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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눈물 (요 11: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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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이 세상을 한 많은 세상이라 했습니다.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항상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이 아니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민족은 유교적인 영향을 받아 희로애락을 나타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감정 표현이 대단히 미숙합니다. 이런 감정 표현이 미숙함을 다른 민족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즐거워도 그만 좋아도 그만 슬퍼도 그만입니다. 무표정이 가장 좋은 표정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기쁜 일은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도 함께 슬퍼하라. 감정의 표현을 할 것을 말씀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잃어버린 아들,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 때 이웃과 함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즐거워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슬픈 일이 있을 때에는 눈물을 흘리시며 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에 동안 울었던 사건이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나있는 데로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하여 주님은 우셨습니다.
가족이 죽으면 우는 것이 보통이고 좋아하던 친구가 죽으면 슬픈 것은 당연한 것이지 나사로가 죽은 일로 주님께서 우신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주님이 우셨다는 것은 매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우셨을 것 같습니까 단순히 친구가 죽었으므로 우셨을까요 단순히 마르다와 마리아가 불쌍해서 우셨을까요 주위의 여려 사람들이 우니까 분위기에 감정이 복받쳐 함께 울었을까요 이것만이 아니라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누이들이 예수님에게 병든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요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요11:11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하셨는데 나사로가 죽었다고 우셨겠습니까 “요1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살아 날 것을 뻔히 아시면 서도 주님이 우셨다는 것은 나사로의 죽음 때문에 우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병든 것도 아셨고 죽음 것도 아셨고, 다시 살아 날 것까지 말씀하셨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까지 말씀하신 주님이 왜 눈물을 흘리셨습니까

1. 죄를 인해 고통 당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나사로는 병이 들어 죽은 것입니다. 악성 피부병, 즉 문둥병이 들어 죽은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문둥병은 들자 말자 죽는 그런 병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다가 죽은 그런 병입니다. 환자만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함께 당하는 병입니다. 더욱이 유대에서는 문둥병 자를 집 안에 놔두고 있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집에 있었다 하니 이럴 경우에 숨어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그런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가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나사로가 병이 들자 그 고통 때문에 부모가 죽고 오누이들만 남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생활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주님께서 나사로가 죽은 일에 대해 우신 것은 이 모든 인간의 고난과 고통과 질병이 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근원적인 슬픔을 표시하신 것입니다.
이산 가족 찾기가 있었습니다. 그 때 어느 잘 사는 부모가 가난하게 사는 아들을 만났습니다. 그 아들은 피난을 내려오다가 잃어버린 아들인데 부모를 잃고 여기 저기 고아원을 떠돌아다니면서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공부도 못해서 왜소하고 가난하여 살기가 매우 어려운 형편에 있었습니다. 더욱이 결혼도 못했을 뿐 아니라 병이 깊어 오늘내일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가 아들을 찾게된 것입니다. 아들을 찾은 그 부모는 울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병들고 못 배우고 가난한 자식을 보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런데 겨우 부모를 만난 그 사람은 정신이 너무 쇠약해 있어서 부모님을 만난 기쁨과 감격을 견디지 못해서 며칠 동안 기운을 차리고 정신이 드는 것 같더니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부모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부모는 말했습니다. 그때 아이를 잃지만 않았다면 지금은 다른 사람들 못지 않게 잘 먹이고 잘 가르쳐 훌륭한 사람이 되게 했을 텐데 한이 맺인 울음을 울고, 자책감에 울고, 지나간 세월을 원망하며 울고 풀길 없는 고통 속에 울고 울었습니다.
주님의 눈물이 그렇습니다. 지금 나사로가 죽어 버린 것에 대한 눈물이 아닙니다. 나사로는 살아납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다시 죽었습니다. 그리고 살아나지 못하는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즉 죄로 인해 죽음을 당해도 살아 날 수 없는 죄인들이 많습니다. 그 때 에덴 동산에서 사단의 시험을 당하지만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사단이 시험을 했어도 넘어지지만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넘어졌더라도 다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지 못한 일로 주님은 우시고 우십니다.
“심령에 통분이 여기사” 통분이라는 말씀은 ‘콧숨을 거세게 몰아대다’라는 말입니다. ‘크게 동요되다’. ‘깊이 탄식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냥 우신 것이 아닙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거세게 어깨를 흔들며 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로 인하여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면서 주님은 주님의 영이 크게 동요되고 깊이 탄식하게 이르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울음도 그런 울음입니다. 죄인이 죄로 망해 가고 죽어 가는 것을 보시고 우시는 울음입니다.
사형수가 사형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그 놈 죽어 싸다’하는 고소함이 아닙니다. 비록 죽어 가는 사람이라도 죄를 지어 죽어 가는 사람에 대한 강력한 연민과 동정심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울어 나오는 울음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니라.
주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들을 보시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죄 아래서 죄의 종이 되어 있음을 보시고 우리들을 긍휼이 여기사 구원하시기 위해 통분이 여기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아직 까지도 부활의 신앙이 없으면 주님은 슬퍼하십니다.

2. 슬픔에 잠긴 사람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우십니다.
‘민망히 여기사’라는 말은 ‘내적인 동요를 일으키다’. ‘동정을 표현하다’라는 말입니다. 마리아, 마르다와 주위의 사람들이 슬피 우는 것을 보시고 주님도 마음 중심에서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인간적인 슬픔이 주님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오빠를 죽음을 슬퍼하는 두 누이들과 두 누이들로 인해 함께 슬퍼하는 주위의 사람들을 보시고 주님도 함께 슬퍼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사로가 살아 날 것을 너무 잘 아십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살아난다고 해서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나무라거나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사로가 살아난다는 사실을 이미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장차 나사로가 살아 날 것을 믿었지만 지금 나사로가 살아 날 것을 차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의 슬픔에 동참하십니다. 이것이 지극히 거룩하신 주님의 인격이요 정서요 감정이며 사랑입니다.
어떤 집에 큰불이 났습니다. 집 주인과 온 동네 사람이 야단입니다. 집 주인은 너무 놀라고 마음이 아파 소리소리 지르며 웁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 집은 그 집 보다 더 좋은 집을 지을 수 있을 만큼 보험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불이 나 재산이 다 없어져도 경제적으로는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이 난 현장에 온 보험회사 직원은 그 집 주인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부러 불을 지른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도 하고, 고의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잘 된 일인데 뭘 저렇게 야단법석을 떠나라고 냉정합니다. 이 보험회사 직원은 냉정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요 타산적인 사람이요 영리하고 영악한 계산 빠른 사람일지 모르지만 인간성이 메마른 사람입니다.
충남 방직에 불에 타 버렸습니다. 2만평이 넘는 공장이 불에 타고 300억이 넘은 나염 기계 3대가 불에 타고 47000대 분의 원단이 불에 타 버렸다고 합니다. 이 불로 수많은 직원들이 사표를 내고 그들의 생계가 막연해 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신문에는 불에 탄 재산에 120억인데 보험에 가입한 돈은 1200억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 보도를 보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을 했을까요. 120억을 태우고 ·1200억을 타면 큰 이익을 보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혹시 그런 이익을 보기 위해 누가 불을 지른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정이 통하지 않는 무참한 보도입니까 이것은 한 민족의 생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도 예수님은 그 집 주인과 함께 놀라고 울고 동정하고 발을 동동 굴리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롬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라고 하셨으며 “(눅7:32)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하시면서 감정이 없는 이 시대를 책망하시고 한탄하셨습니다.
감정의 동질성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공동체 의식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공동체 의식을 가지지 못하면 아무리 함께 살아도 함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함께 산다고 부부가 되는 것입니까 정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고 생각이 통해야 합니다. 마음 따로 생각 따로 정 따르면 그것은 부부가 아니요 부모 자식이 아니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 하나된 성도가 아닙니다.

3. 믿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통분이 여기셨습니다.
나사로는 살아납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실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의 연락을 받고 이틀을 더 끈 것도 사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그들에게 보여 주시고 믿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나사로가 이런 모양으로 되 버리지 않으면 그가 살아났을 때 이런 저런 이야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미연에 방지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이 벌어지기 전에 나사로가 살아 날 것을 미리 말씀하시므로 주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증명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주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신 일이 있으십니다. “(요13:19)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하신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써 주님의 전능하신 하나님 되심을 말씀하셨으나 듣는 사람들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해도 믿지 않으면 그것처럼 민망스러운 일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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