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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리와 제자 (요 06:6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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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곁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습니다. 보통 우리들은 예수님 곁에 모인 사람들의 수에 관심이 있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그 사람들은 무리와 제자로 나누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무리와 제자는 함께 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확연히 다른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도 동일하게 많은 수의 성도가 있지만 그들도 역시 동일하게 무리와 제자로 나뉘어 집니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도 무리와 제자입니다. 누가 무리이고 누가 제자인지는 예수님이 구별하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들 각자가 내가 무리인지 제자인지를 깨닫고 모두가 제자가 되기 위하여 몸부림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앞에 있던 사람들이 다 제자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모두가 제자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무리 가운데서 나와서 제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와 똑같은 제자를 만들어야 합니다. 과연 무리는 무엇이며, 제자는 누구입니까 제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입니까말씀을 통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무리는 예수님께 스스로 나아온 자이고, 제자는 예수님이 부르신 자입니다.
무리는 자신들의 문제를 가지고 해결받고자 예수님 앞에 스스로 자진해서 나온 자들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부르신 자들입니다.
인쇄소를 하는 사람들과 꽃집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 장사가 안된다고 합니다. 그만큼 교회에서 사용하는 인쇄물과 꽃의 양이 많다는 말입니다. 생활을 위하여 교회에 다니는 사람, 주님을 자기 생활에 이용하는 사람들입니다. 교인들은 세상적인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교회에 나가 예수까지 이용하는 사람들이라는 칼럼을 언젠가 신문 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일간지에 안 믿는 기자가 쓴 글이지만 어느 일면으로는 우리가 인정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벳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남자 장정만 오천 명이 먹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굶주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엄청난 기적을 보자 사람들은 입이 벌어졌습니다. ‘저 분만 우리의 왕으로 삼으면 우리는 평생 배고프지 않고, 일하지 않아도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15절을 보니까 억지로 잡아 임금을 삼으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 되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머슴으로서의 왕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예수님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무리들을 피하여 밤에 제자들과 함께 배를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무리들이 아침에 일어나 다시 얻어 먹고자 벳세다 광야로 나왔더니 예수님과 제자들이 없었습니다. 수소문을 하여 물어 물어 가버나움까지 찾아왔습니다. 만나서는 ‘언제 이리로 오셨습니까 왜 우리의 배고픔은 외면하시고 이곳으로 오셨습니까’ 물었습니다. 예수님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6-27)”
예수님이 육신의 떡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생명의 떡을 위하여 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들의 기대가 무너지자 안되겠다 싶어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는데 그토록 결사적으로 쫓아왔던 사람들이 다 떠나 버렸습니다. 이것이 무리인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는 손끝 하나 움직일 마음없이 주님이 자기만을 위해 일해 달라고 조르는 사람들입니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목적만 달성하면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요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미련없이 떠나버리는 사람들입니다.
대전에서 목회하고 있는 친구 목사님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어렵게 지하실에서 개척 교회를 하고 있는데 어느날 점잖게 생긴 신사 한 분이 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시내에서 음향기기 대리점을 하는 사장님이었습니다. 마침 앰프 시스템을 바꾸어야 할 처지라 그 분에게 저렴하게 구입하는 길을 물었습니다.
그 사장님은 자기가 원가로 제공하겠다고 하여 없는 돈에 수백만 원을 들여 교체를 했습니다. 그 뒤에 그 사장님은 발길을 끊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상적인 가격의 갑절을 주고 구입한 것입니다. 완전히 사기를 당한 것입니다. 신앙을 빙자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악의적인 목적을 갖지는 않았을지라도 주님의 일에, 맡겨진 사명에 관심 없는 사람. 그도 제자가 아닌 무리입니다. 천국 가고 싶은 마음도 없고, 지옥이나 면해보자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만일 내가 그렇다 인정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아직 제자가 아닌 무리입니다. 무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라면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부르신 자들입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 4:19)”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막 3:14-15)”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부르신 자들입니다. 사람낚는 어부되라고 부르신 자들입니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주셔서 주의 일을 행하게 하기 위해 부르신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이 자리에 여러분의 목적 때문에 나왔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목적을 가지고 부르셨기에 나오셨습니까 여러분의 생애를 무리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제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제자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엄중히 묻습니다. 당신은 무리입니까 아니면 제자입니까

2.무리는 피상적으로 주님을 접촉했던 사람들인 반면에, 제자는 주님과 함께
동거했던 자들입니다.
저는 대학 시절 나환자 목회를 꿈꾸며 전국 나환자 정착촌을 3년간 찾아 다녔습니다. 대전 용전동에 있는 나환자 교회를 6개월간 출석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염이 되지 않는 음성 나환자들과도 접촉하는 것을 꺼려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전염이 되는 양성 나환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나관리협회를 찾아가 정기적으로 환자들도 만나 보았고, 소록도에도 가보았습니다. 많은 수의 환자들을 만났습니다.
남들은 기겁을 하고 도망갈 것처럼 흉칙한 모습을 한 환자들과 식사도 했고 잠도 같이 잤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그들을 이해하고자 몸부림쳤습니다.
김동길 교수가 쓴 ‘문둥이와 천리길을’이라는 수필이 있습니다. 고속버스를 타고 지방으로 내려가는데 다른 좌석에서 문둥이와는 함께 앉지 못하겠다고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김동길 교수가 자기 자리에 그 손님을 앉히고 자기가 그 자리에 앉아 문둥이와 천리길을 함께 갔다고 자랑스럽게 써 놓았습니다. 제가 읽으면서 웃었습니다. 나환자는 그렇게 이해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대학 3학년 여름 방학에 원주에 있는 대명원이라는 정착촌 마을을 찾아갔습니다. 양계, 양돈을 하는 마을인데 그들과 함께 먹고 생활하며 나환자들과의 거리감을 좁히기 위함이었습니다. 장로님 가정을 찾아가 방학동안 일할테니 다른 것 필요없이 숙식만 해결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손이 조막손처럼 오그라진 장로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도사님, 일 하려면 돈받고 일하십시오.” 할말이 없었습니다. 나환자들에게 3년이라는 세월을 두고 가까와지려고 저처럼 노력하는 사람들도 흔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기본적인 전제를 잘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정상인들로부터 멸시 천대를 받고 있습니다.
저는 불쌍하는 인식을 가지고 다가 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문둥이라는 편견도 싫고, 불쌍하다는 인식도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똑같은 인간으로 대우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란 그토록 어려운 것입니다. 나환자들의 심리세계를 잘 알기 위해서는 이청준씨가 쓴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읽어보면 좋습니다.
제가 정착촌을 떠나면서 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타인일 수밖에 없구나 하는 한계를 절감했습니다. 무리는 본질에 대하여는 알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겉만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서 여러 가지의 천국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차별을 두고 상대하십니다. 무리들에게는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제자들은 비유에 대한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마 13:34-36)”
무리들은 예수님을 단지 자신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떡을 만들어 주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병을 고쳐주시고, 재산 가지고 형제 간에 싸움이 벌어질 때 그것을 판결해 주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엘리야나 예레미야, 세례 요한과 같은 선지자 중의 하나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신 배후에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라는 사실을 복선으로 깔고 있습니다. 모든 이적이 그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달랐습니다.
육신의 떡을 주지 않으시고, 자신이 영생을 주는 산떡이라고 말씀하자 모두 떠났습니다.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시자 무리들은 하나 둘씩 떠나갔습니다. 주님이 열 두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때 베드로가 어떻게 말합니까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영생의 말씀인 것을 알았습니다. 영생의 말씀이기에 떠날래도 떠날 수 없는 것이 제자입니다. 이것이 무리와 제자의 확연한 차이입니다.

3.무리는 뒤를 돌아다 보는 자였고, 제자는 십자가를 지는 자였습니다.
무리는 이익이 되면 달려 나가고 손해가 되면 꽁무니를 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들은 현명하다고 말합니다.
지난 해 여름성경학교를 야외에서 가졌습니다. 문의에 있는 공원으로 나갔습니다. 아이들을 잠시 흩어져 놀도록 했습니다. 그늘에 앉아 있는데 5,6학년 되어 보이는 아이들 몇명이 찾아왔습니다. 저희가 데리고 나간 어린 아이가 자신들의 아이스크림 한 개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이스크림 값 300원을 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너무 놀랐습니다. 아예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서너살 먹은 아이가 목이 말라 먹고 싶은 마음에 옆에 놓아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고 돈을 달라는 아이들 앞에 기가 막혀 한숨만 나왔습니다. 내 아이스크림을 어린 아이가 간절히 먹고 싶은 생각에 나도 몰래 먹으면 꼭 그 돈을 받아야 하는 건가요 정말 그래야 하는 건가요
왜 그 아이들이 그렇게 했을까요 뺏더라도 빼앗기지 말아라! 때리더라도 절대 맞지는 말아라! 그렇게 배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할 세상입니다. 교회 안에는 이런 사람들이 없습니까 아니요, 오히려 꽉 차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각박한 세상에 우리의 신앙도 주님 앞에 손해보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꽉 차 있는 것만 같습니다. 예배 한 시간 더 드리면 안되고, 기도 한 시간 더하면 안되고 이것 이상은 요구하지 말아요! 소리치는 것이 우리는 아닙니까
나를 위하여 피흘려 죽으신 그분 앞에 새벽잠 줄이고 나와 예배하면 안되고, 물질적으로 더 희생하면 안되고, 내 소원 응답 안되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소리치는 무리가 우리들 자신은 아닌가요 뒤를 보고 주위를 보고 다른 사람 눈치보며 손해 안 볼려고 애쓰는 무리 중에 우리가 속해 있는 것은 아닌가요
제자는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는 자입니다. 주께서 부르실 때에 배와 그물과 고기와 직업과 아내와 가정도 버린 자들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형제 자매도 버렸습니다. 부모 자식 전토도 버렸습니다. 버리는 순간에 그들에게 고통이 없었을까요 찢어지는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아비 장사 지내는 일에도 가지 말라 했을 때 주님의 명령이기에 가지 않는 것이 제자입니다. “작별 인사만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하는 것도 가지 말라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했을 때 눈물을 머금고 그대로 돌아섰던 그들이 제자입니다. 그들이 어리석은 자들입니까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 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막 10:28-31)”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자가 바보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무리에서 제자로 옮겨지지 못하는 자가 참으로 어리석은 자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 하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자가 가련한 자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자신을 전적으로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는 핍박도 받을 것입니다.그러나 그들은 잃은 것의 백배를 받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제자는 상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리는 그날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두려워 떠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무리와 제자, 같은 자리에 같은 시간에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 앞에 있는 목적이 각자 다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랐습니다. 주님께 무엇 하나라도 더 얻으려는 자와 이미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을 위하여 일하고 싶은 열정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누가 현명한 사람입니까 당신은 무리입니까 아니면 제자입니까 어느 자리에 머물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 앞에는 무리가 변하여 제자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제자가 변하여 무리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에 예수님을 자기 이익을 위하여 팔아 버렸습니다. 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이름이 되었습니다. 무리와 제자, 여러분은 이 두 가지 이름 중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름을 간직하기를 원하십니까 어떤 이름으로 예수님 앞에 가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이 순간 당신이 얻어 영원히 소유하기를 원하는 이름을 머뭇거리지 말고 선택하십시오. 그리고 그 이름을 위하여 사십시오. 이미 선택은 결과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선택이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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