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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함께 하는 신앙 (마 26: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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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집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복면을 한 도둑은 칼을 들이대고 소리쳤습니다. “손들어!”겁에 질린 주인이 벌벌 떨면서 손을 드는데 한손만 들고 한손은 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손은 왜 안들어!” 도둑은 다시 한번 더 소리쳤습니다.
“신경통이라서요 이쪽 손은 도저히 들지 못하겠어요” “뭐라고. 신경통 나도 사실은 신경통인데, 얼마나 됐소” “3년 되었어요.” “그래요, 나는 십년짼데.... 무슨 약이 잘 듣습니까” 사실 이 도둑은 고질적인 신경통 환자인지라 다른 일을 도저히 할 수 없어 도둑으로 나선 것이었습니다. 도둑과 주인은 서로가 신경통 환자인지라 동질감을 느껴 칼을 놓고 술까지 마시며 서로의 가슴에 쌓인 한을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같은 문제, 같은 고통을 안고 있는 사람끼리는 동일감 동질성이 있습니다. 신앙은 동질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셨듯이 나를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이고, 내일부터 한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고난주간은 예수님 생애 중 가장 큰 절정을 이루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출생에서부터 줄기차게 오직 이 길을 향해 걸어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중 귀하지 않은 때가 없고 어떤 사역도 우리가 소홀히 할 부분이 없지만 이번 한주간은 예수님 생애의 절정을 이루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육신을 입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세례란 하나가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인간이 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가 그와 함께 합니다.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되었습니다. 그의 부활이 우리 부활의 예표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가능했습니다. 함께하는 신앙, 동일화 동질화의 신앙. 우리의 생애를 걸고 이루어야할 신앙의 과제입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믿음의 열정이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고난의 의미를 생각합시다.
누군가가 중한 벌을 받고 있다면 우리는 저 사람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런 벌을 받나 생각하게 됩니다. 이유없이 벌을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 말구유에 인간의 먹이로 오셨습니다. 헤롯의 위협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난을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30년은 공생애 3년을 위한 준비의 기간이었습니다. 그의 33년은 이 한주간을 위한 것이었고, 그의 생애 전체 33년은 십자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셔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 14번을 쓰러지셨는데 그 길을 비아돌로로사라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몸부림치시다가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고는 죽으셨습니다. 성경은 그 고통과 죽음의 이유가 우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인간의 죄악에 눈을 떠 스스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시대는 짐승을 잡아 그 피로 통하여 인간의 죄를 대속하던 시대였습니다. 제물로 사용되는 짐승은 소나 양, 염소, 비들기 등과 같이 유순한 동물들이었습니다. 동물을 각을 떠야했고, 비들기는 목을 끊어내야 했습니다.
무고한 짐승을 죽이면서 자신의 죄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죄를 가리우는 역할 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단번에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피의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의 죄가 약화되거나 희석되어서는 안됩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짐승을 죽였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침뱉고, 멸시하고 조롱했습니다. 그에게 가시 면류관을 씌웠고, 창으로 찌르고 못박았습니다. 그 죄악의 당사자는 바로 나 자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아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2.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됩시다.
주님은 그가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최후의 기도를 드리러 겟세마네 동산에 사랑하는 제자 셋을 데리고 갔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해해다오” 말씀하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간절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저주, 그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그가 아셨기에 몸부림치며 피와 땀과 눈물을 쏟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겟세마네라 하는 말의 뜻은 “기름을 짜는 틀”입니다. 자신의 모든 진액을 모두 빼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 기도에, 그 슬픔에 제자들로서 동참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떻게 행동하였습니까 육신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쓰러져 잠을 잤습니다. 피곤하다는 것이 동정의 여지는 있겠으나 이 자리는 결코 잠을 자서는 안될 자리였습니다. 죽기까지 따르겠노라고 다짐했던 예수님이 이제 죽음을 앞두고 기도하셨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들을 탓하기 이전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 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 40일을 사순절이라고 합니다. 그 사순절을 여러분은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남은 탓하기 이전에 자신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사랑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자리에 나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의 고통과 슬픔에, 기쁨에 나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팔고 부인하고 도망하였으나 여인들은 울며 울며 군병들에게 밀리고 짓밟히면서 골고다 언덕까지 따라 왔습니다.
이 연약한 여인들도 좇아 왔는데 제자들은 왜 좇아오지 못했습니까 구레네 시몬은 얼떨결에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제자들 그들은 버렸고, 부인했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바로 여러분의 자화상이 아닙니까 주의 좌우편 자리를 다툴 때는 서로 나서다가 고난이 닥치자 사방으로 도망쳐 버리는 이 간사함이 여러분과 나의 비겁함은 아닙니까
오늘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합시다. 저주하면서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찾아오셔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동일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분담하는것입니다. 주님이 머무는 자리에 여러분도 계십시오. 갈릴리 호수에도, 사마리아 우물가에도 가십시오.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주님과 함께 기도하십시오. 골고다 언덕에서 찢기는 주님의 고통을 경험하십시오.

3.영광의 주님이 갚아 주실 것입니다.
군인에게는 빛나고 깨끗한 군복이 자랑스럽지 않습니다. 훈련 중에 찢기고 땀과 먼지에 찌든 군복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성도에게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축복해 주셨습니다’하는 간증은 귀한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강권하사 기쁜 마음으로 이렇게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하는 간증이 고귀합니다.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하셨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 가운데 채우노라(골 1:24)’했습니다.
고통의 시간은 길고 지루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댓가는 주님이 갚아 주십니다. 그가 울 때 나도 울고, 그가 괴로워할 때 나도 괴로워 하고, 그가 십자가를 질 때 나도 나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것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끝까지 복종하심으로 그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일평생 살아가면서 사람사는 인생이란 고난 뿐이라고 술회를 합니다.
그 엄청난 수난의 역정 가운데 주를 위한 고난이 없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 숱한 세월, 그 엄청난 기회 속에서 주를 위하여 일한 것이 하나도 없는 인생은 얼마나 무의미합니까
어떤 사람이 죽어 예수님 앞에 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책을 한참 뒤척이시더니 “네 이름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럴리가요 제가 바빠서 주님을 위하여 한일은 없어도 주님을 믿었는 걸요” “그래 넌 무슨 일을 하느라 그렇게 바빴느냐” “사업을 크게 벌려 놔서 정신이 없었어요. 가족들에게도 신경을 써야 했구요. 하여튼 정신없이 바빴어요” “나도 어느날 네 이름을 기록하려고 늘 마음을 먹었었지만 너무 바빠서 적지 못했구나”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인생을 다 바치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지구상에 나 한사람만 있었어도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릴셨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가 주를 사랑하는것이 마땅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젊은 날 시장에 나가 보았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일가족이 노예로 팔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떨어지기 싫어 몸부림치며 울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가련한지라 링컨은 돈을 주고 그 일가족을 샀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당신들은 자유입니다. 어디에 가서든지 자유롭게 사십시오.” 가장이 되는 노예가 말을 합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당신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사실 링컨의 노예가 되는 것이 당시로서는 그들 가족이 흩어지지 않고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자유함을 얻었으나 그의 사랑 안에서 구속을 받을 때 우리는 마귀의 올무와 세상의 유혹에서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언제나 어디서 주님과 함께 하는 신앙은 주님의 보호와 사랑을 어디서나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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