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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올바른 물질관 (왕하 1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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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에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을 동안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

요아스 왕은 하나님의 사람인 제사장의 말에 순종을 잘하였다.

 4절에 요아스가 제사장들에게 이르되 무릇 여호와의 전에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은 곧 사람의 몸 값으로 드리는 은이나 자원하여 여호와의 전에 드리는 모 든 은을 제사장들이 각각 아는 자에게서 받아 들여서 전의 어느 곳이든지 퇴락한 것을 보거든 그것으로 수리하라 하였더니

백성들은 요아스의 명을 받들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헌금하기를 기뻐했다.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은 당시의 백성들이 물질에 관하여 올바른 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일 수록 물질에 대한 올바른 관을 가지고 살아야할 것을 보여 주는 중대한 교훈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명심을 해야할 것은 물질이 신앙 생활에 거침돌이 되지 않도록 하여야한다는 것이다.

 재물은 우리를 자칫 실패의 올무 가운데로 몰아 넣기가 쉽다.

 그래서 주님은 물질에 대하여 어떻게 처신해야할 것을 강조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는 삶을 살아야 하며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 곧 우리의 소유물, 우리가 받은 은사, 재능, 혹은 지식,을 세상을 위하여 쌓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에 관한 것을 세상 사람들은 말할 자격이 없다.

 하늘의 여광을 버리시고 인류 구원을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으신 주님께 서 하신 말씀이기에 이 말은 귀중한 것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실때에는 그렇게 해야할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 이다.

 그 이유가 한두가지가 아니라 참으로 여러가지이다.

그것도 논리 정연하게 또 세밀하게 일러 주시고 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대상은 세상의 불신자가 아니라 신실한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임을 알아야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세상의 문제를 교회 바깥 세상의 사람들의 관점에서 생각 해서는 안된다.

 또 재물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다.

재물이 악하다면 하늘에서도 악한 것은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들의 관심이 어디에 집중되 있는가를 알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 보자.

 1,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두지 말라.

 첫째로 주님게서 우리들이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땅에 두지 말라고 하시었다.

어째서인가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기 때문이다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쓸어 못쓰게 되며...라고 하신 말씀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씀이다.

 우리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세상의 모든 것에는 부패의 요소가 숨어 있다.

 또한 이런것들이 실제적인 만족을 주고 있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에는 항상 잘못된 것이 있다.

이것에는 항상 부족한 것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질만한 것은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또 다른 어떤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행복은 돈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마음 속엔 항상 실증을 내는 나쁜 요소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람들은 잠시는 즐기나 오래 지속하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우리들이 모이면 모일때마다 왜 항상 새로운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게되는가

젊은이들이 좋아 하는 것과 늙은이들이 좋아하는 대상이 다르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늙은이들이 싫어하고 늙은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젊은이들이 싫어한다.

 우리들은 가끔 세대차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이는 서로 서로 생각하는 것 즉 좋아하는 것이 다르다는 뜻이다.

 여기에 좀과 록의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세상의 온 갓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다 할지라도 이 좀과 록은 없이할 수 없다.

 벧후1:4절에 이로서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하려 하셨으니

이 강대상 위에 꽃이 있다.

누군가가 꺽꼬지를 한것이다.

 이 꽃이 아름답기에 누군가가 꺽은 것이다.

그러나 이 꽃이 여기에 오래 있지는 못한다.

어젠가는 버림을 받는다.

 이생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그렇고 그런 것들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있고 그 지나감의 세월이 흐르면 좋던것도 싫어지게 되 있다.

 아름다운 용모도 마찬가지다.

건강항 육체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재주도 마찬가지다.

 땅에는 좀이 들고 동록이 쓸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땅에서는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고 하셨 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것들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도적이 많고 많다.

세상에는 질병도 도사리고 있다.

세상에는 실패도 있다.

세상에는 전쟁도 있다.

세상에는 죽음도 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무었인가를 붙들고 있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럼 우리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마6:20절을 보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은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하시었다.

 이 말을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벧전1:4절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고 했다.

 바울은 고후4:18절에서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로다라고 했다.

 하늘의 것은 멸하지 않는다.

하늘에는 좀이나 도적이 없다.

하는늘에는 하나님께서 불침번이시기 때문이다.

 영적인 보물들은 상하지 않는다.

난곡불락의 장소에 보관되 있기 때문이다.

 롬8:38,39절에서 바울은 내가 확신 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고 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오염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불완전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간 신문의 내용을 보라! 매일 발생하는 사건들을 보라!

그런것들을 늘 보면서도 어째서 우리들은 주님의 명령에 귀를 기우리려 하지 않는가

이런것들을 보면서도 우리들은 왜 하늘에다 보물을 쌓지 못하는 것일까

2,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주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정리해 보자.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계속해서 마6:24절에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라고 하셨다.

 여기에 중요한 단어는 섬긴다라는 단어이다.

 섬긴다라는 단어에 주의하시라.

섬긴다는 뜻이 무었을 말하고 있는가

섬긴다는 것은 누군가의 지배를 받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를 지배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물질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딤후4:10절에 이런 기사가 있다.

데마는 나를 버렸다고 바울이 기록했다.

 데마가 왜 바울을 왜 버렸는가 데마는 바울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기 대문이다.

 세상은 우리들의 마음을 강탈해 간다.

마음이 빼았기게되면 세상은 다음으로 우리들을 지배하게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했을 때 우리들이 무었을 섬긴다는 말인가

이는 우리들이 어느 한가지는 섬기기는 섬기는데 그 섬김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뭔가를 섬길 때 그 섬김은 우리들의 마음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들의 행동이 우리들의 마음의 결과임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우리들의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들의 마음이 있다는 말은 곧 우리들의 지배의 대상이 누군가를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음이다.

 우리들의 보물이 있는 곳은 곧 우리들의 마음이 결정을 하는 것이 된다.

 오늘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들의 관점이 곧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하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혹 저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세속의 일들은 우리들을 전체적으로 지배를 할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게서도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같으다.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막12:30)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양자 택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택일이지 타협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마7:20-24절에 아주 재미 있는 이야기를 주님께서 하시었다.

이는 마지막 끝날에 주님 앞에 우리들 모두가 섰을 때의 장면이다.

 그러므로 그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주의 미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니

((( 위 구절 설명)))

여러분들은 무었을 섬기고 있는가 하나님이냐 제물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재물을 섬기고 있다면 이는 하나님께 큰 모욕거리가 된다.

 어떤 설교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참으로 인상적인 이야기였다.

 어떤 날 한 농부가 들에 나갔다가 기쁨에 넘쳐서 집으로 들어 왔다.

왜냐하면 그 날에 암소가 두마리의 송아지를 낳았기 때문이다.

한 놈은 붉은 색갈이고 다른 한 놈은 흰색의 송아지였다.

 이 농부는 즐거움에 넘쳐서 아내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여보 나는 갑자기 이 두마리의 송아지 중에 한 마리를 주님께 받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소. 우리는 이 두놈을 잘 길러서 때가 되면 그 중 한 마리를 팔아서 그 수익금을 저축하고 또 한 마리는 팔아서 주의 사업을 위해 바칩시다.

 그의 아내가 물었다.

두마리 중에 어느 놈을 주님께 바치렵니까 하고 물었다.

 남편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그 문제로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그 놈들을 꼭 같이 취급했다가 때가 오면 내가 말한대로 합시다라고 했다.

 그 후 몇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들에 나갔던 농부가 힘이 쭉 빠져서 집으로 돌아 왔다.

 아내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 농부는 힘 없이 대답을 했다.

나쁜 소식이야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소 라고 말했다.

 그 말에 아내가 그러나 당신은 어느 것이 주님의 것이라고 결정하지는 않았잖아요 라고 했더니

남편이 나는 항상 흰 놈으로 정하고 있었는데 글세 그 놈이 오늘 죽었단 말이요 라고 대답을 해다.

 언제나 죽은 것이 주님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주머니 사정이 어려울 때 우리들이 절약을 해야할 첫째 목표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을 하시는지

우리들의 주머니 사정이 좋을 때 제일 먼저 세워야할 목표는 무었이어야 하는지

두마리의 송아지가 있을 때 주님의 것으로 결정하는 시기를 언제라고 생 각을 하시는지

주님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주여 주여 라고 부르는 단순한 사실 그 자체만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적 요구를 인정하며 우리 자신을 기쁘게 그리고 서슴치 않고 굴복시킨다는 증거는 아닌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자신을 재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지실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물질관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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