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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날의 괴로움 (마 06: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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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구백 구십 년 첫 주일입니다. 새해가 되면 늘 그러했듯이 우리는 이번에도 이 한 해를 점쳐보고 싶은 마음을 갖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세상이 어떻게 바뀌고 어떻게 달라질까 내 주변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를 대해줄까 나는 이 한 해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적이 궁금하고 염려됩니다. 이런 생각 저런 궁리를 다 해보지만 결국은 맴돌다가 현실로 돌아옵니다.
인간은 역시 당면한 현재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나갔습니다. 미래에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기다려야 합니다. 실재하는 것은 순간순간 지나가 버리는 '현재'일 뿐입니다. 이 찰나적인 현재마저 두 강도에게 유린당하고 있습니다.
두 강도 하나는 '과거'라는 강도입니다. 어제에 대한 후회, 가책, 그리고 지난날에 뿌려놓은 씨앗을 오늘에 거두는 책임 같은 것으로 해서 소중한 현재를 빼앗기고 있으니 그 과거가 강도입니다. 또 하나의 강도는 '미래'입니다. 짐작도 못하는 앞의 일을 염려하느라고 현재라는 짧은 순간을 기쁨으로 누리지 못하고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많은 재산과 좋은 음식을 가졌으면서도 한 접시 음식을 비우지 못하는 사람을 봅니다. 소화기관이 좋지 않아서입니다. 돈 많은 사람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한 끼에 먹는 것은 한 그릇입니다. 옷 입는 것도 그렇습니다. 옷이 많은 사람도 있고 적은 사람도 있지마는 그 몸에 입는 것은 한 벌이지 여러 벌이 아닙니다.
마닐라에 갔다가 독재자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가 거처하던 방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옷이 2천 벌이요 구두가 칠백 켤레나 됩디다. 입어보지도 못한 옷이 많습디다. 하루에 한 벌씩만 입는다 해도 2천 벌이면 대체 몇 년 걸려야 다 입어봅니까
여러분, 사람은 결국 현재에 사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 같으나 한 시간이요, 많은 것 같으나 적은 것이요, 큰 것 같으나 아무 것도 아닌 한순간 한순간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끼의 식사를 앞에 놓고 감사하며 즐길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제를 생각하며 괴로워하거나 내일을 지레 걱정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삶의 소중한 지혜를 하나 가르쳐주십니다.
하루씩, 한 가지씩 해결하라,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이 괴로움이라는 말 '카키아'는 악하다는 말로도 풀이됩니다. 고통과 괴로움과 수고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하루로 보셨습니다. 잠깐 사이에 지나가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십자가를 지게 되는데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성만찬을 드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찬송하며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지금은 만찬 시간이요, 지금은 찬송 시간이요, 지금은 기도 시간이니까요.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엄청난 십자가 사건이 눈앞에 있는데도 잠깐 지나가면 될 일로 보셨습니다.
잠깐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잠깐 후에 부활하실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한 날의 괴로움으로 보신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읽었던 순교사(殉敎史)의 한 장면이 늘 마음에 떠오르곤 합니다. 로마사람들이 원형극장에 기독교인들을 잡아다놓고 굶주린 사자들을 풀어놓습니다. 한 여인이 어린 자식을 품에 안고 있었습니다. 마구 달려나오는 사자를 보자 어린아이는 무서워 웁니다. 어머니는 이 아이에게 말합니다. 얘야, 잠깐만 참아라. 곧 밝아질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고통이 당장에는 굉장히 큰 것처럼 보이지만, 잠깐만 참으면 지나가는 것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는 주님을 만나는, 참으로 아름다운 은혜의 세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일생이라는 것, 별것 아닙니다. 잠깐사이에 순간처럼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날의 괴로움은 한 날에 족한 것입니다. 대학입시에 두 번 낙방하고 세 번째에 합격한 어느 학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2년이 잠깐사이에 지나갔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낙방했다고 슬퍼하지 않았을 텐데……
어느 잡지에서 읽은 것입니다 마는, 등산하는 사람들은 정상을 자주 쳐다보지도 않으려니와 아래를 자주 내려다보지도 않는답니다. 어휴, 저기를 언제 다 올라가나 자꾸만 멀어지는 저 아래로 언제 다시 내려가나 이런 생각에 힘이 자꾸 빠지고 결국은 못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내려갈 생각은 하지 말고 그저 올라가기만 해야 합니다. 지금은 오직 내 앞으로 한 발짝만 최선을 다해 올려놓을 뿐입니다. 그렇게 하면 정상까지 오르게 됩니다. 방향 감각을 잃지 않도록만 주의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도 대단한 것 같지만 실은 별것이 아닙니다. 당장의 한 시간 한 시간이 이어진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녹이 쇠를 갉듯이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갉아먹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흐려놓습니다. 게다가 '현재'라고 하는 소중한 이 은사마저 잊게 만듭니다.
미국의 설교가 비처(Beecher)는 말했습니다. 사람은 한 가지 일을 하면서 세 가지 고생을 한다. 일 하기 전에 실패할까 걱정하느라 고생이요, 일 하면서 수고하느라 고생이요, 일 끝나고 결과를 걱정하느라 고생이다.
거듭 강조하겠습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합니다. 한 날의 괴로움을 극소화합시다. 그리하여 현실, 오늘이라고 하는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여겨 최선을 다합시다. 그래야 최고의 작품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사람을 충고하는 법에 대하여 써놓은 것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상사나 윗사람들이 부득불 아랫사람을 책망할 경우가 있는데, 그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 잘못했으면 그 점에 대해서만 자네, 오늘 이것을 이렇게 잘못했구먼 하고 충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뭘 잘못했고 며칠 전에는 뭘 잘못 했다느니, 이것도 잘못하고 저것도 잘못했다느니 하면 그 사람은 더 많은 잘못을 저지르게 된답니다. 게다가 사람이 그러면 못쓰네 하는 식으로 인격마저 자극한다면 그 사람은 돌아서면서 '비록 실수는 내가 했지만 인간 됨됨이는 내가 더 낫다'라고 생각하게 된답니다.
오늘 실수한 것을 가지고 인간성을 따지거나 미래의 운명까지 말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지나간 일 후회하지 맙시다. 내일 일 염려하지 맙시다. 남편 때문에 속을 썩는 어느 여집사님이 아들만큼은 잘 키우려고 온갖 정성을 다 쏟아 애썼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개구쟁이여서 여간 장난이 심하지 않습니다.
자연히 실수가 많겠지요. 이 여집사님은 '녀석이 제 아비 닮아서 벌써부터 여학생만 좋아한다'는 둥 '낭비벽이 있다'는 둥 이만저만 걱정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들이 몇 살이나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이제 국민학교 4학년생이랍니다.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장난기 많은 것을 보고 아예 싹수가 어떻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또 어느 여왕이 딸이 하나 있어 몹시 사랑했답니다. 여섯 살된 이 딸이 큰 책을 한 권 들고 울면서 어머니한테 왔더랍니다. 너 왜 우니 이 책의 글씨를 읽을 수 없어요.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어머니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걱정 말거라. 이제 더 자라면 읽을 수 있게 된단다.
여러분, 앞일을 미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현실로 부닥치면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때가 차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 환경에 처하면 그 때 헤쳐나갈 수 있게 됩니다.
군대에서 '줄매' 맞아보신 적 있습니까 앞사람이 맞는 걸 보노라면 지레 겁이 납니다. 그러나 막상 차례가 되어서 맞고 보니 그런 대로 견딜만하더군요. 그래서 매도 먼저 맞는 게 좋다고 하는가 봅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과거의 죄 짐과 무거운 책임은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으십시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I am crucified with Christ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과거, 현재, 미래 할 것 없이 모든 죄 짐을 다 십자가에 못박아버렸습니다.
미래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그 넓은 은혜가 하나님의 자녀인 나를 인도하실 것이고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오늘 한 날 한 순간, 이것만이 내가 진실하게 감당해나가야 할 몫입니다. 이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방향을 분명히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로 갈 것이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여러분, 나는 그리스도께 잡혔습니다. 잡혔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 길에서 떠나면 방황하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많은 피를 흘리고 숱한 매를 맞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생에게 정하신 목적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작정하신 뜻이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절대로 방기(放棄)해두시지 않습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순간에라도 제 자리에 돌아오도록 만드십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제가 늘 이야기했습니다마는 어릴 적에 시골에서 송아지 길들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미 소를 따라다니며 젖 빨고 마음대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목을 꽉 매어 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송아지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주인이 잡아끄는데 안 가려고 버팁니다. 그러면 뒤에서 채찍질을 합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기왕 끌려갈 바에야 곱게 끌려갈 것이지 무엇 때문에 매를 맞는지 모르겠다고, 송아지를 애처로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주인의 고삐는 그다지 길지 않습니다. 자유를 준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유가 없습니다. 잡아끕니다. 따라서, 끌려갈 바에야 자유롭게, 곱게, 기쁘게 따라가자는 것입니다.
사는 목적을 분명히 하십시다. 그리고 지금 이 현실 속에서 내게 향하신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고 계십니까 현재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지금 가정을 꾸려나가시는 분은 자신의 역할에만 충실하십시오. 아내는 아내 노릇을 잘 하십시오. 남편과 시비하지 마십시오. 남편은 남편 구실만 제대로 하십시오. 아내를 탓하지 마십시오. 나 아닌 누구를 탓하지 맙시다.
지금이라는 것, 오늘이라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오늘을 말합니다. 현시점에서 내가 해야 할 일, 그것만하면 됩니다. 그리고 미래를 하나님께 맡겨 버려야 합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그의 심정을 한번 상상해 봅시다. '지난날에 집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고, 나쁜 사람을 사귀지도 말았어야 했고, 방탕하지 말았어야 했고, 그때 이러이러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는가' 이런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과거에만 집착했다면 한 발짝도 집을 향해 돌이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가 과연 나를 맞아 주실까, 천하에 불효하고도 못된 자식을 어떻게 대해주실까'를 염려했다면 집안으로 들어설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 매이지 않았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늘 이 순간에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을 따름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에스겔 18장 21-22절을 보면, 과거의 많은 범죄는 이제 회개만 한다면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실패한 베드로를 향하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과거를 묻지도 않으셨고, 미래에 대한 맹세를 촉구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현재를 물으실 뿐입니다. 아가파스 메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그뿐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무엇이 부족해서 실패했습니까 서약이 부족했습니까 결단이 부족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과거를 묻지 않으셨을 뿐더러 미래에 대한 맹세를 요구하시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지금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하셨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책임하고 무관심한 사람, 현실주의자가 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깊은 뜻은 믿음의 사람이 되라는 데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고, 하나님의 손으로 운행되며 종말에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본래적으로, 그리고 그 깊이에서, 그 종말에서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32절을 다시 한번 살펴봅시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자녀를 키우면서 부모는 아이가 무엇을 먹어야 할지, 무엇을 입어야 할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헤아립니다. 부모가 모든 것을 잘 알고 보살피기 때문에 자녀는 부모를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와 같으십니다. 내 형편, 내 처지, 내 운명, 내 앞일도 하나님이 아십니다. 나는 오로지 인도하심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25-30절)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다 아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십니다. 겨울이 되면 추울 것도 아시고 여름이 되면 더울 것도 아십니다. 일전에 백일도라는 곳에 다녀왔습니다. 바람이 불고 몹시 추운 날이었습니다. 소 두 마리가 맨몸으로 들판에 서 있었습니다.
그 소들을 보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너희들은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않았는데 이 추운 날씨에 한데 있어도 얼어죽지 않으니 착하구나.'
보십시오. 이 소들이 밍크코트 입지 않았다고 감기에 걸립니까 옷 한 벌 안 입어도 잘 견디어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마련해놓으셨습니다.
욥기 23장 10절을 봅시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내 운명을 그가 아십니다. 내 과거도 그가 아시고 내 현실도 그가 아십니다. 그가 내게 대하여 베푸시는 역사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필연이 있을 뿐입니다. 반드시 뜻이 있고 경륜이 있어서 나를 인도하십니다. 나는 다만 믿고 따라갈 뿐입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그 모든 고난이 다 의미 있는 고난이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모르시는 돌발적이고 우연한 사건이 터지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미리 아시고 그 뜻대로 나를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33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변 일에 몰두하다가 핵심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시한 것들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이루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손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더욱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임할 것이요 하나님의 의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고 구하며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을, 생각의 초점을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맞추어야 합니다. 이 말씀들을 출애굽 사건에 비추어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이가 누구입니까 바로의 손에서 저들이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습니까 가나안으로 인도하겠다고 약속하신 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들은 매사에 걱정과 원망과 불평입니다. 애굽 군대가 추격하자 '애굽에 공동묘지가 없어서 여기서 죽이려느냐'며 원망합니다. 먹을 것이 없다고 걱정이요 물이 없다고 불평입니다. 홍해를 갈라 애굽 군대를 막아주시고, 만나를 내려 먹이시고, 반석에서 생수를 내어 먹이신 하나님,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거친 광야와 요단강을 지나게 하시는 하나님을 저들은 믿음으로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합니다. 이스라엘은 오직 믿음으로 한 날의 괴로움을 인내해야 했습니다. 이 한 날의 괴로움은 은사이며, 미래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보증이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는 모두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미래는 다 하나님께 맡길 것입니다.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간 순간을 겸손하게 순종해나갈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발걸음이 요단강을 건너가 아름다운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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