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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자의 행진 (행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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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딤후4;6-8절에 "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으니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고 자기의 행로를 요약했읍니다.

디모데후서는 네로 환제때 로마 옥중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죽음을 앞에 두고한 고백입니다.

전도자의 최후의 고백입니다.

전도자 바울의 생애는 1),선한 싸움의 행로였읍니다.

2),달려가는 경주자의 행로였읍니다.

3),믿음으로 가는 자의 행로였읍니다.

4),면류관을 바라보는 자의 행로였읍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던 전도자의 삶이었읍니다만 전도자인 사도 바울 자신도 이렇게 살기를 간절히 원했던 길이었읍니다.

행19;21절에서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여기서 볼 수 있는 진리는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쓰시는게 아니라 언제나 준비된 그릇을 쓰시고 계심을 볼 수 있읍니다.

그 준비된 그릇이라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다 갔노라는 고백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마치 우리 주님께서 골고다 언덕위 십자가 상에서 최후로 남기신 말씀인 "내가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그 말씀은 비록 짧지만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었던 말이 아니었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마지막 한마디를 하실 그 때 그 심정은 무한히 감동적이었을 것입니다.

바울도 이 고백을 하기 위하여 그렇게 모진 십자가의 길을 달려 왔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바울의 걸어 온 길을 잘 말해주고 있읍니다.

1,친지들과의 작별을 해야하는 행로 사도 바울은 세상이 말하는 출세의 길이 완전히 보장이 된 사람이었읍 니다.

그의 출생 배경이며 그의 학문이며 그가 소유한 로마의 시민권이며 그가 가지고 있었던 지위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읍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출세가 보장된 그 길을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고 있었읍니다.

바울이 어느날 정오 때즘 다메섹을 통과하고 있을 때였읍니다.

갑짜기 하늘로부터 광채나는 밝은 빛과함께 소리가 들려 왔읍니다.

그 빛과 소리에 놀라난 말에 타고 있던 사도 바울이 땅바닥에 떨어지게 되는 사건을 계기로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며 그 날 그때 오늘의 사도 바울의 길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이 바울의 길이 여러분들의 길이라면 ....

정말 기뻤겠읍니까 아니면 슬펐겠읍니까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 때문에 출세라는 길을 포기해야 했읍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어딘지도 모르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길을 걸어야 했읍니다.

이게 전도자의 길입니다.

20;1절입니다.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여기 작별이라는 말이 있읍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하여 다메섹에서 주님을 뵙게된 때부터 그의 친지들과 작별을 해야 했읍니다.

부모들과 작별을 했읍니다.

그를 아끼던 많은 사람들과 작별을 해야했읍니다.

그의 출세의 모든 기회와도 작별을 해야했읍니다.

그리고 오늘 또 작별을 고하고 있읍니다.

제자들과의 작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도 바울처럼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 날 주님을 만나는 순간 자기 자신을 주님께 드려 헌신해야 하겠 다고 굳게 다짐을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하나님을 위하여 애급의 바로 공주의 아들의 자리를 버렸던 것과 같이 바울도 주님을 위하여 세상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지금 까지 출세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과 주님의 사랑과는 비교가 되질 않았 기 때문이었읍니다.

2,하나님의 백성들을 권면함 새 생명의 진리를 발견한 사도 바울은 자기 혼자만 새생명의 축복을 누릴 수 없어서 이를 세상에 증거키 위하여 전도자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전도자의 길이 비록 어렵고 힘이 듭니다만 그러나 단 한 번이라도 전도를 해 보신분은 자기가 전도한 그 사람이 성경 찬송을 가지고 교회 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는 그 기쁨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음을 잘 압니다.

2절입니다.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전도하는 일도 중하지만 전도된 사람들을 돌아보며 예수를 더 잘 알게하기 위하여 말씀으로 권하는 삶이란 더 더욱 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으로 성도들을 권하기를 즐겨했던 분입니다.

교회에는 바울과 같이 말씀으로 권하는 사람들이 많아야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실태를 보면 말씀으로 권면하는 사람들 보다는 엉 뚱하게 집집에 쓸대없이 남의 흉허물이나 보는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봅니다.

이는 주님이 가장 싫어하는 짓들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말씀으로 형제들을 권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힘써 전도한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여러 말로 권하고 있읍니다.

사도 바울이 두르 돌아 다닌 지방이 어떤 곳들입니까 전도하다가 직사하게 두둘겨 맞은 곳들입니다.

그런 곳이지만 권하는 사명을 잊을 수 없었읍니다.

3,박해자들의 음모 성경을 보다가 느께나마 개닫게 된 사실인데 초대 교회의 최초의 순교자 가 사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처음 선택된 7집사중 한 사람입니다.

집사가 사도들 보다 먼저 순교자의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사실에 저는 큰 충격을 받았읍니다.

이 순교의 사건이 주는 교훈은 헌신은 직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하는 것임을 보았읍니다.

바울도 사도이기는 하지만 주님의 직접적인 제자는 아니었읍니다.

그러면서 얼마나 많은 박해를 받았는지 우리는 말로 다 형언할 수가 없읍니다.

3절입니다.

"거기 석달을 있다가 배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함으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헬라에 석달을 있는 동안에도 박해의 무리들은 계획적으로 바울을 괴롭 혔던 것입니다.

헬라에 석달을 있었다는 말은 무었을 말하는 것입니까 헬라는 유대 나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유대 나라도 아닌 타국 땅에서 동족인 유대인들이 동족을 박해할 음모를 계획했던 것입니다.

헬라에 있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이 아닌 동족의 박해를 당해야함이 바로 전도자의 행로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도 바울이 이 길을 마다 했다면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을까요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의 제물이 두려워 한국의 선교를 포기 했더라면 과연 오늘과 같은 한국의 교회가 있을 수 있었을가요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순교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복음이 이렇게 전파 되 오고 있는 것입니다.

밭에 자라는 채소나 한톨의 곡식도 농부가 애써 흘리는 땀과 노력이 있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영혼이 새생명을 얻는데 어찌 우리 성도된 자가 핍박과 박해 를 마다 해서야 하겠읍니까 예수님께서 8복을 말씀하시면서 그 마지막복을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마5;11-13절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전도자의 행로는 박해를 각오해야하는 험한 길입니다.

그렇게 험한 길이기에 보람도 있지만 하늘의 상은 엄청나게 큼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험한 길을 목숨을 다하여 달려 갔던 것입니다.

4,동료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 4-5절입니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그들은 먼저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얼마나 아름다운 구절입니까 4 절엔 아시아까지 바울과 함께 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읍니다.

성경에 이름이 기록된 것만도 귀한데 그것이 좋은 일에 기록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복된 영광입니까 5절엔 드로아에 먼저 가서 바울을 기다리고 있는 형제들이 있읍니다.

그들의 이름이 또 기록이 되었읍니다.

전도자의 행로에는 바울처럼 목숨을 걸고 달려 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또 바울처럼 직접 뛰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바울과 함께 동참하는 사람도 있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시길 원하십니까 바울과 같은 사람입니까 바울과 함게 한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하는 사람이 되시길 원하십니까 주님이 오시는 마지막때에 우리가 살고 있읍니다.

이 때야 말로 형제가 함께하는 공동체의 삶이 필요한 때입니다.

형제를 귀하게 여기시길 바랍니다.

5,십자가의 길 6절입니다.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이말을 잘 되새기시길 원합니다.

우리는 무교절 후에 란 말은 그때가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던 유월절 절기 였읍니다.

그 유월절 절기에는 빌립보에 있었고 그 절기가 끝나는대로 배타고 닷새 를 여행해서 드로아에 이른 것입니다.

또 드로아에 이른지가 이레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레는 7일을 말합니다.

그럼 이레 후에는 무었을 했다는 말입니까 또 전도자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갔다는 말입니다.

잠시도 머무를 수가 없는 것이 전도자의 행로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을 광야의 길이라고 합니다.

또는 나그네의 길이라고들 말합니다.

전도자의 길이 뭐그리 어려우냐구요 아닙니다.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지배를 받았던 사람들은 자신과 환경을 지배할 수 있었읍니다.

우리가 승리를 하느냐 못하느냐는 하는 문제는 우리들이 그리스도께 완전한 지배를 받느냐 그렇치 못하느냐에 달려 있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 왜 우리들이 전도자 사도 바울이 간 행로를 되새기고 있는 것입니까 왜 우리가 그때의 일을 지금 다시 둘러 보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모두 다 전도자가 되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사도 바울처럼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전도하실 분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그분을 위하여 바울처럼 달리시길 바랍니다.

그래서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들을 통하여 여러 분들에게도 전도의 열매가 혹 10배 혹은 30배 혹은 100배의 많은 결실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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