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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 대한 사랑 (빌 0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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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전체가 현직 대학교수가 자기 아버지를 무참하게 찔러 살해한 사건으로 떠들썩했던 한 주일이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를 그렇게 무참하게 찔러 살해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 의문점으로 남습니다.
아직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수사과정을 더 지켜봐야 하겠습니다만 제가 예측하기는 그가 직접 살해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설사 아니라 해도 그가 누구를 시켜 살해함으로 아버지를 죽이는 일에 직접적으로 개입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김성복 교수가 자백한 말의 내용 때문입니다.
처음에 그는 사업 때문에 늘어난 빚을 재산을 상속받아 갚기 위해서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그는 그 자백을 뒤집었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것은 결코 돈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을 되새겨 보면 아버지에 대한 사무친 원한이 뼛속 깊이 사무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왜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종교간의 갈등 때문이었는지, 자신을 무시하는 아버지의 태도 때문이었는지 아직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을 두고 모두가 말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사건을 반대적인 입장에서 살펴보고 싶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 해에도 박한상이라는 유학생이 한약상을 하는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일이 전국을 경악케 했었습니다.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를 죽일 수 있느냐 보다는 저는 이 시간에 어떻게 했기에 자식에 의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느냐 하는 점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죄악의 쓴 뿌리는 마귀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죄악의 물줄기는 부모에게서 자식에게 흘러간 것입니다. 잘못 가르치고 잘못 길렀기에 그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패륜의 범죄는 가난한 가정이 아닌 부유층의 가정에서 더 많이 일어납니다. 못 배운 사람보다는 많이 배운 사람들에 의해서 더 많이 나타납니다.
박한상군 같은 경우는 어려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 성장했습니다. 동생들은 공부를 잘하는데 장남인 자신은 성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상대적인 열등감을 동생들에게 늘 느껴왔고, 아버지에게는 눈에 박힌 가시와 같은 존재로 취급되었습니다. 나름대로 애를 썼지만 성적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한참 혼이 나고 죄송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쳐다보고 있으면 건방지게 째려본다고 매를 맞았습니다.
그는 본래 눈매가 치켜 올라간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라만 보아도 남이 보기에는 쏘아본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선하게 보이려고 눈을 성형수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더 아버지로부터 미움을 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모를 죽인 패륜의 범죄도 끔찍하지만 자식을 그 지경으로 만든 부모도 철저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자라갑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기계적인 인간이 되어가고 사랑이 식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미움이 곧 살인이라고 했습니다. 자식에 대한 미움이 자식을 영적으로 죽였고, 그 자식에 부모가 살해를 당했습니다.
미움의 배후에는 악한 원수 마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고 서로 미워하게 하며 갈등하게 합니다. 실타래 엉키듯 복잡한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사단의 권세를 결박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만이 부모가 자식을 참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진정으로 부모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니 죄가 들어오고, 사단에게 소속이 되어 이런 범죄가 자꾸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만이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현 세태를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예수님의 사랑은 종처럼 낮아지신 사랑입니다.
사람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사랑입니다. 밥을 안 먹고는 살아도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랑 받으면 살아야 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이 없을 때 그 사랑이 잘못되었을 때 인간은 불행해집니다.
사랑의 기본 조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동일선상에 서는 것입니다. 같은 수준, 같은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상대방을 모욕하는 것은 동정입니다. 남녀간에 사랑할 때 남들이 볼 때는 한쪽이 기운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한쪽이 월등하게 조건이 좋고, 한쪽이 뒤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동정에서 기인한다면 그것은 사랑일 수 없습니다.
왕자와 거지가 결혼을 해도 동정 때문에 하면 안됩니다. 내가 상대방보다 우월하다면 그에게로 내가 내려서는 것 그것이 참된 사랑입니다. 그가 올라올 수 없는 한 내가 내려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되었고”(빌 2:6-7)
그는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친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점들이 있습니까 그는 창조자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에게는 죄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덩어리입니다.
감히 사랑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우리를 사랑해 달라고 요청할 수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육신을 입고 종처럼 낮은 모습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사랑한다 말하셨습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주님을 부인한 우리를 다시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을 낮추사 우리와 하나가 되신 겸손의 사랑이었습니다.

2.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신 사랑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지금은 십자가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십자가 장식을 하고, 여자들은 귀걸이 목걸이를 하고 다닙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어떠했습니까
사람이 식사를 할 때는 인분(人粉) 이야기는 안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마찬가지로 고대 사람들은 식사를 할 때 십자가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처참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시민권자는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십자가 처형을 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십자가는 끔찍한 형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같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도다”
이와 같은 놀라운 사랑을 입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1.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빌 2:1-2)
성경은 무슨 권면, 위로, 교제, 긍휼, 자비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하라 말씀합니다. 2절에 같은 마음, 같은 사랑, 한 마음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동질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기에 인간은 불행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가 주신 놀라운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그의 마음을 가지고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2.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섬기는 사랑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 2:3-4)
상대방이 아무리 부족해도 그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임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연약한 내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구원받은 사실을 감사하야 합니다. 아버지는 저도 구원하시고 저도 자녀 삼기를 원하신다는 거룩한 소원을 깨달아야 합니다.
미움을 받았으면 미움이 밖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을 받았으면 사랑이 밖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도저히 사랑 받을 수 없는 우리를 예수님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남을 사랑해야 합니다.

3.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랑입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나와 남이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마음에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높아짐으로, 세상적인 환경으로 평안을 누리려고 하지만 그와 같은 방법으로는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겸손함으로 그를 높일 때 평안이 옵니다. 어떤 일을 해도 그것이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께 영광이 될 때 우리에게 축복이 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화단을 망치는 방법은 들어가서 발로 짓밟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친구간의 우정도 서로 헐뜯고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처럼 무시하고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가집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신앙은 자기가 애쓰고 힘쓰지 않으면 망가져 버립니다. 특별하게 나쁜 일을 하지 않아도 나태하고 안일한 신앙을 방치하면 금방 식어져 버리고 변질되어 버립니다.
성도들마다 하나님을 잘 사랑하고 잘 섬기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인생의 행복은 원하십니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사람이 일생 동안 얼마나 창조적인 생활을 하느냐 하는 것은 그가 받는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뛰고 달려도 사랑이 없는 노력과 기술은 파괴만 만들어냅니다. 보십시오. 동물의 세계에는 무엇하나 창조되는 것이 없고 단지 서로 잡아먹는 것뿐입니다.
사람이 동물보다 몸도 약하고 수도 적었지만 풍성하게 된 것은 서로 사랑하여 같이 사는 비결을 배운 후부터였습니다. 오늘날 인류는 풍성한 물질, 좋은 환경에 있지만 인간의 파괴적 행동으로 인하여 인류 자체가 멸망의 위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기술이 없거나 무엇이 없어서가 아니라 바로 사랑이 없어서 망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할 줄 모르는 개인과 사회는 망합니다. 아무리 부족하여도 사랑으로 역사하는 생애는 반드시 풍성함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구합시다.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행복을 원하십니까 종처럼 낮아지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사랑하십시오. 희생하며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동일하게 저들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웃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십시오.
사랑함으로 행복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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