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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족할 줄 아는 은혜 (빌 0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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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은 본래적으로 이중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첫째는 무가치성이요, 둘째는 고귀함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흙입니다. 흙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흙에서 나온 인간은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을 육체적으로 보고 세상적으로 보면 무가치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질그릇에 보배를 간직한 자가 되면 그 주님으로 인하여 존귀한 자가 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 2:3)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그러므로 신앙인은 내가 본래적으로 흙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면 교만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겸손합니다. 신앙인의 최고의 덕목은 겸손입니다.
어거스틴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 신앙생활의 승리의 비결을 물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도 겸손해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잘난 것 같아도 따지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잘났어도 못났어도 거기서 거기입니다. 교만할 이유가 없습니다. 기죽을 이유도 없습니다. 신앙인은 자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사실 때문에 자긍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창조의 주님, 생명의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만나도 어떤 사람을 만나도 당당해야 합니다.
겸손한 것과 비굴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교만과 당당함도 역시 다른 것입니다. 성도는 아무리 없어도 비굴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겸손해야 합니다. 아무리 적게 가졌어도 당당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흙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보화 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여러분, 얼마나 겸손합니까 얼마나 당당합니까 우리는 신앙인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립니다. 또 우리는 신앙인으로 나아가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인생에 얼마나 그리스도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까 얼마나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납니까 여러분을 보며 얼마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생각합니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 6:12)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의 신앙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신앙의 거룩한 싸움을 시작할 수 있는 복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성도들의 신앙이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우리의 생활은 점점 더 풍요로워지고 윤택해집니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삶이 편해지고 풍요로와 질수록 인간은 더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성경학교 기간에 선풍기가 떨어져 날개가 부러져 버렸습니다. 그나마 있던 선풍기 한 개는 어제 막내 아들이 선풍기 안에 빗을 집어넣어 날개가 부러졌습니다. 선풍기가 없으니 아이들이 땀을 비오듯 흘렸습니다. 아내는 빨리 가서 선풍기 날개를 사오라고 성화였지만 그대로 두었습니다. 더위를 견디는 훈련을 시켜야하겠다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합니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습니다. 씨 뿌리는 봄은 따뜻하고 열매 맺는 가을은 시원합니다. 사계절을 맞이하면서 인간은 만물의 이치를 생각합니다. 사람은 여름에는 더위에 견디는 훈련을 하고 겨울에는 추위를 이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면서 여름을 덥지 않게 겨울을 춥지 않게 보내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생활의 모든 영역이 편리함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인간은 여름과 겨울을 견디어내는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편리함이 주는 무서운 이기가 더 나은 편리함을 찾게 되었고 육신의 안일만 추구하는 사고와 행동에 빠져버리게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은 고생을 견딜 줄 모릅니다. 전화를 앞사람이 길게 걸면 기다리지 못하고 살인까지 저지릅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왕래가 빨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기다리지 못하고 교차로에서는 경적을 울려대는 것입니다. 좋아진 것 같지만 실상은 그 편리함 속에 우리는 더 많은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과거보다는 많이 편리해졌는데 더 많은 편안함을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보다 더 많은 편리함을 누리는 사람들을 보며 시기심이 일어나고 질투의 감정이 생겨나지 않습니까
문화의 발전은 인간에게 편안함을 갖다 주었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 갔습니다. 따뜻한 인간미를 빼앗아갔습니다. 참과 거짓을 혼동시켜 버렸습니다. 참고 견디는 인내를 빼앗아 버렸습니다. 삶의 풍요는 내면의 중요한 것들은 다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가장 큰 손실은 신앙의 순수성과 인내심을 빼앗아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죄가 동거할 수 없습니다. 죄와 인간을 분리시키는 것이 구원입니다. 죄를 이기며 승리하는 삶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문화와 문명의 편리함을 추구하면서부터 교회는 순수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떤 불의의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성공하면 하나님의 축복인양 착각하는 위선이 교회 안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은 형식적으로 변질되고 참고 인내하며 희생하는 모습들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노래하는 이들은 많아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심히 적은 때가 되었습니다.
조그만 일에 걸려 넘어지고 현실에 야합하고 육신의 안일만을 도모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지켜야할 최소한의 자존심도 팽개치고 거지처럼 살아갑니다. 예배 드리는 것을 친구 만나는 것과 아무런 가책없이 바꿔버리고, 텔레비젼 보는 것과 바꿔버리고, 돈과 세상과 바꿔버립니다. 신앙의 진가는 무엇입니까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얼마나 포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희 장인 어른은 가정이 어려워 큰 딸을 고등학교를 보내지 못했습니다. 조그만 시골인지라 교회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몇달씩 목사님의 사례비가 밀리기도 일쑤였습니다. 빠듯한 교회에 헌금을 하고 나면 생활에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냐 딸의 장래냐 갈등에 빠졌습니다. 장인 어른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선택했습니다. 딸은 아버지를 원망하며 공장으로 갔습니다. 거기에 아픔이 왜 없었겠습니까 남몰래 흘려야 하는 눈물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어렵고 힘든 교회, 주의 사자를 위하여 가정을 희생하셨습니다. 인간은 어리석다 손가락질 했지만 하나님은 그 믿음을 고귀한 사랑으로 받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신앙을 중요시하며 살아갑니까 여러분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다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이 물으시면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랑을 고백할 수 있습니까
신앙생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생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 누구보다도,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생활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를 전적으로 희생하는 생활입니다.

2.스스로의 신앙을 위하여 적극적인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솔로몬은 왕이 되자마자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일천번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합니다. 종에게 지혜를 주셔서 이 백성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다스리게 하옵소서.” 그는 참으로 겸손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귀하게 보셨고 그가 구한 지혜 외에 부귀와 영화도 함께 주셨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솔로몬보다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보다 많은 부귀와 영화를 누린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부귀와 영화를 관리하지 못하고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열왕기상 11장에 보면 왕은 후비가 칠백 인이요 빈장이 삼백 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습니다(왕상 11:3). 솔로몬은 늙어 왕비들로 자유롭게 다른 신들을 좇을 수 있게 했습니다. 예루살렘 앞산에 우상의 산당이 세워지고 왕비들로 모두 자기가 믿는 신들에게 분향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두 번이나 나타나사 다른 신을 좇지 말라고 경고하였으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의 이와 같은 범죄를 인하여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나라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솔로몬의 인생을 곁에서 지켜본 아굴은 하나님 앞에 두 가지를 기도했습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7-9)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기 스스로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사울왕도 처음에는 잃어버린 나귀를 찾으면서도 집에서 걱정할 아버지를 염려하는 효성스러운 아들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를 찾아갈 때 어떻게 빈손으로 갈 수 있느냐며 송구스러워했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위에 있을 때 교만하여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아말렉 왕을 살려주고는 책망을 받을 때도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 그렇게 했다고 변명했습니다. 제사장만 드릴 수 있는 제사를 손수 드려 하나님의 법을 어기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고전 10:12). 아굴은 자신을 위하여 두 가지를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첫째는 진실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허탄과 거짓말을 내가 멀리 할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진실하기를 기도했습니다. 오늘날은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거짓말을 당연하게 여기고 거짓말을 못하면 어리석게 여깁니다. 속고 속이는 혼탁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진실하게 살아가기 위하여 거짓과 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8:44을 보면 마귀는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했습니다. 진리를 사수하고 거짓과 싸우는 것은 곧 마귀와 싸우는 것입니다.
둘째는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솔로몬은 너무 부유해서 타락했습니다. 너무 똑똑하고 건강하고 잘나서 타락했습니다. 아굴은 이것을 잘 알았습니다. 솔로몬을 나무라고 탓하기 이전에 자신의 내면에 세계에도 그런 타락의 조짐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솔로몬 같은 위치에 자신도 서면 그럴 위험이 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으로 하여금 너무 부하게도 너무 가난하게도 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도적질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비굴해질까봐 너무 가난하게도 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타락하면 안됩니다. 교만하면 안됩니다. 비굴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무조건 축복만을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그 축복을 관리할 수 있는 신앙과 인격을 위하여 먼저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스스로를 위하여 정말로 아굴과 같은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자만하지 맙시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합시다.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하는데 물질이 방해가 됩니까 물질을 거둬가 달라고 기도합시다. 건강이 방해가 됩니까 건강을 거둬가 달라고 기도합시다. 성경은 네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그 눈을 뽑아 버리라고 했습니다. 손이 범죄케 하거든 손을 발이 범죄케 하거든 발을 끊어버리라 했습니다. 두 눈, 두 손,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한 눈, 한 손, 한 발을 가지고 천국에 가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방해가 되면 버려야 합니다. 잘라야 합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신앙은 현실보다 귀합니다. 영혼은 육신보다 귀합니다.
저는 제가 목사가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가만히 제가 저 스스로를 생각해보면 예수 안 믿고 목사 안되었으면 참 못된 사람이 되었을 텐데 주의 은혜로 목사가 되어서 이만큼이나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만한 그릇이 못되거나 받은 바된 은혜를 유지할 수 없는 존재라면 처음부터 주지 말기를 기도 드렸습니다. 우리는 아굴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저는 이제부터 하나님 앞에 여러분을 위해서도 받을 만한 축복의 그릇이 못된 사람, 받은 은혜를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축복을 거두어 가시기를 기도하고자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제가 여러분의 위한 최상의 사랑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3.모든 환경에 자족할 줄 아는 능력을 소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바울이 말한 능력은 귀신을 내어쫓고 병을 고치며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형편에 자족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어떤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서 든든히 서가는 신앙을 말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바울의 신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며 교훈을 삼고자 합니다.
①그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았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베냐민 지파라는 가문 자랑을 버렸습니다. 율법의 의도 버렸습니다. 당대의 최고 선생으로 불리우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던 학문도 버렸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이라는 사회적 신분도 버렸습니다. 로마 시민권도 버렸습니다.
사람은 버리고 포기한 만큼은 어렵게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비천한 삶을 자청해서 살았습니다.
②그는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습니다.
그는 총독과 황제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로마도 가기를 원했습니다. 가이사 앞에도 서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 계신 주님을 인하여 누구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바울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총독보다 황제보다 높습니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귀한 분입니다. 신앙인의 자존심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③배부름과 풍부에도 처할 줄을 알았습니다.
④배고픔과 궁핍도 견딜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받는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능력은 복음을 위하여 주님과 함께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자신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몸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능력입니다.
구체적으로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능력을 고백합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 새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후 11:23-33)
바울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온갖 고난을 무엇이든지 기쁨으로 참고 견딜 수 있는 능력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능력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는 바울의 자랑거리가 나옵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고후 12:1-10)
바울은 십 사 년 전에 삼층천에 올라가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하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육체 가운데 남이 알지 못하는 가시가 있었는데 하나님께 고쳐 주시도록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하실 때에 더 이상은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받은 계시가 너무 크므로 자칫하면 교만에 빠질 수 있으므로 자고하지 않도록 가시를 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가시를 주신 하나님께 크게 기뻐하며 감사했습니다.
그의 연약한 육체를 통해 그 엄청난 능력이 나타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잘난 면을 자랑하지만 바울은 약한 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으로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능욕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위대한 능력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능력에 도전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주님은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탄식하셨습니다(눅 18:8).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할 때에 보일 믿음이 있습니까 지난 한 주간 나는 이와 같은 믿음으로 이렇게 주님을 위한 고난도 기뻐하면서 살았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이렇게 살았습니다” 하고 내세울 게 있습니까 없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바울의 능력을 나에게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축복만을 구하지 맙시다. 육신적인 안일만을 찾지 맙시다. 그러면 그럴수록 신앙은 무기력해집니다. 저와 여러분을 피 흘리신 주님을 위하여 고난 당하기로 결심합시다.
내 신앙을 위하여 때로는 아굴과 같은 안타까운 기도라도 드립시다. 나아가 끝내 바울 같은 능력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모든 형편에 자족할 줄 아는 능력, 그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참된 은혜입니다. 이 능력이 참된 제자의 길입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사 모든 것을 다 주신 주님에게 여러분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사랑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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