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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한이 말하는 교제 (요일 03: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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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물어왔습니다. “당신들을 보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신앙생활을 요구해서 인간들끼리는 서로 교제할 시간도 없는 것 같은데 신앙을 가지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말할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형제 자매간에 교제가 진실된 사랑으로 결합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의 신앙의 현실이 올바른 그리스도인들의 형제애를 나누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면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고집하는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신앙을 가졌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지 성경에 나타난 말씀을 근거로 우리의 신앙적인 생활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바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의 의미는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물건들을 ‘결합하다’ 혹은 ‘합체하다’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인 것입니다. 다시말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함께 활동하는 상황을 하바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제라는 말은 서로가 연합되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성경은 성도들간에 이런 의미의 교제를 가르쳤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요한 일서에 나타난 교제의 특징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형제 자매간의 교제가 과연 성경적으로 누려지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과 세상의 관계(요일3:13)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언급하기 앞서 세상과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너희들끼리 사랑하지 않으면 가장 이 세상에서 외로운 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 사도는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다시말해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서로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권면을 다른 말로 바꾸어 본다면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사랑하고 환대한다면 이상히 여겨라’ 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상이 여러분을 선호합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세상과 교제하지 못하는 어설픈 모습 때문에 미워하십니까 만약 이 세상이 요구하는 불신앙적인 가치관 때문에 세상과 교제를 나누지 못해 미움을 받는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위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에 대해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이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불편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경험을 가지고 있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다는 이유로 신앙인의 자부심과 기쁨을 잃어버리고 짐스럽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생활하면서 아무런 갈등이나 불편함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신자들과 적당히 타협해서 어울리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나를 사랑하고 내편이 되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같는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불행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요

2. 형제와 형제의 관계(요일3:14-24)
성경은 결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외롭거나 불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서로 믿는 형제와 자매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떠한 상황에서 형제와 형제가 미워해서는 않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조금 더 음미해 본다면 우리는 서로를 미워할 수 있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도 결코 형제를 미워해서는 않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 성경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영생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에 형제에 대한 미움이 있는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진정으로 내가 죄인인 것과 그 죄를 아무조건 없이 십자가의 은혜로 대속의 사랑을 경험했다면 결코 그 누구도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가졌는데 어떻게 형제를 미워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복음을 가진 자에게는 그러한 삶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요한 사도는 16절을 통해 분명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성경은 형제간의 생활에 적극적인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17절에 보면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아마도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보다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이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끼리 서로 돕지 않고 사는 생활의 냉정함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돕고 사는 것이 옳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돕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도와 줄 마음을 스스로 막기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 얼마전에 제가 사랑하는 친구 목사님이 저를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몇 년전에 장애자들을 위한 회관을 짓는데 돈이 부족하다고 이사장이 대출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은행에서 자신의 명의로 이천만원을 대출해서 주었는데 그 이사장이 개인적인 어려움으로 그 회관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게 되고 자신의 돈을 갚지 못하게 되서 은행빚을 자신이 갚아야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교회건물과 토지가 경매에 붙여졌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브리태니커 사전을 팔아서 그 이익금으로 은행빚을 갚겠다고 저를 찾아 왔던 것입니다. 시가 백칩십만원이나 되는 것을 말입니다. 순간 내 마음은 이 친구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면 도와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적은 생활비에서 이 경제적인 짐을 진다는 것이 결코 기분좋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 돕고자 하는 마음을 내가 누리고 싶은 현실이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주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가 기억났습니다. 십자가도 주님은 져 주셨는데 나는 겨우 경제적인 이기심 때문에 친구의 도움을 거절한다는 것이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기분좋게 그 친구의 부탁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친구의 우정을 확인하고 위로받고 돌아갔습니다. 형제가 형제를 돕지 않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외롭고 비참할까요 가끔 제가 목사라는 이유로 여러 곳에서 경제적으로 도와 달라고 요청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도울 수 없는 현실 때문에 마음 아파 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좀 더 풍성함을 주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 봤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형제의 굶주림을 외면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는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교회를 향해 말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교회는 이렇게 경험되는 사랑이 있습니까 서로의 삶을 나누는 교제가 있습니까 형제의 어려움이 내게 아픔이 되고 형제가 어려울 때 넘어가는 음식이 마음 아파 그들의 생활을 생각해 보고 돕고자 하는 사랑이 우리에게는 있습니까 형제의 사랑이 경험되는 것은 똑같은 경제적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다른 조건을 가지고 있을 때 조금 더 있는 자가 조금 더 부족한 자의 삶을 돌아 보는데서 사랑이 경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학생시절에 교회에서 이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교회 학생회에서 임원을 맡고 교회 일을 할 때 였습니다. 야유회를 가기로 결정했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회비제로 공평하게 모으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모두가 좋다고 결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 결정에 책임질 경제적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그 야유회에는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친구들은 요새말로 썰렁한 말을 한다고 저의 반항에 핀잔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미안함과 억울함에 그 자리를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돈을 많이 벌어서 교회에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업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세월이 지나서 지금은 목사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남을 경제적으로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사랑은 말로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에 책임을 질 때 경험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형제애를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돌아볼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충분할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사랑이 경험되는 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초연한 것처럼 살려고 몸부림 칩니다. 그래서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마음 아파하면 마치 신앙이 부족해서 그런 것처럼 유치하게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비성경적인 가치관인가에 대해 우리는 새로운 가치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성경은 물질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진정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여러분의 물질을 아낌없이 나누려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 경험되는 수단은 현실적인 필요라는 것을 우리는 부인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진정으로 사랑이 경험되는 초대교회처럼 경험되기 원한다면 피상적이고 개념적인 사랑의 교제에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 속에서 우리는 서로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시작하지 않으면 우리들의 교회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을 합리화 시키고 있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이제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자신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 가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을 내립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하나님은 형제의 사랑이 경험되는 시작을 경제적인 돌봄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진정 여러분 모두가 주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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