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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사느냐 (마 0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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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삶의 이유를 물으면서 사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즉, 인간만이 삶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문제 삼고, 그에 대해 고민도 하고, 기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만 진정한 환희가 있고 또한 절망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대학생으로서 누구보다도 이런 문제, 즉 내 자신이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항상 심각하게 묻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떤 해답을 발견하였습니까

중국에 유명한 고승 중에 조주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에게 어느 젊은이가 왜 달마 대사는 서쪽에서 왔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조주는 前庭栢樹者-뜰 앞에 서 있는 잣나무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仙問答입니다. 왜 달마 대사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왔는가 물었는데, `뜰 앞에 서 있는 잣나무라'고 했으니 분명 동문서답입니다. 뜰 앞에 서 있는 잣나무는 달마 대사가 심은 것이 아닙니다. 누구도 그 잣나무가 언제부터 그곳에 심겨져 있었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해서 거기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달마 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왔는가 하는 물음에 뜰 앞에 잣나무라고 대답했으니 참으로 우스운 대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말 장난같은 대답이 아니고 거기엔 깊은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뜰 앞의 잣나무는 거기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왜, 거기 있는가 언제부터 있는가 누가 심었는가 하는 것은 잣나무에게는 하등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무심코 서 있을 뿐이고 무의로 있을 뿐이다 하는 뜻으로 달마는 인도에서 왔기에 온 것 뿐이다. `왜' 라고 굳이 물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대답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왜 내가 인간이 되었으며, 또 남자가 되었으며, 한국인이며, 하필이면 이때에 태어 났으며 하는 수많은 `왜'를 묻고 또 고민하기도 하면서 살 것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는 왜 나는 새인가 왜 나는 노랑새인가 묻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예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들에 핀 백합화는 왜 내가 하필이면 장미가 아니고 백합화인가를 묻지 않습니다. 어째서 이런 산골짜기, 사람들에게 잘 띄지 않는 이런 곳에 있는가 백합화는 묻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그 백합화는 아름다운 것이고 향기로운 것입니다.
현대인은 너무 많이 '왜'를 묻습니다. 이유를 묻습니다. 현대인들 특히 요즈음 대학생들은 너무 이론적이고 사변적입니다. 너무도 까다롭습니다. 그 결과 번민이 끊일 사이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남과 다투고 갈등이 잇고 그러면서 비참해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인간들은 불행해지는 데 천재입니다. 아무런 불행이 없는데 언제나 무수한 불행을 만들어 내면서 스스로 불행해지는 데 천재적입니다. 나는 왜 여자가 되었고, 내 코는 왜 이렇게 납작하고, 내 눈은 왜 쌍꺼풀이 아니고, 머리털은 왜 이런 색깔이고, '왜 왜 왜'를 물으면서 기뻐하면서 살아야 할 시간을 다 놓치고 있습니다.
내가 근자에 제일 많이 하는 말이 현대인들은 바쁠 뿐이지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계획에 있어서는 사는 것과 바쁜 것이 100% 일치합니다. 그러나 바쁘다는 것이 곧 산다는 것과 일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독특한 존재입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일터에 나가 밤 12시에 돌아 오는 매일매일의 바쁜 삶을 살아 가는 어떤 남자가 잠자리에 들 때 천정을 보면서 때때로 하는 말이 내가 이게 사는 거야 하는 탄식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12시에 돌아 오는 바쁜 생활이지만 그에게는 바쁜 것이 곧 삶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가슴 밑바닥에서 느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왜'라고 하는 의문을 숱하게 가지고 있지만 정말로 살고 있는 겁니까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William Breik는 순수의 전조라고 하는 시에서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풀 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잡고
한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
고 노래했습니다.

내 존재, 내 삶, 내 인생은 한 마디로 신비입니다. 여러분이 대학 교육쯤 받았다고 해서 `왜' 라는 질문에 `왜 존재하며, 왜 한국인이며, 왜 이때에 태어 났는가'를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여러분이 삶은 신비입니다. 순간을 통해서 영원을 볼 수 있는 깨어 있는 영혼을 가진 자에겐, 하나의 모래알 속에서 우주를 파악할 수 있는 열린 눈을 가진 자에게는 인생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요, 신비요, 대사건입니다.
피상적인 인생과 세계만을 보며 거기에 매달리며, 아까 읽은 성경 말씀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국회위원이 될까, 사장이 될까 하는 그런 것들에 매달려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절망하는 그런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피상적인 인생과 세계에 미혹되거나 구속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분명코 우리에게 단 일회의 인생은 신비요, 대기적입니다.

여러분이 공중의 작은 새를 보면서 존재의 신비로운 세계를 보기 바쁘고, 뜨락의 은행나무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생명의 신비로운 세계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래알을 통해서 초생존의 세계를 느끼길 바라고, 풀끝에 맺힌 이슬 방울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비로운 세계를 감촉하는 그런 영혼의 소유자가 되길 바랍니다. 보통의 인간에게 왜 내가 존재하며, 왜 내가 인간이며, 왜 내가 이 시대에 사는가 하는 것을 물어 봤자입니다. 오직 한 분, 독특한 그 분을 통해서 여러분과 내가 왜 인간이며, 왜 이 시대에 있으며, 왜 존재하는가를 알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큰 행복입니다.

나는 성서 말씀 중에 요한복음 4:34을 퍽 좋아합니다. 요한복음 4장은 예수님이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성을 지나시다가 물 한 모금 얻어 해갈하려고 하는데 여섯 남자에게 짓밟힌 가련한 한 여인이 왔습니다. 그때 그 여인에게 물 한 모금 요구했는데 이 방정맞은 여자는 말만 많지 도무지 물 한 모금 떠 드리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여인의 과거를 알고 있는 까닭에 그 여인이 가지고 있는 헛된 생각을 한 꺼풀씩 벗겨 버립니다. 왜, 나는 이런 여자인가 왜, 나는 여섯 남자에게 짓밟혔으며, 왜 나는 무식하고 천한가 허무하게 살던 그 여인이 한 꺼풀씩 허위와 비참을 벗으며 새로운 영혼의 눈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Breik의 시처럼 한 알의 모래를 통해서 전세계를 보고, 주의 말씀을 통해서 우주의 인생의 신비를 느끼게 됩니다. 그 여인이 물동이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수가 성으로 뛰어들어 가는 그 뒷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주님은 바라 보고 계십니다.
마침 식사 때가 되어 제자들은 수가 성에 가서 먹을 빵을 구해 가지고 왔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드시라고 빵을 내어 드리자 내가 먹는 것은 따로 잇다. 내 양식은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유일하게 여러분과 내가 이 세상에 왜 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셔서 이 시간이 있는 것이고, 남자가 된 것이고, 목사, 교수가 된 것이며, 대학생이 된 것이라는 말씁입니다.

여러분의 양식, 기쁨, 영광, 자랑, 가치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완성케 하는 데 있습니다. 내 양식은, 내 기쁨은, 내 자랑은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이라고 하는 자는 차원 낮은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약식, 기쁨, 자랑이 무엇인가로 그의 사람됨이 결정됩니다. 장난감, 인형을 갖는 기쁨, 자랑, 가치로 삼은 이는 어린이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기쁨, 자랑을 양식으로 삼는 자, 그런 인간이 위대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주님은 가르쳐 주십니다.

헛되이 `왜, 왜'를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은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대사건입니다. 그 신비를 통해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 여러분은 지금 60, 70년 시간 내에 존재하지만 영원의 때를 사는 놀라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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