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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지막 계시 마지막 책임 (계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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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 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반드시 속히 될 일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요한계 시록의 접근 방법이 결정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대표적 해석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각 방법을 지지하는 학파들을 분류해 보겠습니다. 첫째/과거적 해석파 이들은 요한계시록을 과거에 일어난 사건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입니다 . 이들은 반드시 속히 될 일을 사도 요한이 말씀을 받던 당 시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네로 황제나 도미티안 황제나 사도 시대 안에 다 이루어질 사건들을 기록한 책이라고 가 정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요한계시록은 과 거에 이미 다 끝나 버린 사건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견해를 무 시할 수 없는 것은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는 구절 때문입니다 .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요한계시록의 사건들을 금방 일어날 것 으로 기대했고, 하나님은 사실상 일련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그들의 기대를 이미 성취한 것이라고 과거적 해석파에서는 말합니 다.

그러나 1장 1절의 속히라는 단어를 꼭 시간적인 의미로 이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이 속히라는 단어가 시간을 가리키 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사건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쓰인 단어 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서 16장 20절을 예로 들어 봅시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 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여기에서 속히라는 단어를 반드시라고 바꿀 수도 있지 않겠 습니까? 사단을 일 분 후에 혹은 며칠 후에 망하게 하겠다는 의 미보다는 반드시 망한다는 사실의 분명함을 강조하기 위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 음의 내용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人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7, 8). 여기에서도 속히라는 단어를 반드시라는 단어로 바꿀 수 있 습니다. 그러므로 속히라는 단어를 꼭 시간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둘째/현재적 해석파 어떤 사람들은 이들을 「역사적인 해석파」라고도 부릅니다. 이들은 요한계시록이 사도 시대부터 시작해서 예수님 오실 때까지의 역사 속의 사건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다 보여 주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 이런 입장들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어나는 사건들을 항상 요한계시록에 접목시키려는 유혹을 받아 왔습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학파보다도 요한계시록에 대한 오류를 많이 범해 왔던 학파가 바로 이들입니다.

셋째/미래적 해석파 이들은 예언적 해석파라고도 불리는데, 요한계시록을 예수님 재림하 시기 직전의 상황들을 주로 기록한 책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이 들의 관점에서 보면, 요한계시록의 대부분의 사건들은 미래에 일어 나야 할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오늘날 지구상에서 전개되고 있는 사건에 대해서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이들은 오늘 날의 중동 사태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사담 후세인은 어떤 관련 이 있을까, 사담 후세인이 이스라엘을 치면 요한계시록의 문제가 어떻게 풀려 나갈 것인가, 특별히 EEC(유럽 경제 공동체)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어떤 부분을 해석하든지, 이 말씀을 처음에 받았 을 때 어떤 심정으로 받았을까? 또 말씀의 기록자들은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기를 바라고 이 말씀을 그들에게 주 었을까? 하는 식으로 기자(記者)의 의도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 합니다. 그 당시 도미티안 황제에게 핍박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사 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쓰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앞으로 1900년 후에 구라파에 경제 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도미티안 황제에게 핍박을 받고 있던 사람들에게 1 900년 후의 구라파 경제 공동체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것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현재적 감각을 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1세기의 사람들을 위해 씌어진 것 이 아니고 1900년 후의 우리만을 위해서 씌어진 것이라면, 문 제가 있지 않습니까?

넷째/영적 해석파 이들의 입장은 요한계시록이 어느 시대에 일어날 특별한 사건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요한계 시록은 어느 시대나 모든 성도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원리만을 다루고 있는 책이라는 주장입니다. 역사는 언제나 선과 악의 전쟁터인데, 이런 전쟁터 속에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백성 들이 어떻게 주(主)의 말씀을 의지하고 승리할 것인가라는 보편적 인 신앙의 원리만을 기록한 책이라고 합니다. 특정한 사건이나 그 리스도의 재림을 겨냥하고 씌어진 책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들은 성경이 문자 그대로 전달하는 교훈을 받기보다 성경을 지나 치게 영해(靈解)함으로써 성경을 곡해하는 오류를 많이 범했습니다 . 또 이들은 요한계시록이 갖고 있는 예언적 성격을 완전히 무시 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지금까지 열거한 네 방법이 모두 그 나름의 약점을 갖고 있다면, 도대체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해석하라는 것입니까? 저는 저의 해 석 방법이 반드시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해석에는 언제나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우리의 선배들이 요한계시록에 접근했던 여러 태도들을 비교하면서 개인적으로 요한계 시록에 대한 해석 방법을 몇 가지 정립해 보았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사도 요한을 통해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 하실 때에 무슨 의도를 가지고서 전달하게 하셨을까를 염두에 두고 서 1세기의 정황에 충실한 역사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요한계시록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도록 준비 시키려고 기록한 것이라는 점을 절대로 간과하지 않는 상태에서 요 한계시록을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미래 적 학파가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부분을 취하려고 합니다.

셋째, 요한계시록은 어느 시대에나 모든 성도들이 받을 수 있고 적용할 수 있는 원리를 동시에 강조하려고 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앞에서 언급한 접근 방법들 중 세 가지 방법의 장점을 종합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 해석 방법은 절충식입니다. 이 방법 이 어떤 입장도 깨끗하게 만족시켜 주지 못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 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과거에 요한계시록을 접근했던 사람들의 해석 방법이 전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는 두번째 해석 방법인 현재적 해석파에서는 별로 취할 것이 없다 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미래적 해석학파에서 강조했던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심장이 뛰는 기다림과 과거적 해석학파가 강조했던 1 세기의 시대적인 정황은 충분히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 니다. 그리고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나 20세기의 우리들을 향 해서나 동시에 성경이 말씀하려고 했던 보편적인 원리에도 여전히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해석의 원리들을 전제하면서, 저는 요한계시록이 강조하려는 초점은 결국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역사의 진정한 승 리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이고, 또 하나는 승리자이신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 말미암아 꼭 같은 승리에 동참해야 할 교회 의 승리에 대한 강조입니다. 요한계시록을 공부해 가는 가운데 사 도 요한이 이 두 가지를 얼마나 뛰는 심장으로 강조하고 있는가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당시 교회는 말할 수 없는 박해와 시련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끝장난 것 같았습니다. 이런 상황에 서 사도 요한은 패배하는 것 같으나 마지막에는 승리하고야 말 성 도들의 빛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비록 성도들 이 핍박자들이나 박해자들 때문에 일방적으로 쫓겨다니는 것이 그 당시의 현실이었으나, 사도 요한은 성도들이야말로 승리자이신 그리 스도와 더불어 종내 왕 노릇하고 역사를 다스려야 할 사람들이며 지금도 주님과 함께 그 다스림의 세계 속에 동참하고 있는 승리자 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獅 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印)을 떼시리라 하더라(계 5:5).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 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계 6:2).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 상 나라가 우리 주(主)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 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계 11:15).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 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계 15:2).

요한계시록에서 계속적으로 강조하는 이기고라는 단어를 놓쳐 버 리면, 그것은 계시록의 심장을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요 한계시록 2장과 3장을 보면, 일곱 교회를 향하여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절대로 빠지지 않고 나오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 그것은 이기는 그에게는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역사의 암흑과 수많은 시련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초대 그리스 도인들에게 승리를 촉구하시던 그 주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으 로 죽음을 정복하신 승리자이심을 보이시고 자신이 아직도 역사를 다스리는 주님이신 것을 보이셨던 주님, 바로 그분으로 말미암아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박해를 이기고 승리했던 것처럼, 역사 의 흑암이 더욱 짙어오는 이 여명 속에서 지금 이 순간도 여전히 승리해야 할 우리들의 삶을 향해서 이 요한계시록이 주는 메시지 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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