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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사 5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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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똑같은 대상을 놓고 상황에 따라 전혀 상반된 비유를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뱀이 마귀와 저주의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너희는 비들기 같이 온유하고 뱀같이 지혜로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지혜를 강조하기 위해서 뱀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또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들의 것이니라” 천국에 들어갈 자의 기준으로 어린이를 말씀하시면서 말씀하시면서 믿음에는 어린 아이가 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성숙을 강조할 때는 어린 아이를 나쁜 것으로 설명합니다. 양은 하나님 앞에 희생의 제물로 드려졌던 동물인지라 좋은 의미로 이해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지하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동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양의 특성은 온순함과 희생에 있으나 반대로 어리석고, 보지 못하며, 외부의 공격에 속수무책인 인간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다같은 범주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양된 인류가 걸어가는 길을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양의 특성을 살펴 보겠습니다. 양은 멀리 보지 못합니다. 불과 5M 전방도 보지못하는 지독한 근시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제한성을 상징합니다. 양은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개는 10리, 100를 나갔다가도 되돌아 옵니다. 그러나 양은 매일 같이 드나드는 우리와 초장을 스스로 오가지 못합니다. 이것은 갈바 몰라 방황하는 인류를 상징합니다.
오늘날은 들을 수 있는 노래가 없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가 없고, 흔들 수 있는 깃발이 없는 세대입니다. 갈 바 몰라 방황하는 인류를 상징해 주는 말입니다. 또 양은 외부의 공격에서 스스로를 방어할 그 어떤 능력도 가지지 못합니다.
동물들은 나름대로의 방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 뿔 등이 무기가 됩니다. 자체적인 방어력으로 보호색을 지니기도 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 가면 ‘스컹크 조심’이라는 경고판이 여기저기 붙어 있습니다. 그 냄새의 지독함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는 마귀와 세상의 공격에서 스스로를 지킬만한 그 어떤 방어력도 갖지 못한 것을 상징합니다.
몸이 있고 물체가 있으면 대포라도 쏠텐데 마귀는 악한 영이므로 그러 수도 없습니다. 이 안타까운 양이 위기에 직면한 인류요, 인간이요, 저와 여러분 자신들입니다. 우리의 안타까운 처지입니다.
무지몽매한 인간이, 무력한 우리가 내려야할 선택은 어떤 것입니까 양은 여러 기관 중에 유일하게 청각기관만 발달되어 있습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 그것만이 양이 사는 유일한 길이요, 최선의 방어력입니다. 왜 우리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1.인류는 사망길로 내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의 사막에 가면 스프링 밧크라는 산양이 있습니다. 이들은 떼를 지어 다닙니다. 이들은 풀과 물이 있는 땅에서 지내다가 그 풀이 떨어지면 더 넓은 초원을 찾아 갑니다. 나이 많은 양이 앞장서고 뒤에는 어린 양들이 뒤따릅니다.
처음에는 한가롭게 더 넓고 푸른 초원을 찾아 갑니다. 한참을 가다 푸른 초원이 보이면 먼저 발견한 양이 뛰기 시작합니다. 옆에 있던 양은 친구가 뛰니까 덩달아 뛰어 갑니다. 뒤에 있는 양들은 영문도 모른채 앞에 있는 양들과 주위의 양들이 뛰기 시작하자 영문도 모른 채 뛰어 갑니다. 그런데 앞에 선 양떼가 길을 잘못들어 벼랑 끝으로가 떨어지면 뒤에 있는 양떼가 정지하지 않고 한마리 한마리 모두 떨어져 죽는다는 것입니다.
삶을 위한 출발이 죽음의 행진이 되고 맙니다. 인간은 언제나 더 나은 삶을 말하고 목표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 삶이 가능합니까 더 처참하게 일그러져 가는 것이 인간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이 무시무시한 행진의 대열에 여러분도 끼어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습니까
언제가 다큐멘트리 드라마를 본적이 있습니다. 수많은 양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불이 나서 불길은 점점 양떼에게로 옮겨 왔습니다. 우리 사람 같으면 도망을 갈텐데 이 양떼들은 꼼짝않고 그 자리에서 타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상의 두가지 예를 보면서 우리는 양이 얼마나 무지하고 이러석은 동물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양떼가 인류이며 개체의 양떼가 다 우리 자신이라고 지적합니다. 사망길에서 헤매이며 방황하는 것이 인류입니다. 도살장으로 양들을 데리고 갈 때에는 모든 양을 다 끌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두머리가 되는 양만 데리고 가면 나머지 양들은 모조리 따라 옵니다. 자기 앞의 양이 죽는 것을 보면서도 그대로 좇아가는 것이 양입니다. 이 행진에서 우리가 사는 것은 목자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2.고집부리는 양이 되지 맙시다.
양의 또 한가지 특성은 유별나게 고집이 세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경고 앞에서도 불순종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후예된 인류가 걸어온 모든 길은 불순종의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사망길입니다.
홍수로 하나님은 인류를 심판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무서운 홍수 심판을 경험하고도 하나님을 두려워 하여 순종하기보다는 바벨탑을 쌓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인류는 하나님 안에서의 생존, 생명이 아닌 하나님 밖의 구원, 생명을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모든 근본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예수” 기 이름 외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옳은 고집, 의지는 세워야 합니다.
학생이 밤을 새워 공부하는 열심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옳지못한 고집은 빨리 꺾을수록 좋습니다. 불순종의 고집은 불신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우리들 속에, 내 속에도 가득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불신자는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신자는 징계하십니다. 내 양이 아닐 때는 관계없습니다. 그러나 내 양은 내게 속하였고, 내 책임이기에 징계합니다.
어떤 직장에서 부장과 과장이 서로 멱살을 잡고 대판 싸웠습니다. 얼마나 지독스럽게 싸웠는지 싸움 뒤에 두 사람은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서로 맞고소를 해서 경찰에서 나왔는데 경찰들은 같은 동료들이고 사소한 일로 발단된 것이니 화해하고 끝내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에 교회에서 심방을 왔는데 부장은 교회에 장로였고, 과장은 집사였습니다. 과장이 부장에게 말합니다. “부장님, 세상에 제가 그 직장에 5년을 다녔는데 어떻게 예수 믿는 티를 그렇게도 안내실 수 있습니까” “자네는 어떻고, 예수 믿는 친구가 퍼마시기는 왜 그렇게 많이 마셔. 노는데는 다른 사람 저리 가라니 누가 자네를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믿었겠나” 하더랍니다.
믿는 것처럼 믿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믿는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사는 일에 열심을 냅시다.

3.양에게는 절대적으로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선한 목자의 비유를 통해 목자를 위하여 양이 있지 않고 양을 위하여 목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위하여 있는 목자, 그 목자의 음성을 양은 듣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양이 스스로의 무지함을 깨닫지 못하고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스스로 죽음의 길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양에게 있어 예민하게 발달된 하나의 기관이 있다면 그것은 청각입니다.
양의 청각의 기관이 얼마나 발달했는지를 보여주는 예화가 있습니다. 헨리 포드라는 사람이 이스라엘에 가서 6개월을 지내면서 양들을 연구하였습니다. 그가 양들의 청각을 속이기 위해 6개월 동안 주인의 음성을 연습하여 양들을 불렀는데 양들이 속지 않더랍니다. 양은 주인의 음성을 듣습니다. 들은 뒤에는 순종하여야 삽니다. 듣고 순종하는 것만이 자신이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양은 자신의 뜻대로 행하려 하는 완고한 고집이 있습니다. 이 고집을 꺾고 순종하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때로는 답답해 보이고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신앙이 얼마나 큰 보호의 울타리가 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실이 온갖 더럽고 추한 모든 것들로부터 멸망당하고 심판 받을 것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합니다.
어느 시골 국민학교에 학생 수에 배해 비좁은 운동장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비좁은 운동장을 넓게 사용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어느 선생님이 의견을 내기를 운동장 주위에 심은 나무들을 모두 베어내면 똑같은 면적이라 할지라도 시각적으로 넓게 보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의견으로 인정되어 그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들이 벌어졌습니다. 옛날에 운동장을 좁아라고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나무를 베어낸 다음에는 운동장 한가운데 모여 소꼽장난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유인즉슨 답답하게만 보여던 나무들이 사실은 아이들의 마음에 보호막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무를 베어내자 아이들은 뭔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운동장 한 가운데서만 놀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의 장애물로,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을 보호하고 있는 사랑의 울타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양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지난 여름에 비오는 날 밤 안경없이 야간운전을 해본 일이 있습니다. 저는 맑은 날에도 안경이 없으면 장님과 다름이 없는데 안경없이 비오는날, 밤운전을 했다면 놀라실 것입니다. 기적적으로 다녀오긴 했지만 사실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불가능할 때는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 운전 대를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이 운전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나를, 방향감각이 없는 나를, 아무런 방어력이 없는 나를 그대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에게 맡기면 그가 인도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질고는 질병을 이야기하는데 문둥병자들이 받는 육신과 영혼의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그가 찔렸고, 그가 상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양들이 이미 범한 죄 때문에 그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의 댓가를 그가 담당하셨습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의 길을 그에게 맡기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양이요, 어리석고 무능한 백성임을 고백합시다. 나를 붙들어 주세요. 나를 인도해 주세요. 기도하는 우리가 됩시다. 우리가 다 양같아서 그릇행한 죄의 결과를 그가 다 담당하셨습니다. 그가 질고를, 그가 슬픔을 다 당하셨습니다.
살기 위해서, 축복받기 위해서 목자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야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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