그 길로 온다.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그 길이 좁고 협착해서 찾 는 사람이 적으니라!' 이런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가는 길이 좁은 길이라는 것을 알게되며, 비록 좁지만 길 저 쪽에 생명의 자리가 있으며, 영원이 있으며, 하늘나 라가 있는 줄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의 약속과 말씀들을 통해서 나 라는 신분이 무 엇이며,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 분명한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 다. 이 길 이외에는 내가 성결한 자리로 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제는 혼동하지 않고 올바로 분별하여 참고 인내할 것을 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말씀이 갖는 효력입니다.

그러나 지금 신자들은 어떻게 신앙 생활하고 싶어하느냐 하면 내가 가는 이 길에 서 확신과 흥분과 자랑이 있게 해 달라고 그럽니다. 우리가 앞으로 도착할 그 곳이 의미 있는 곳이요, 자랑스러운 곳인데도 우리는 자꾸만 지금 흥분과 자랑이 없다면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목적지가 어디이든지 간에 길이 좋지 않으면 안 가겠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좋은 길을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몰라도 얼마나 모르는 억지입니까 산 좋고 물 좋고 경치 좋고 그리고 목적지까지 좋은 길 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은 둘 다 좋다고 하지 않습니다. 목적지가 좋으면 길이 좁 고 험하며, 길이 넓고 편하고 좋으면 목적지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 꾸만 둘 다 좋은 것을 찾으려고 하다가 결국은 넓은 길, 편한 길을 선택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국 목적지가 어떠한 지를 확인하지고 따지지도 않으려 하니 무서운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밤에 길을 가다가 보니까 한 사람이 어두운 곳에서 몸을 꾸푸리고 뭔 가 꾸물거리고 있었습니다. '여보시오, 게서 뭘하고 있소이까' 그러자 그 사람 대 답이 '여기서 돈을 잃어 버렸는데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자 물은 사람이 우스 게로 받아 넘깁니다. '여보시오, 그렇게 어두운 데 서 뭐가 보인단 말이요. 저 가 로등 밑에가서 찾으시오!' 이런 것을 옛 고어로 '각주구검'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건너다가 물건을 물 속에 빠뜨렸습니다. 그 사람은 빠뜨린 자리 를 표시하느라고 배 옆에다가 표시를 해 두었습니다. 지금 배가 가고 있다는 것은 생각 안 하고 백사장옆에다 갖다 대 놓고 그 옆을 찾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동원시키는 곳마다 애매함이 있습니다. 믿음 의 대상이 분명치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의 신앙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 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누가 더 길길이 뛰며 목말라 하느냐의 싸움이 되 어 버렸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목마르며, 사모하는지'가 선명치 않다는 것입니다 내 목적, 내 소원 성취에 그렇게 목말라 하고 열심이지, 언제 제대로 내가 성결케 되는 일로 목말라하고 사모해 본적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성결에 대해 신 앙이 동원되지 않으므로 거룩한 길을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에 미혹되는 길로 자기도 모르게 쫓아가게 되 는 것입니다. 롬12:1-2절에 이 부분에 대한 최종적인 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 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 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 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었인지를 분별하며 살도록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여러분에게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까 확신이 있습니까 그럼 그 다음에 우리 앞에 직면되는 것 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성결의 책임입니다. 즉 거룩에로의 기나긴 여 정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로 부 름받은 자로서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왜 이길이 필요한지 아십니까 신분 만이 하나님의 자녀이지 아직 수준은 그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수준 향상 과 자격에 걸맞는 자가 되기 위해 거쳐야 되는 훈련과 수련의 과정입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 치 못하기에 이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할 과정이 남아 있는 것입 니다. 이러한 과정을 걸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그 자체는 곧 하나 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시지 않고 우리 마음에 찾아오사 바로 이 일을 이루 시며 여러분의 전 생애를 통하여 이 싸움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서 얼마나 많은 갈등들이 있었는지를 살펴 보십시오. 말씀을 따라 사는 것과, 내가 세상에서 익숙했던 옛날의 방법대로 살고 싶은 것과의 갈등 이 신자들에게는 없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대로 승리한 적이 많지를 않습니다. 우리의 욕심을 따라 산 적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약속하시기를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하십니다. 주께서 의 도하신 거룩과 성결에의 완성을 위하여 여러분의 생애에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간섭 하시면서 여러분을 의의 길로 거룩과 성결의 길로 인도히시고자 강권하시는 손길을 체험하시게 되실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의 이 요구에 귀를 귀를 귀울이시고, 그 권 면 앞에 무릎을 꿇는 자가되겠다고 결심하셔야 됩니다. 이것이 늦으면 많이 돌아오 게 됩니다. 슬픔과 애통과 처절한 일을 당하고 돌이키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 이 이것을 말씀으로 권면할 때, 좋게 이야기할 때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칭찬을 받 으면서, 상급을 얻으면서 돌이켜셔야만 여러분들의 나날들이 행복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생각대로 하지 마시기 바랍 니다. 성경은 우리에 대하여 이렇게 끊임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 다'고 말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 니다. 성령의 전이요, 주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성도라고 합니다. 기어코 우리를 점도 없고, 흠도 없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드시고야 마시겠다는 하나님 의 의지와 뜻만큼 분명히 나타난 것도 성경에 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의 인생을 다시 한 번 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비쳐 보시고 고칠 것을 고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신의 성품과 하나님의 성품을 비교해 보 시고 다시 분발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끝까지 베푸시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외면치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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