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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마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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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송영을 굳이 그리스도께서 직접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할 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권위가 있는 마태복음의 사본들에는 이 송영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의 관념 연합을 통해 이 문구는 주기도문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세대들이 평소의 기도에서 사용해온 이 문구를 삭제한다면 이를 존증하는 사람들은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물론, 이 송영은 결론으로 적합하며, 주기도문 전체를 종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이 기도가 “악”에 대한 기도로 끝난다면 차겁고 우울한 느낌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느낌이나 관념에 적합하냐 적합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이것이 본문 비평상 정당한 것이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증거를 존중한다면 어쩔 수 없이 이 송영이 여기에 위치할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구는 괄호 안에 들어있습니다.

어떻게 하여 이 송영이 들어오게 되었는가하는 문제는 만족스럽게 답할 수 가 있습니다. 시편을 영창할 때 각 시의 끝 부분에서 송영(Gloria)을 반복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듯이, 주기도문이 공적 예배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도 끝에 송영을 붙이는 것이 자연적인 관습으로 굳어졌던 것입니다.

이 송영은 원래 복음서의 난외에 기록되었다가 점차 본문 속으로 들어오게 되고 일단 본문 속으로 들어오자 자연스럽게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리스도께서 이 송영을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를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문구가 우리의 기도에는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한 자리를 차지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어떤 일정한 형식을 주신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본보기를 주셨다고 생각할찐대, 이 기도의 정신과 부합되는 어떤 부가어를 붙이는 것도 잘못은 아닙니다.

일견하기에는 이 부가어가 없을 경우 주기도문은 불완전한 것처럼 보입니다. 주기도문의 사랑이 깃든 소원. 겸손한 의뢰심, 회개, 정결해지기를 바라는 갈망 등은 있으나 모든 진정한 기도의 한 요소가 되는 희열이 넘치는 찬양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송영을 부가한 하나의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찬양과 기쁨의 부재는 단지 외견상의 현상이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기도문의 첫 절은 가장 고상한 형태의 찬양과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송영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이 송영은 이 기도가 앞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기도에 아무것도 추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이 송영은 전반부에 나온 내용이 끝에서 반복된데 불과합니다. 그리고 송영의 개념은 비록 고상하고 응장하지만 “우리 아버지”라는 개념보다는 수준이 낮습니다. 우리는 이 송영이 하나님에 관해 덜 찬양적이고, 덜 영적이고 덜 특유한 기독교 사상을 전달해 주는 것으로서 주기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좀 지나친 말일수도 있으나 우리는 이 송영에서 신에 대한 가장 고상한 수준의 찬양에서 보다 낯은 양상의 찬양으로 떨어지는 어떤 변화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란 찬양은 응장하지만 이것들이 주기도문의 전반부에서 울리는 고도의 찬양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정당히 말하자면, 역시 이 송영은 주기도문의 구성 요소가 아닙니다. 송영은 두 가지 사항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앞의 모든 간구들이 영혼 속에서 일으키는,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명상입니다. 이런 점에서 송영은 주기도문에 대한 교회의 메아리라 하겠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기도에서 가지는 확신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송영은 소망의 근거를 찾는 명상의 발언이며, 하나님을 고수하고자 애쓰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사항들을 살펴봅시다.

 1. 이 송영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 문구의 맨 앞에 있는 접속사 호티는 여기서 ‘왜냐하면(이는)...때문이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구는 문자적으로 ‘이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전반부에 나오는 나라와 뜻과 거룩히 여김에 상응합니다. 순서는 같지 않지만 내용은 동일합니다.

(l) ‘나라가 당신의 것이옵니다’.

지상만물, 지상 인간들의 모든 운명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습니다. 전반부에서 이 기도는 세상이 그렇게 되기를 구했습니다(“나라이 임하옵시며”).

그리고 여기서 이미 그렇게 되었다고 우리는 선언하고 있습니다. 물론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았으나 지금 여기서도 하나님이 권세를 가지고 통치하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이 확신이 우리 기독교와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볼 때 우리가 이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주변 환경은 나라가 인간들의 것이라고, 혹은 맹목적 운명, 우연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악한 마음은 나라가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암시하기도 합니다. 사탄은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니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이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사와 멀리 떨어져 계신 것으로 생각하기 쉽고, 여러 국 가와 그들의 통치자들 및 정치의 장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 니다.

-우리는 술수와 무력과 악행이 통치하는 것을 보게됩니다.

-우리는 열국들이 사회가 인간을 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기원되었다는 개념과 너무나 거리가 먼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불신앙적 범죄와 비열한 음모의 기나긴 자국들을 목격하며, 여기 저기 에서 어떤 영웅적인 희생 행위로부터 새어나오는 신적 섬광을 봅니다.

-우리는 통치자와 결탁하여 이권을 챙기고 백성은 도탄에 빠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믿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의 통치가 어디로부터 유래했는지 알아야 하며, 지금 여기 지상에서도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2) ‘권세가 당신의 것이옵니다’.

“권세”에 해당하는 뒤나미스는 ‘능력, 힘, 세력’을 뜻하며, 육체적 일이든, 정신적 일이든, 군사적 일이든, 정치적 일이든 간에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 어떤 사람 혹은 어떤 것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능력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뒤나미스은 그의 특성이며(수4:24; 렘16:2l),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한다막14:62; 마26:64). 모든 권세와 능력은 하나님께 종속하는 것이다(엡1:20; 벧전3:22).

하나님은 단순히 지배권만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전세계와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상존적 에너지의 장(field 입니다.

모든 힘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은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고 심오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온갖 변화, 물리적 변화와 기타 모든 변화의 원인이십니다.

힘은 현존적 하나님의 의복입니다. 인간들 중에 존재하는 모든 권력과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will)는 창조적인 말씀입니다.

(3) ‘영광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영광”에 해당하는 헬라어 독사는 ‘믿다, 생각하다, (...인것) 같다, (...으로) 보인다’를 뜻하는 동사 도게오에서 유래했으며, 그 기본 의미는 ‘생각하는 것, 의견, 견해’입니다. 그래서 독사는 ‘기대, 견해, 의견, 명망, 명성, 칭찬, 찬양, 영예, 광휘, 광채, 영광’ 등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영광’을 의미합니다.

독사는 성경에서 사람에게 표하는 ‘경의, 영예’의 뜻으로는 매우 드물게 사용되지만 하나님께 바치거나 드리는 ‘영광, 영예’의 뜻으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이 독사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하나님께 속한 특성을 말하며, 그의 인격의 빛나는 현현, 그의 영화로운 자기 계시를 뜻합니다(참조, S. Aalen).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성취되는데서 오는 찬양입니다. 이것이 모든 창조와 현현(Manifestation)의 목표입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성경의 사상입니다.

이것이 지극히 냉혈적이고 잔인한 교리로 전락할 수도 있고, 지극히 복된 교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우리의 개념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신(god)은 어떤 능한 마귀입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 우리...아버지"로 부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사상은 참으로 복된 것입니다. 만일 주기도문이 "우리의 아버지"를 말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목표가 그의 영광에 있다는 사상은 그를 이기적인 폭군으로 만들고 말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임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사랑에 대한 계시, 그의 부성에 대한 계시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하신다고 할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성품을 실상 그대로 알리시기 위해 모든 것을 행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를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 송영에서 우리는 놀라운 확신을 가집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당신의 것이읍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떠한 것을 상실하고, 어떤 일을 당하였든, 우리가 앞으로 그 어떤 불세례와 무기 또는 원칙의 싸움을 치르어야 하든, 어떠한 손실과 슬픔의 충격이 우리의 마음을 때리든, 우리 나라 또는 우리 민족이 어떤 미지의 바다를 횡단해야 하든, 하나님은 영원히 존재하시며, 언제나 우리의 아버지로 계시고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폭풍우와 구름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해와 별들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최고의 닻을 버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흥수 위에 좌정해 계십니다”.

그리고 칠흑같은 밤의 흑암 속에서도 우리가 피곤에 지친 눈을 치켜 뜨노라면 하나님이 폭풍우를 건너 우리에게 다가 오는 것을 볼 것이며, 큰 놀이 잠잠해지면서 하나님이 갈 길을 내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에 파도가 자는 것을 목도할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당신의 것이 옵니다’. 그렇다면 세계와 우리는 바른 길로 인도함을 받을 것이며, 안전하게 보존될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하고 선한 것이 통치할 것입니다. 연약한 대의(대의)가 승리할 것이며, 거짓된 명성은 모두 아침 안개처럼 사라질 것이고 인간의 행복을 위한 정직한 욕구와 노력이 영원한 영예를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온갖 악에도 불구하고 꺼질 수 없는 큰 소망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뜻으로 맞서는 용기, 끝없는 인내와 끝없는 자비가 우리에게 맞는 옷이며, 우리 왕의 제복입니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우리 형제들을 모든 악에서 구원할 것이며, 그의 전능한 사랑으로써 자신의 우주적 왕국을 세울 것이고, 자기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그 영광은 자신의 모든 자녀를 사랑하는 영광, 그들에게 사랑을 받는 영광이 될 것입니다.

 2. 이 송영이 이 기도의 끝에 위치하는 사실에서 얻는 교훈을 생각해 봅시다.

이 송영은 우리의 확신의 근거가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움직일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스스로 움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돌리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우리의 확신은 저 밑으로 깊이 내려가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반석 위에 서 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서 거기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 막는 피난처를 얻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을 바라봅니다. 그의 성품은 언제나 동일하며, 모든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모형이며 예언 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신이 자기의 이유이며 동기이며 목표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이라는 터위에 세울 때, 물밑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설 수 있으며, 환난의 소용돌이치는 바다 속에서도 우리는 그 밑바닥을 밟고 확고히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송영을 끝맺는 “아멘”이 쓸데없이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의 아멘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의미는 물론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멘은 소원의 최후 피력일 뿐만 아니라 기대와 확신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소원뿐만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신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때, 그것에서 아무런 기대도 없이 허공으로 날아다닐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것에 대한 응답의 확신이 없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응답을 분간할 미래의 표지를 보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어떤 그리스의 궁수상을 보면 손을 펼치고 입술을 벌린채 눈으로 날아가는 화살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역시 그러해야 합니다. 기도의 화살이 표적이 맞을 때까지 우리의 눈은 이를 주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으리라고 믿을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멘을 주기도문의 모든 간구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아멘은 하나의 예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기도문 속의 모든 간구가 성취될 것이라는 조용한 확신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 모든 간구가 세상을 위해, 우리를 위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 기도가 응답될 것인지의 여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송영이 종결부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모든 기도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감사의 명상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 듯이 주기도문은 명상으로 시작하여 간구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모든 기도가 출발점에서 끝나야 합니다. 주기도문은 움직임이 원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장 높은 하늘에서 술발하여 땅으로 내려온 다음 다시 위로 이끌려 을라가 출 발 지점인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안식합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 보좌 앞의 힘센 영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응시하는 동안 얼굴을 가리고 있다가 지상으로 날아내려가 인간의 슬픔을 위로해 주고 인간의 마음을 만족케 해 준 다음 나래를 펼치고 처음의 자리로 다시 날아 올라가 날개로 얼굴을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지상에 축복을 가져오며 음료수 등 여러가지 용도로 봉사하는 대지를 흐르는 강물들은 원래 하늘로부터 비를 통해 옵니다. 맑은 물결이 흙탕으로 붉어지고 많은 오물로 흐려지지만 그 사명이 완수되면 대양으로 내려가서 안식하다가 거기서 다시 하늘로 이끌려 올라가 구름이 됩니다.

우리의 기도도 역시 그러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명상에서 출발하여 다시 그 지점으로 되돌 아가야 합니다.

나아가 이 송영이 주기도문의 최후의 말이라는 점에서,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를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빵과 용서, 도움과 구원을 위한 기도는 우리가 이 세상이라는 광야에 있을 때만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함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 하나님 뜻의 성취등을 위한 기도도 그 내용들이 실현된 이후에는 쓸모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이 송영의 목소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영원히 을라갈 것입니다. 천둥처럼 강하게 울려 퍼질 마지막 새노래, 많은 하프 소리처럼 달콤하게 울리는 그 새노래는 지상의 이 찬양을 확대, 심화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않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계5:l3).

이제 이 주기도문의 강해를 끝마치겠습니다. 이 강해는 주로 알렉산더 맥클라렌의 주기도문 강해를 대본으로 하여 국내외 주기도문 연구 서적을 참조, 필자가 크게 깨달은 바를 표현한 것입니다.

주기도문에 대해 내가 보고 읽고 듣고 깨달은 것을 말하면서도 나의 표현이 너무나 빈약함을 느끼며, 이 신적 기도의 분명하고 심오한 내용을 충분히 들어다 보지 못했음을 절감합니다.

그러나 아무쪼록 본 강해를 통해 독자 제위께서 내가 얻은 만큼이라도 도움을 얻어 이 기도가 얼마나 포괄적이고 웅대한 것인가를 크게 깨닫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미 서두에서 밝혔지만 여기에서 다시 힘 주어 말하건대, 이 기도 속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인간의 관계, 기독교 신학과 윤리 및 기독교적 사회와 정치의 초석들이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지극히 사소한 요망 사항을 위한 도움과, 매일의 의무를 위한 빛이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죽음의 시간과 심판의 날을 위한 힘과 용기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마음이 지닌 영원한 깊이에 대한 계시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형제들을 위한 머나 먼 미래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다 사용할 수 없을만큼 이 기도는 넓고 광대합니다. 시대마다 자신들의 새로운 임무와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교훈을 이 간단한 몇마디 말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천국에서 쓸모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기도를 바르게 사용하기 위해 그 의미를 완전하게 궁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기도를 해석하십니다.

그리고 말없는 무수한 갈망, 수 많은 비통한 흐느낌, 수 많은 울부짖음, 모든 시대의 영원한 귀감이 될 주기도문과는 전혀 달라보이는 수 많은 무지한 욕망을 주님은 받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려지는 모든 기도에 영감을 주시고 응답하십니다. 가장 빈약한 기도라도 진심으로 아버지를 구하는 마음에서 나온다면, 그리고 죄를 자백하며 구원과 순결을 구한다면, 나아가 자기 아들을 보내신 하늘 아버지의 큰 사랑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기를 소원한다면 그 기도를 주님은 ‘이렇게’드리는 기도로 인정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하라.-아멘-기독교 동호회 메뉴 오른쪽 아래의 www아이콘을 클릭, 미래사회교회연구소의 연구실로 들어오시면 브니엘 성경연구소 홈페지를 방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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