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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판의 세 가지 징조 (겔 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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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세 가지 징조.

하나님께서 에스겔로 하여금 그의 조국이었던 유다 왕국에 하나님의 채찍과 심판이 임박했다는 징조를 그 백성에게 나타내게 하십니다. 그 세 가지 징 조는 무엇일까요 첫째 징조는, 1-3절에 나타납니다.

이 징조는 박석의 징조입니다. 박석이란 진흙 벽돌을 말합니다.

둘째 징조는, 4-8절에 나타납니다.

이 징조는 예언자가 눕는 징조입니다. 드러눕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징조는, 9-17절에 나타납니다.

이 징조는 부정한 떡의 징조입니다.

본문에는 이렇게 세 가지 징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서론 우리는 일기(日氣)를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이 일기 예측 에 관한 귀중한 교훈을 우리에게 한 가지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 기를 청하니(1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시요, 메시야인지 시험해 보기 위해 예수께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 을 보시면, 예수께서 다음과 같은 흥미있는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수 없느냐(2,3절).

우리는 일상 생활의 편리와 유익을 위해서 날씨를 예측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징조를 가지고 내일은 날씨가 맑겠다 혹은 흐리겠다, 그러므 로 내가 행동을 어떻게 해야겠다고 예측합니다. 우리는 또한 일기 예보를 통해서 내일의 나의 행동을 예견하고 목표와 계획을 수립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행동에 대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너희들의 삶의 유익과 편의를 위해서 이런 일기 예보에 민감하게 대응하면서도, 이 시대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이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일상적 삶의 편리를 위해서는 하늘을 바라보며 징조를 찾는 사람들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역사의 방향은 가늠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주 께서 개탄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을 보십시오. 마태복음 24장은 흔히 종말 장이라고 일컫 는 말세의 예언과 관련된 중요한 성경의 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1절 이하를 보십시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 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 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 리라(1,2절).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멸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주께서는 그 시대 그 시대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때, 도무 지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 때 역사 속에 간섭하셔서 그 시대와 문 화를 심판하십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 당시의 예루살렘 도성에 이 하나님 의 심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시고 작정된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예루살 렘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임박한 멸망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이것은 그 당시에 있었던 그 시대의 심판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가신 바로 그 세기 가 지나가기 전에,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의 티투스(Titus) 장군의 군대에 의해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성전은 파괴되 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4장은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이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 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24장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 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 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성전 멸망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듣고 어느 때 그런 일 이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만 묻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에는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시 는 주님에게 그러면 세상의 마지막에는 어떤 징조가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받으시고 주께서는 비단 예루살렘의 멸망뿐 아니라 세상 끝의 멸망의 징조를,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말세의 징조들을 계속되는 말씀에서 보 여주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마지막 날의 징조들을 분 별할 수 있습니다.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여기서 징조라는 낱말을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주께서는 이렇게 심판을 집행하실 때, 그것이 한 시대의 심판이든 역사의 심판이든 항상 그 심판 이전에 주님을 바라보고 구하고 찾는 사람들에게 그 심판이 임박했다는 징조를 먼저 말씀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심판을 어 떤 방법으로든지 먼저 자신의 종들에게 보여주시고 그 다음에 비로소 심판 을 집행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2장 6절을 보십시오.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 (靈)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우리는 계시 하면 어쩐지 우리가 근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신기하고 이 상한 어떤 하나님의 비밀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 계시란 숨기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계시 』란 말 그대로 보여준다, 뚜껑을 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 님의 비밀을 수수께끼처럼 하나님의 심중에만 묻어두고 계시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인간과 더불어 교통하시는 하나님은 한 시대의 심판이 가까울 때 혹은 역사의 마지막이 가까울 때, 자신의 종들을 통해서 이런 저런 방법으 로 심판이 임박해 있다는 징조 혹은 표적들을 언제나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에스겔 시대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에스겔의 사랑하는 조국 유 다의 최후가 임박했음을 아시는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이 조국의 끝날에 대 비하도록 사랑하는 종 에스겔을 통해서 심판의 징조를 보여주십니다. 그것 이 본문 에스겔서 4장의 내용입니다.

 2. 본문 연구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세 가지 징조를 보여줍니다.

첫째/박석의 징조(1-3절) 1절을 보십시오.

너 인자야 박석(薄石)을 가져다가 네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고.

박석이란 부드러운 진흙덩이를 말합니다. 고대 바벨론이나 중동 지방에서는 이 부드러운 진흙을 가져다가 그것을 잘 구워서 그 위에 글씨를 쓰거나 그 림을 그리는 등 석판이나 화판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많은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서 충분히 입증된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모래 성을 쌓아 거기에다가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바로 그러한 장면 을 연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그 성읍을 에워싸되 운제(雲梯)를 세우고 토둔(土屯)을 쌓고 진을 치고 공성퇴(功城鎚)를 둘러 세우고(2절).

예루살렘 성이 포위된 모습을 그리라는 것입니다. 운제란 성을 공격할 때 쓰는 도구입니다. 토둔이란 사격을 할 때 총을 받치는 일종의 받침 입니다. 공성퇴란 돌로 만들어진, 일종의 총을 쏘는 기계입니다. 즉, 이런 것들은 다 예루살렘 성을 공격할 때 적군들이 사용할 무기에 대한 상 징적인 그림들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또 전철(煎鐵)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성을 삼고 성을 향하 여 에워싸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전철이란 철로 만들어진 냄비와 비슷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 들이 쓰던 도구 가운데서 가장 강력하고 잘 만들어진 생활도구 중의 하나였 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군대가 강력한 무기를 사용할 것임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뚫고 나가기 힘든 강력한 적진의 포위를 암시합니다.

깨닫지 못하는 유다 백성들에게 그들의 조국이 이렇게 멸망하리라는 것을 시청각적으로 교훈하기 위해서, 에스겔이 진흙 판(박석)을 가져다가 그 백 성들 앞에서 예루살렘 성을 그리고 이 성이 포위당한 모습과 적군들의 공격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적군의 공성퇴의 높이는 예루살렘 성읍과 같은 높이였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활을 쏘기 시작하면 이 성은 쉽게 함락될 것 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조국 유다 민족의 최후의 장면을 예고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못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종종 이방 민족을 사용하셔 서 그들을 징계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징계하 실 때 사용하시는 최악의 징계 방법이 이방 백성을 사용하여 징계하시는 것 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에 적용해 보면 신자가 불신자에게 창 피를 당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신자들에 의해서 노략당하고 조 롱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는 것을 연상해 보십시오. 그때 우리는 얼마나 소 리를 지릅니까 하나님, 어찌하여 저 믿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내가 이 수모와 어려움 을 당하게 하십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심각한 죄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종종 그런 방법으로 처리하셨습니다.

사사 시대의 역사를 보십시오. 그 백성들이 잘못할 때마다 이방 민족 가운 데 한 민족을 끌어다가 그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심으로 징계하셔서, 그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빗나가 있는가를 똑똑히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둘째/예언자가 눕는 징조(4-8절) 4절을 보십시오.

너는 또 좌편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당하되 네 눕는 날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이 예언자가 드러눕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좀 깨달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시청각 시대 속에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로서는 얼마나 실감나는 이야기입 니까 사람들은 귀로 들려오는 멧세지만 가지고 깨닫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 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들이 어린아이들을 가르칠 때 말로만으로는 아이들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림을 사용하여 설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백 성들에게 인상 깊은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징조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시청각 교육의 선구자가 되십니다.

그러면 이 구절에서 좌편으로 누우라는 것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당하되 네 눕는 날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지니 라 내가 그들의 범죄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 곧 삼백구십 일이 니라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고(4,5절).

그러니까 에스겔은 좌편으로 누워서 삼백구십 일을 지내야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삼백구십 일 동안 계속 좌편으로 누워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루에 일정한 시간, 아마도 하나님이 일정 한 시간을 정해 주셨을 것입니다.

하여튼 백성들이 광장에 모이는 시간에 나와서 일정한 시간 동안 좌편으로 눕는 일을 하루에 한 번씩 아마도 삼백구십 일 동안 계속했을 것이라고 생 각합니다. 그러니까 1년이 넘는 기간입니다. 1년 이상을 이렇게 백성들 앞 에서 드러눕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이상한 행동입니까 일정한 시간에 예언 자가 나와서 그것도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누워 있다가 들어가고 그 이 튿날 또 나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삼백구십 일 동안 했습니다.

이 예언자의 이상한 행동이 얼마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겠습니까 저것 좀 봐! 이상한 행동을 한다.

지금 예언자는 입술로 자유롭게 말씀을 전할 수 있는 특권까지도 박탈당한 상태입니다. 생각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선지자가 벙어리가 되도록 하 셔서 패역한 백성에게 말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대신 이런 이상한 방법 으로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달하도록 요구받고 있는 이 장면을 주목해서 보 십시오.

에스겔이 좌편으로 눕는 것은 북왕국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예언임을 보여 주기 위한 행동입니다. 그 다음에 우편으로 드러눕게 되면 남쪽을 향하는 데, 그것은 유다 왕국을 향한 예언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그 수가 차거든 너는 우편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사십 일로 정하였나니 일 일이 일 년이니라(6절).

북 이스라엘에 대한 교훈을 먼저 전달한 다음에 이제 유다를 향한 교훈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루는 1년을 의미했는데, 이것은 북방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삼 백구십 년이라는 특정한 기간 동안 하나님의 다루심이 있을 것을 예언한 것 이고, 유다 왕국에는 사십 년 동안 하나님의 다루심이 있을 것을 예언한 것 입니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성경학자들 사이에는 두 가지로 의견이 갈라집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해석할 경우에 많은 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삼백 구십에 사십을 더하면 사백삼십이 됩니다. 이 사백삼십 년은 이스라엘 백성 이 애굽 땅에서 고난받았던 기간입니다. 이렇게 애굽 땅에서 고난받았던 사 백삼십 년이라는 기간 동안 또 고난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사백삼십 년간 고난을 받은 것과 같은 그러한 고난의 때가, 재앙의 때가 임박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백삼십이라는 수만 들어도 애굽에서 고난받았던 기간을 연상 합니다. 그와 같은 고난의 때가, 그와 같은 고통의 때가 다시 찾아오고 있 다는 사실에 관한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지 모른다고 해석합 니다. 물론, 이것은 상징적인 해석을 할 경우입니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우선 이스라엘 북왕국의 경우, 그곳의 왕이었던 여로보암 이후 삼백구십 년은 주전 586년인데, 그때는 바로 예루살렘이 함락되던 때입니다. 그러므 로 문자적인 해석은 남북 왕국이 분열된 이후 북방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 님 앞에 범죄한 기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남 유다는 북 이스라엘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왕들도 좋은 왕들이 많았 고 또 종교적으로도 오랫동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북 방 이스라엘이 먼저 망합니다. 남 유다는 훨씬 더 오래 견딥니다. 그런데 특별히 왕국의 말기 40년이 유다 왕국에게 있어서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유다 왕국의 마지막 사십 년간의 범죄를 인상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선지자의 행동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취하든 상징적으로 취하든, 사실 이 멧세지 를 전달하는 데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 다음 7절을 보십시오.

너는 또 에워싼 예루살렘을 향하여 팔을 벗어메고 예언하라.

왜 이렇게 팔을 걷으라고 하셨을까요 팔을 벗어메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의 전투 자세라고 합니다. 싸울 때의 자세입니다. 우리도 일할 때에는 옷을 걷어붙이지만 싸울 때에도 그렇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기들에게 다 가오고 있는 이 운명에 도전하기 위해서 팔을 벗어메고 몸부림치는 장면을 묘사하기 위한 표현일지 모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줄로 너를 동이리니 네가 에워싸는 날이 맞도록 문을 이리저리 돌리 지 못하리라(8절).

이는 자기들에게 찾아오고 있는 운명에 도전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일 수 없는 부동의 운명, 부자유의 운명을 가리킵니 다. 이것이 그들의 조국인 남방 유다 왕국 앞에 기다리고 있는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징조를 통하여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예언하셨습니다.

첫번째는 진흙 벽돌, 박석의 징조였습니다. 두번째는 예언자가 눕는 징조를 통해서 사랑하는 조국 남방 유다 왕국에 임박해 오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그들의 죄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네 눕는 날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지니(4절).

다시 말하면 지금 그 백성에게 찾아오고 있는 이 고통과 이 형벌은 그들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은 분명히 전달하셨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의 백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행동을 그대로 간 과하시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여기 이 멧 세지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더 엄숙한 교훈을 깨닫습 니다.

셋째/부정한 떡의 징조(9-17절)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또 가사라대 내가 열국으로 쫓아 흩을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 서 이와 같이 부정한 떡을 먹으리라 하시기로.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포위될 때 그 백성들이 경험해야 할 식량의 핍절 혹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포로 시대까지 계속되 는 식량과 식수의 핍절로 인한 심각한 고통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9절 이하를 보십시오.

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떡을 만들어 네 모로 눕는 날수 곧 삼백구십 일에 먹되 너는 식물을 달아서 하루 이십 세겔 중(重)씩 때를 따라 먹고 물도 힌 육분 일씩 되어서 때를 따라 마시라(9-11절).

우리는 이십 세겔 중이 얼마나 되는지 감(感)이 안 잡힙니다. 쉽게 말 하면 이십 세겔 중이란 1인분 식량의 삼분의 일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평소 먹던 것의 삼분의 일로 줄어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먹긴 먹되, 음식의 모든 것이 삼분의 일로 줄어든다면 그 고통이 어떠할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내가 지금까지 먹던 모든 것을 삼분의 일로 줄여야 하는 고통이 한 순간에 갑자기 엄습합니다. 양식뿐 아닙니다. 물도 줄어듭 니다. 힌 육분의 일이라는 양은 불과 삼홉 미만을 의미합니다. 마실 물도 부족하고 식량도 부족한 핍절의 고통이 그 백성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 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그것을 보리떡처럼 만들어 먹되 그들의 목전에서 인분(人糞) 불을 피워 구울지니라(12절).

그것을 보리떡처럼 만들어 먹는데, 인분 불에다가 구워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연료도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인분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구워 먹어야 합니다. 얼마나 처절한 상황입니까 이 처절한 상 황이 그들에게 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열국으로 쫓아 흩을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 서 이와 같이 부정한 떡을 먹으리라 하시기로(13절).

인분으로 불을 피워 구워서 만든 떡이기 때문에 부정한 떡이라는 것입 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가로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나는 영혼을 더럽힌 일이 없었나이다 어 려서부터 지금까지 스스로 죽은 것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을 먹지 아니하였 고 가증한 고기를 입에 넣지 아니하였나이다(14절).

이 부정한 떡을 먹으라니까 그것으로 자신을 더럽힐 수 없다고 에스겔이 호 소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의 규례대로 음식을 가려 먹는 것이 그 들의 육체와 영혼이 깨끗하게 되는 원천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렇 게 말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것을 저에게 먹으라고 하십니까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쇠똥으로 인분을 대신하기를 허하노니 너는 그것으로 떡을 구울지니라(15절).

에스겔의 호소에 하나님은 인분 대신 쇠똥을 사용하라고 허락하십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 백성이 경겁(驚怯)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민답(悶畓) 중에 물을 되어 마시다 가 떡과 물이 결핍하여 피차에 민답하여 하며 그 죄악 중에서 쇠패하리라 (16,17절).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여 말할 수 없는 참담한 고통과 비극을 경험하게 될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들이 경겁 중에서 별 수 없이 그 떡을 먹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장면에서 굉장히 인상적인 멧세지가 하나 있습니다. 16 절 말씀입니다.

... 내가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 .

그들이 지금까지 무엇을 의뢰하고 살았습니까 양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은 그들이 믿고 있었던 그 양식을 끊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신뢰하며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 고, 때때로 그 하나님을 망각한 채 양식에만 우리 인생을 거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지금 유다 왕국이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 원인이 부분적으로는 거기에도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망각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식을 오히려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양식은 돈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 다. 그러나 그 돈은 누구로부터 옵니까 내가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고 돈 을 벌 수 있는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그 모든 능력이 누구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건강을 가지고 하나님 이 내게 주신 지능을 가지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환경을 통해서 내가 열심 히 일하면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의 원천 되시는 하나님을 망각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물질에 치중한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3. 결론 한 민족에 대한 심판을 통해서 오늘을 살고 있는 당신과 저에게 하나님은 어떤 교훈을 하십니까 우리에게도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심판이 오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삶이 바르게 되도록, 우리가 엉망으로 살지 않도록, 맛 을 잃은 소금처럼 살아가지 않도록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시대의 징조에 눈을 뜨십시오. 천지를 분별하면서 내 삶에 대해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의 책망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없다 면, 시대를 분별하는 눈이 없다면, 오늘날의 우리도 하나님께 얻어맞은 다 음에야 비로소 회개하고 돌아오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본문의 말씀이 다시 한번 우리의 삶 속에 거룩하심으로 다가오시사, 주님과 의 바른 관계 속에서 오늘을 살도록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되기를 바 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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