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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엘리사의 죽음2 (왕하 1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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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시간에 엘리사의 임종 앞에 섣는 요아스 왕을 보았다.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순종하는 것 같으면서도 자기의 방법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있었던 것을 보았다.

자기의 편의대로 자기가 해 왔던 방법대로 살고 있는 요아스 왕의 어리석음을 모았다.

내 마음에 들기 때문에 이 66권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고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란 이론은이 있을 수 없다.

오늘도 엘리사의 죽음을 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한다.

사람들은 흔히 환경을 탓하기를 잘한다.

기도할 떼 "주여 주여 나의 환경을 바꾸어 주십시요"라고 할때가 많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지 말고 나를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해야한다.

하나님에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고쳐야한다.

우리들이 우리들의 생각을 달리할 때 우리들의 문제는 이상하게 해결이 된다.

왜냐하면 내가 변했기 때문이다.

내가 새로와졌기 때문이다.

내가 변하면 기도가 달라진다.

오늘 이시간은 엘리사의 최후인 죽음을 본다.

엘리사는 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제자였다.

엘리야야말로 참으로 세상을 초월한 위대한 사람이었다.

엘리사는 위대한 사람을 따랐기 때문에 또한 그도 위대한 사람이 되었 던 것이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를때의 장면을 잠시 회상을 해 보자.

두 사람이 길갈을 출발하여 왕하2장에서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에 엘리사를 보고 벧엘레 머물라고 할때 엘리사는 엘리야를 향하여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하면서 따랐다.

얼마를 가다가 여리고에 당도 했을 때 엘리야는 똑같은 말로 너는 여기에 머물라고 했더니 엘리사는 전과 같이 대답하면서 엘리야를 따랐다.

또 얼마를 가다가 요단에 이르렀을 대에 엘리야는 또 다시 엘리사를 향하여 "너는 여기 머물라"고 했더니 엘리사는 대답하기를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 나이다" 하면서 맹세까지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이 같이 요단을 건는다.

요단을 건는 후에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물었다.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그랬더니 엘리사는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선후배의 사이인가 요지음에 이런 선후배의 관계가 있는가 끝까지 따랐던 엘리사는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승천할 때 엘리야의 능력의 두루마기를 물려 받았던 것이다.

엘리야를 통하여 능력이 전수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 한 것은 엘리사의 끈기 있는 믿음이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다.

그리고는 그가 죽는 날 까지그가 받은 능력을 잘 지켜가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우리 주위엔 벼라별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바 능력을 끝까지 하나님을 위하여 잘 간직하면서 그의 최후를 마치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이상한 것은 능력받으면 이상하게 곤두박질을 하곤 한다.

거의가 다 엉뚱한 짖들을 한다.

능력받은 자들의 교만.

능력 못받은 것 감사하라.

얼굴 못생긴것 감사하라.

사람들은 별것을 가지고 다 교만해진다.

깡패들 사이에선 깡이센 것을 놓고 교만하다.

지식이 많은 사람들은 저들의 지식을 가지고 천한 사람들도 저들의 천한 것으로 교만하기가 쉽다.

사람들은 이상한 것 가지고 교만하다.

사람이 능력받는 것 놓고 고민하지 말라.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신실한가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 남편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 나는 이런 남자하고 살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는 여자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부인을 잘 못 만났기 때문에 자기의 신세가 요모양 요꼴이라면서 매일 신세타령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딴 사람들이 보면 더 형편 없는 것은 바로 자기 쪽인데 이것을 사 람들은 알지를 못한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능력을 그대로 전수한 하나님의 사람이되었다.

그런 엘리사가 엘리야를 끝까지 따른 삶은 말처럼 쉬운게 아니다. 물려 받은 선배의 삶을 산다는 것 얼마나 힘든 것인지 모른다.1).엘리야의 7번의 기도 2),아브라함의 25년의 기다림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까지 ....

예수님의 제자들! 5,000 명 4,000 명 70인의 제자 열두제자 베드로 마가 엠마오의 두제자 가룟 유다.

초대 교회에서도 7 집사를 선택했었다.

그러나 그중에 한 사람 니골라라는 사람은 끝까지 따르지 못하고 이단의 무리에 가담하고 만다.

데마라는 제자는 세상을 그리워한 나머지 세상을 따르고 만다.

예수님의 12 제자 중 가롯 유다만 빼고는 모두가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랐다.

본문으로 돌아가자.

그 위대했던 하나님의 사람 그렇게 능력이 많았던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그도 결국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이었다.

그럼 이 엘리사의 죽음이 우리들에게 무었을 교훈하고 있는가 우리는 왜 지금 엘리사의 죽음 앞에 서 있는 것인가 엘리사의 죽음이 나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지금 엘리사의 죽음이 말하고 있는 것을 듣고 계시는가 사람은 누구나 다 같은 사람이다.

사람은 여기가 영원히 머물러야하는 곳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다 주의 부르심을 준비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엘리사의 삶을 보라.

잠시도 자기를 위한 날과 시간이 없었다.

하나님의 일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그의 자그마한 생의 년륜을 가지고는 감당이 불감당이었다.

그래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었던 생애가 바로 엘리사의 생애였다.

한 마디로 엘리사는 일하다가 주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이 벌서 11월의 마지막 수요일이다.

이제 금년도도 한 잘밖에는 남지 안았다.

참으로 세월이 빠르다.

정말 살같고 유수같으다.

그런데 금년에 우리들은 무었을 했는가 개중에는 다섯 달란트를 남기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또는 두 달란트를 남기신 분들도 계실 것이다.

이렇게 남기신 분들이 문제가 되어서 염려가 되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혹시나 아직까지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간직만 하고 있는 분들이 있을까하여 멸려를 하는 것이다.

마24;45,46절에서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을 정의하고 있다.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때에 그 종의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라고 했다.

이 말은 주인이 언제 올른지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바로 오늘이 주인이 계산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처럼 알고 살라는 부탁의 말이다.

히9;22절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 시기는 불확실하나 죽음 자체는 확실한 것이다.

야구르트가 꿈꾸는 장수 마을에도 죽음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솔로몬도 죽었고 진시 왕도 죽었고 엘리사도 죽었다.

어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누구처럼 살다가 죽을 것인가고 솔로몬처럼 살다가 진시왕처럼 살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엘리사처럼 살다가 죽을 것인가를 묻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죽음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116;15절에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꼐서 귀중히 보시는도다"라고 하시었다.

죽음은 성자의 생활에 합당한 보상이다(딤후4;6) 죽음은 완성으로 향하는 영혼의 운동이다.

죽음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을 와선시키기 위한 한 단계이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내게 사는 것도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1)라고 말했다.

귀중한 생애는 귀중한 죽음을 가져오고 가치 없는 생활은 가치 없는 죽음을 맞는다.

만일 내게 사는 것이 내 자신이라면 죽음은 손실이요 패망이다.

그러나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면 죽음은 참으로 아름답고 유익한 것이다.

죽음의 긔중함을 아는 사람만이 삶의 목표를 바로 가질 수 있다.

여호와꼐서 주시는 은혜를 무었으로 보답할꼬 라는 것이 그의 삶의 목적으로 등장하게된다.

허지만 그렇지 못한 목적은 그것이 설사 성공을 거둔다할지라도 죽음이라는 것 앞에 허무로 끝나는 것을 알아야한다.

으리를 이 땅에 두시고 또 우리들의 생명을 연장하시고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들도 최선을 다하다가 엘리사처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아름다운 마침을 마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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