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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정한 삶의 보화 (마 06: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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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안에서 남을 형제처럼 소중히 하려고 할 때에 우리들은 인생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바라고 사회도 그것을 수호해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면 돈이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을 위해 힘쓰는데도 돈을 주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행복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건강하지 않으면 인간은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병을 최대의 불행으로 생각해서 그것을 고치는데 전심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학문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의 행복은 그것 없이는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겠지요. 사회적 지위를 중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 오직 그 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어 주는 것만이 아님은 누구든지 이론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모는 어린아이가 아무리 울고 떼를 쓰더라도 야단을 치지 않으면 안될 때가 있습니다. 아이의 감정을 거스르더라도 그 손에서 과자를 빼앗지 않으면 안될 때가 있습니다. 과자만 먹고 있으면 영양실조가 될 것을 부모는 알고 있으므로 아이가 울고불고해도 그것을 빼앗아버리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소중히 한다는 것이 상대방의 바라는 대로 맡겨둔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그것을 조금씩 찾아보겠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가리키면서 말씀하신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일하지 않고 빈둥빈둥 놀아도 좋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면 하느님이 다 먹여 살리시겠다는 이야기인가요 잘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인간에게는 의식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을 구해서 소중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필요한 음식물, 의복, 주거 같은 것은 조금씩 해결되는 것이며, 인간은 의식주만을 목적으로 하는 그따위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의식주는 살기 위해 절대 불가결한 조건입니다만, 아무리 필요한 수단이라도 그것을 목적으로 삼을 때에는 큰 잘못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면 현대사회에 있어서 보통으로는 돈이 우리들의 경제적 보장이 됩니다만, 그것도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서 인간은 보다 큰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자기가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에 마음이 쏠리는 것이므로 그것이 무엇이냐가 큰 문제입니다. 그리스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당신들은 무엇을 보화로 여기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와서 공해추방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물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게 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게 되니까 하는 수 없이 관심을 가질 수 밖에요. 그러나 만약에 건강과 생명만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더욱 중대한 공해를 유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신뢰, 자랑, 정의, 평화, 자유 또한 인간만이 갖고 있는 것을 소중히 하고 그것 때문에 건강, 생명, 생활이 중요하다는 가치 질서가 없다면 진정한 사회는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 정의를 구하시오.라고 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것을 당신이 보화로 여길 때 당신의 마음도 거기 있다.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마태 7:7-8)는 가르침에는 무엇을 찾느냐가 문제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이익이 되는 것만을 구할 때에 하느님은 모든 것을 주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우선 구할 것을 구하고 보다 소중히 할 때에 하느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완전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이만하면 되겠지 하고 안주해 버리기도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신랄하게 비판을 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장하기를 중단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에게 친절히 하고 악의를 가진 사람에게 그만한 대접을 하는 것이 세상 사람의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유대인에게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또는 이웃을 사랑하고 적을 미워하라고하는 기준이 하느님의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수의 정신을 선동하는 규정이 아닙니다. 한 쪽 눈에 해를 입었으면 상대방의 한 쪽 눈에만 요구할 권리가 있고 한 쪽 눈을 얻어맞고서 머리를 때려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빨 한개를 뽑혔는데 이빨 전부를 뽑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상대편으로 본다면 하나의 손해를 끼쳤을 때에 그와 똑 같은 보상을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완고함 때문에 하느님의 양보로써 허용된 규정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러나 내가 말하거니와 악인에게 거역하지 마시오. 남이 당신의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내주시오. 남이 당신을 고소하여 겉옷을 달라고 하거든 속옷까지 벗어주시오. 하고 가르치십니다. 글자 그대로 하라는 뜻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우리는 잘 포착해야 되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오른뺨을 때렸을 때에 상대편의 오른뺨을 되받아 칠 수도 있으나 그렇게 하지 말고 또 다른 쪽의 뺨을 내밀어 주는 태도, 한 쪽 눈을 못쓰게 만들었을 때에 또 한 쪽의 눈을 내줄 만한 기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즉, 상대방이 나쁜 일을 해서 자기에게 손해를 끼쳤을 때에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 대하여 복수하지 말고, 악에 대해서도 선으로써 갚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들은 그 정도까지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둬서 옳겠는가 하고 걱정을 합니다. 상대방은 점점 더 기승(氣勝)을 부리며 나쁜 인간이 되고 말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당신들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시오. 이것은 싫은 사람을 좋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싫은 사람에 대해서도 악으로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적으로부터 오른뺨을 맞았을 때에 글자 그대로 왼뺨을 내밀라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모욕적인 의미에서 그러한 행위를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 싫지만 악을, 불행을 상대방에게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한걸음 전진한 타인과의 관계, 그 사람의 진정한 성장을 위한 관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흥분해서 남의 욕을 했을 때 반드시 그 사람을 마음으로부터 미워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 감격해서 지나치게 남을 칭찬할 때에도 반드시 그 사람을 존경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미워한다는 것은 남을 악인으로 판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남을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연대성을 끊어버리는 판정은 있을 수 없습니다.(마태 5:38-44)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이 얼마나 나쁜 일인가, 타인의 인격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틀린 일인가를 그리스도는 가르쳐 줍니다.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옛사람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마태 5:21-22)
우리들이 범하기 쉬운 것은, 싫어하는 사람의 불행을 은근히 바라는 것입니다. 실패하면 잘됐다고 생각하거나 박수갈채를 하고 싶거나 하루종일 기분좋아서 못 견디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불행을 당하게 되면 함께 마음의 아픔을 느끼고 진짜로 슬퍼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일 경우에는 고소하게 여기거나, 혹은 아직도 부족하다는 등 그 사람을 아주 낮게 평가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불행을 바라서는 안될 것입니다. 역시 그 사람의 행복을 생각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실지로 무미건조한 것입니다. 모래를 씹는 맛일지도 모릅니다. 상대방을 가치 이하로 보는 것처럼 나쁜 일은 없습니다. 우리들의 감정이나 인상으로써 남을 판정해 버리는 것은 대단히 중대한 문제이므로 그리스도는 살인죄와 비교해서 엄중하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또 남을 함부로 판단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못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의 티를 빼내어 주겠다고 하느냐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지 않겠느냐(마태 7:1-5)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만약에 다른 사람을 지위 신분만으로 평가한다면 하느님도 당신을 지위 신분만의 인간으로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능력이나 재주 재산 학력 등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한다면, 하느님도 또한 그 사람을 그와 같은 척도로써 평가하실 것입니다. 인간의 진가는 인간 누구에게도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은 움직이고 있는 것, 그리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과대평가할 망정 과소평가를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로는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또 대단히 위험한 것은 그 시대, 그 나라, 그 지방에 따라서 상식화된 인간평가의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자신을 그 기준으로 저울질하고 타인도 그 기준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 '상식'이 인간의 가장 깊은 존재의 의의를 포착(捕捉)하고 있으면 좋겠으나, 사람의 부분적 평가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일종의 불구자적 인간상밖에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자세가 타인과의 관계에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타인에 대한 냉정한 마음은 하느님이 좋아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님은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고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 5:23-24)
기도로써 하느님과의 관계를 보다 더 잘 갖기 위해서는 먼저 형제와의 사이에서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를 중요시하는 사람에게도 하나의 커다란 경고입니다. 사람을 소흘히 하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좋게 보이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길을 설교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먼저 사람에 대한 자세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자세는 근본적으로 타인을 얼마만큼 중요시하는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고, 하느님에 대한 기도가 깊어지기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자세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을 소중히 한다, 더구나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까지도 소중히 한다는 마음의 근거는 무엇이겠습니까 생물학적으로 서로가 인류라는 것이 그 최종적 근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다 형제라고 세계 사람들이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감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수준에서는 이웃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정도로 서로가 소중한 형제라는 근거는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거기에 하느님이 오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4-45)
하느님은 우리들 인간의 공통의 아버지인 것입니다. 모두가 예외없이 아버지 하느님께 사랑 받고 있는 아들이고, 서로가 같은 아버지를 모신 아들들이기 때문에 형제자매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능력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오래 사는 사람이나 금방 죽을 것 같은 사람이나 좋아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이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 있어서 하느님은 아버지이십니다. 여기 있는 형제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웃에 있는 사람도 역시 형제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저 사람이 싫지만 저 사람도 나의 형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들을 향해서 너는 저 사람이 제일 싫어서 세상에 저 사람만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저 사람도 나의 아들이니, 소중히 해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근거가 있어서 비로소 우리들은 정말로 형제인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던져도 아깝지 않다는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타인없이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 군중의 일원으로서 추상화시키지 말고 개인으로서 소중히 해야만 하는 우리들은 이와 같이 형제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기자신을 바라볼 때, 자기자신을 새롭게 발견할 때, 두 가지 모습을 찾아냅니다. 하나는 감성(感性)에 충실하고 싶어하는 자신입니다. 그러나 느낌으로써 사람이나 사물을 판단하는 것처럼 무책임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는 서로를 형제로서 소중히 하고 사회를 좋게 하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나오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잠재의식 속에 있는 '나'입니다. 그것은 인생관에서나 사는 자세에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만, 책임을 지울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모습은 나의 일부이지 본래의 나의 전부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냉정히 판단해서 결정한 행위가 책임질 수 있는 나의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 분야에서만 나는 자기를 발견하고 성장하고 또 타인과 관계하는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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