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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은 나무에 봄은 없다 (요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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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는 모든 나무가 다 죽은 것처럼 보인다. 죽은 나무와 산 나무가 다 같아 보이는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봄에 나타난다. 산 나무에서만 싹이 트고 꽃이 핀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싹이 나고 꽃이 피었기에 살아 있는 되는 것인가, 아니면 살아있는 나무였기에 싹이 나고 꽃이 핀 것인가 물론 후자이다. 봄에 싹이 나고 안 나고, 꽃이 피고 안 피는 것은 나무의 책임이 아니다. 나무로서는 죽어 있기에 싹이 안 나고 꽃이 안 피는 것이요, 살아있기에 싹이 나고 꽃이 피는 것이다.
나무가 살아 있는 것을 전제로 한 다음에야 봄에 싹이 나고 꽃도 피는 것이다. 나무가 죽어 있다면 계절에 관계없이 싹은 나지 않는다.
구원에 있어 우리는 이 문제를 잘 정리하여야 한다. 구원의 확신, 구원의 감격이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살아있기에 반응하는 것인가 이것이 잘 정리되지 않으면 매우 큰 혼동을 일으키게 된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
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
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1-3)”
중생은 거듭남을 말한다. 그것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출생을 자기가 하는 사람은 없다. 출생에 관한 한 우리에게는 전혀 조건이 없다. 예수님께서 거듭난다는 것을 ‘출생’에 비유한 점은 매우 중요하다. 즉 구원은 우리 입장에서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구원 그 자체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생명이 있기에 반응하는 것이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
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생명을 주는 것과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두 가지 중 전자는 싹트고 꽃을 피울 수 있는 근본적인 조건으로서의 생명이다. 후자의 생명은 꽃피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 둘의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산 나무는 생명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기초로 하여 생명의 풍성함을 마음껏 드러내는 것이다. 죽은 나무는 생명 그 자체가 없으니 그것을 기초로 풍성함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대부분 우리 나라 신자들의 신앙에 있어서의 결점은 너무 생명에만 집착한 나머지 그 생명을 근거로 한 풍성함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 나라 신자들은 싹이 나고 무성한 것이 아니라 장작으로 쓰여졌다. 장작으로 쓰는 나무는 산 나무나 죽은 나무의 구별이 없다. 나무의 굵기만 굵으면 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인식들,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문제에 대하여 결심하고 선택하는 것 자체가 이미 생명이 주어졌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다. 성경은 늘 우리가 죽었던 자들이었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느날 우리들에게 싹이 나고 꽃이 핀다. 우리가 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죽었던 자리에서 살아온 자리로 온 것에 대하여는 우리가 무엇을 했거나 하는 조건을 제시한 적이 없다. 생명을 주었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일 뿐이다.
둘째로 생각할 것은 봄이 한 나무에 있어 필요한 전체의 계절은 아니라는 것이다. 봄이 한 나무에 필요한 출발점일지언정 한 나무에 필요한 것은 결국 열매를 맺게 하는 가을일 것이다.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봄은 나무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계절이다. 그러나 봄이 나무에게 필요한 전체의 계절은 아닌 것이다.
봄에 피는 개나리와 진달래는 아름답다. 신자에게 있어 중생이라는 감정은 얼었던 대지를 뚫고 나오는 새싹같이, 죽었던 곳에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는 감동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나리에 불과한 시절이다.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면 봄의 감정은 묻혀 버리고 만다. 그 감동이 약화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감동을 묻히게 할 만큼 그 이후의 감동이 압도적이고 더 풍성하다는 말이다. 아마 계절 중에 가장 놀라운 계절이 있다면 그것은 여름일 것이다. 생명이 가장 힘을 낼 수 있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가을이 되면 모든 벌레들의 소리가 작아진다. 모든 것이 여름의 그 힘찬 움직임을 늦춘다. 그러나 가을에는 모든 생명력이 결실을 맺는다. 그러나 모든 생명력이 힘을 자랑하는 여름과 원숙한 익음의 경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모두 각각 있어야 할 자리에 가 있는 것이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 가장 아픈 점은 바로 물질주의이다.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신자가 의외로 많다. 봄에 피어난 장미가 5월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거기서 더 이상 나가기를 두려워 하고 있다.
봄에 나무에 싹이 나고 꽃이 피는 것은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또 생명 자체가 있기 때문에 여름에 무성하고 가을에 수확을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결과가 자신의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자만한다는 것이다. 본인 스스로 싹을 나게 하고 꽃을 피게 하는 것처럼 착각을 하여 ‘나는 어떤 꽃을 피우겠다, 어떤 싹을 내겠다’ 싸우기 시작하면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이다.
신앙생활에 있어 제일 먼저 확인해야 될 것은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어떤 영광을 받으시는가에 대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장에 필요한 열을 받고, 비료를 받는 것은 다 동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일한 꽃이 피고, 동일한 열매를 맺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꽃이 피고, 다른 열매가 맺힌다. 이것을 획일화하면 안된다.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그것의 필요성을 공감하며 도와주며 그 일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동일시하려고 하면 비교가 생기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사명이 없어져서 결국 그 사람은 신자로서의 성장을 막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 이 땅에 이루시고자 하는 일을 못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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