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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양식을 위한 기도 (마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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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되는 두개의 간구,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와 “오늘날 우리에게 주옵소서”는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전자는 지극히 넓고 후자는 좁습니다. 전자는 순종적인 세계에 대한 큰 기대에 차 있고 후자는 개인적인 필수품에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전체 구조 속에서 이 폭이 좁은 지상적 간구가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또 이 간구가 서 있는 위치도 그에 못지 않은 교훈을 줍니다.
주기도문의 전반부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서 최우선 순위를 점유해야 할 욕망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과 관련하여 행해야 하는 것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들입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전반부는 인간 영흔과 삶의 성화 과정의 법칙처럼 내부에서 시작해 외부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출발하여 땅이 하늘처럼 될 수 있도록 그 하늘을 땅으로 끌어내립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은 상호일치하여 하나의 음악을 만듭니다.
이어 주기도문의 후반부에서는 개인적인 요망 사항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요망사항들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정당하게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신 이름에 대한 경외와 명상만이 기도의 전부는 아닙니다. 물론 이것이 기도에서 수위를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말입니다. 자아 몰입적 명상의 표현만이 기도의 전부는 아닙이다.
기도는 어떤 본성적 욕구와 의존심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주적 욕망의 발언, 자아를 정복한 어떤 존재의 표현이 기도의 전부는 아닙니다. 인간의 완전성은 욕망을 전혀 가지지 않는데 있거나 의지와 소원이 없는 어떤 상태로 몰입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완전하게 소유하여 전혀 결핍이 없는 상태, 여기에 인간의 완전성이 있는 것은 더 더구나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심없는 사랑, 즉 다른 사물이나 일에는 전혀 관심없고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상태(이러한 감정은 불가능하다)가 완전한 기도는 아닙니다. 기도에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의존을 인식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기도는 우리의 여러가지 소원에 대한 표현입니다. 기도는 자기의 뜻을 하나님께 복종 내지 순응시킨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솔직하게 아뢰는 행위입니다. 기도는 경배입니다. 기도는 또한 요구입니다.
우리는 한편으로 “우리 아버지여”를 외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주옵소서”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간청에는, 인간 이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선물을 줄줄알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 전 후반부 양편이 어떤 식의 하나의 완전체를 이루고 있는지도 주목해 볼만합니다. 전반부는 하늘 아버지의 위대성에 대한 명상에서 출발하였으나, 후반부는 양식을 위한 부르짖음에서 출발하여 생의 온갖 재난을 통과하면서 서서이 을라갑니다.
결핍으로부터 시작하여 침해, 인간의 무자비와 증오로 건너가 다시 인격적 연약성과 세상의 유흑, 죄악의 재난과 슬픔의 재난으로 나아가고 울부짖음과 눈물이 지난 후에는 원점에 이르러 하늘과 하나님께로 올라갑니다.
마지막 송영은 한바퀴 원을 그리면서 서두의 부름, “우리 아버지여”로 되돌아읍니다.
기도문 전체는 인간의 온갖 슬픔과 곤핍으로 법람하는 흥수를 통과하면서 지친길을 비행하다가 노아의 비둘기처럼 그 비상속에서 탄생한 평화를 물고 하나님 안의 본향으로 되돌아와 처음의 출발지점에서 멈춥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의 삶을 시작하는 자들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확신과 찬양으로 마칠 것입니다.

1. 먼저 “일용할 양식”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일용할 양식” 이란 문구에 대하여 설명하고, 그 나머지는 해당 항목에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일용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우시오스(헬1967)는 신약성경에서 여기와 누가복음 11:3에 나오며, 그밖의 유일한 예는 파피루스에 1회 나올 뿐입니다.

이 용어는 (l) 에피에나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면, ‘정규적인, 매일의, 적절한’이란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있습니다.

(2) 헤 에피우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면 ‘다음날을 위한’이나 ‘다가오는 날을 위한’이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오리겐은 이 단어를 에피 텐 우시안(생존을 위해 필요한)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오리겐의 모국어가 헬라어였으므로, 그의 해석이 지니고 있는 언어학적 가능성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잠언 30:8의 말씀으로 확증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6:4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날에 필요한 분량만큼의 만나만을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삶에 필요한 양식을 위해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4 이 단어는 아마도 레요마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중의 의미를 가졌으며, 이 이중적인 의미를 헬라어로 나타낼 경우 두개의 용어 즉 에피우시오스(그날 필요한)와 세메론(오늘을 위한)을 결합시켜야만 표현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그 날에 필요한 양식을 위한 매일의 기도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며, 더나아가서 이미 시작되었으며 언젠가는 완성될 것으로 예상되는 새 시대에 사는 제자들에게 장기간의 양식을 위한 기도는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을 것입니다. 이 견해도 그럴듯 합니다.
“양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토스(헬740)는 ‘빵’이나 ‘빵덩이’를 뜻하며, 빵은 분말가루로 구운 것으로 여러 종류가 있으며, 신약 시대의 성경상의 지역들에서 주식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한글 개역판에서 이 단어는 ‘떡, 양식’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일용할 양식”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해석의 역사를 살펴보면
(l) 성만찬으로 해석했습니다. 주기도는 처음부터 성만찬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는 성만찬 때 영적 양식을 받기를 구한 기도라고 해석했습니다.
(2) 영적 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요6:35, 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유대인의 해석을 따라 천국의 양식(떡)으로 해석했습니다. 누가복음 14:15에 보면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그의 택한 백성을 모아 놓고 큰 잔치를 베풀 것이며, 이 간구는 이 메시야 잔치에 참여시켜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5 육신의 필요한 양식으로 해석했습니다. 칼빈과 루터는 육적 양식으로 보았습니다. 루터는 이 일용할 양식을 광범위하게 육신 생활이나 생명 유지에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일용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우시오스란 말의 의미가 (4)번의 의미로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예수님께서 주로 육신에 필요한 것을 생각하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것을 지지하는 한 파피루스 단편이 발견되 었습니다.
이 파피루스 단편은 부인들이 물건을 사기 위한 메모지였는데, 어떤 물품에는 이 에피우시오스란 말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날에 필요한 식료품을 사기위해 그 품목을 적어 두는 메모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간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것. 특별히 그 날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십시오’ 하는 아주 솔직한 기도입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뒤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가 뒤따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곧 자신의 먹는 양식이었던 주님을 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영적 양식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양식에 대한 간구가 뒤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서입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생각하고 계시며, 우리에게 맨 처음으로 필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생존을 계속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고 생명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생존해 있다는 바로 이 사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간구는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것을 취급하고 있으며, 우리 주님은 이것으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살아있으니까 영혼을 중요시 여기며, 육적 생명이 있으니까 영적 생명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일 육적 생명을 무시해버린다면 영적 생명이나 신령한 것을 염려할 소지가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적 존재(생명)는 이 세상에서 영적 임무수행과 행복에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육신에 필요한 것을 먼저 구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양식이 오로지 영적인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 양식이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 필요한 것들을 포함한다하더라도 주로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주기도문의 여러 간구들 중에서 이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우리의 영적 필요와 관련이 있습니다.

2. 이 간구는 우리의 생존을 위한 양식에 관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1) 이 간구는 첫째로 정당한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될 수 있는 것들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여기서 세상적인 요망사항을 무시하고 인간의 물질적 본성에 뿌리를 둔 욕망을 죄로 간주하는 환상적인 신령주의를 배격합니다.
이 기도는 일상적인 선물들의 가치에 관하여 우리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놀라운 증언입니다.
-여기에 일용품에 대한 요구가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고자 하는 그 위대한 욕망과 나란히 서 있습니다.
-여기에 금생의 삶을 평가절하하는 잘못된 금욕주의는 없습니다,
-여기에 금생의 축복에 대한 욕망과 그것을 정당하게 누리는 것을 죄악적인 것으로 여겨서 경멸하는 병적인 어조는 없습니다.
물질적 요구와 세상적 이득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은 이교도적이고 비기독교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위한 간구가 천국에 관한 기도 뒤에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적 요구와 세상적 이득을 경멸하고 거기에 무관심하는 것도 역시 이교도적이요 비기독교적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위한 기도가 이 여러 기도 제목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를 바르게 이해하면, 육체속에 있는 영을 망각 하는 잘못된 감각주의와 영을 감싸고 있는 육체를 망각하는 잘못된 영성주의, 이 두 가지가 가져오는 해악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마음 속에서 진리를 갈망하도록 만드신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도 갈망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양자를 모두 갈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에 위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되 오로지 그것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먼저 구할 뿐입니다.
(2) 더 나아가 이 간구는 건전한 자연적 행위를 정당화할 뿐만아니라 지상적 사물들에 대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당연히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성결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응만을 위해 기도 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 말속에도 역시 큰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적 요망 사항보다 영흔의 건강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금생의 온갖 일들에 대한 욕구에 ‘만일 주의 뜻이라면’이라는 전제 조건을 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본문이 말하는보다 낮은 축복을 위해서도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우리가 갈망하는 모든 것,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요구는 기도로 전환될 수 있는 그런 욕구여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히 구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러한 것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하나님께 나아가서 구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실제로 좋아하지도 않는 것들을 위해 듣기 좋은 소리로 입술 만을 가지고 유창하게 기도하는 것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온갖 소원을 기도로 아뢰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감히 기도로 옮기지 못하는 욕망의 소유와 실제적 소원이 아닌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상 생활에 필요한 모든 분야를 우리가 간구에 포함시키도록 함시다. 우리 자신의 영혼에 진실합시다.
누구든지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3) 더 나아가서 이 기도는 하나님을 일용한 양식을 주시는 자로 인식하는 행위입니다.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관련하여 성경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신다는 사실을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한다”라고 노래했습니다(시104:27-28).
하나님께서 어린 까마귀가 울부짖을 때 그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산 위에 풀잎을 자라게 하십니다. 만물의 눈이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시편 104편의 한 아름다운 구절에서는 밤중에 숲 속에서 먹이를 찾아 헤메는 사자의 포호소리 조차도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으로 여겼습니다-“젊은 사자가 그 잡을 것을 쫓아 부르짖으며 그 식물을 하나님께 구한다”라고 했습니다.
루터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하찮은 참새를 먹이기 위해서도 프랑스 왕의 수입 금액으로 살 수 있는 양보다 더 많은 것들을 지출하십니다’.
이 우주적 선물은 그의 운명이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자들에게 참으로 적용됩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도 해당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먹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시111:5).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실 때 하나님의 손길(제 l원인)은 제 2원인 아래 감추어져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2원인이 우리 눈 앞에서 그 진실을 가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의 생명이십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자연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우리는 그 힘의 질서 정연한 작용을 자연법칙이라고 부릅니다. 그 힘은 하나님의 서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원대로 각 씨앗에 몸을 주지 않으신다면 성장도 수확도 없을 것입니다. 양식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신 결과입니다.
바울은 루가오니야의 거친 농부들에게 “하나님이...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양식의 분배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우리 자신의 노력과 기타 수단등(의 제 2원인)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기계의 작동은 그것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연결되어 있는 동력으로 인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상에 나타나는 결과는 하나님이 그 원인입니다.
양식에 의한 양육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어떤 자연적 실체든지 그 고유한 속성들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의 작용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존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탱하고 유지하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계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때, 우리의 건강, 우리의 생존이 그의 손안에 있음을 적어도 하루에 한번 이상 상기하는 것은 좋은 일이며, 자주 상기할수록 그만큼 더 좋습니다. 양식과 필요한 모든 것은 그로부터 옵니다.
창세기 28:20절을 보면 야곱은 하나님을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신는 분으로 인식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라고 기도했습니다.
죠지 물러는 2,000명이 넘는 고아원과 성경 연구회를 운영하면서 단 한 번도 사람에게 꾼다거나 구걸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고 ‘날마다(오늘)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93세를 살면서 5만번 이상 크고 작은 기도의 웅답을 받았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이 간구는 실제로 배고픈 현실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박하게 느껴지는 기도가 되지만 재물을 창고에 가득 쌓아둔 사람들에게는 실감이 없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부자니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신다면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밤 네 영흔을 내가 취하겠다. 그러면 네 재물이 뉘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의 창고에 식료품이 가득 쌓여 있을지라도, 당신이 은행에 수천 수억을 저축해 놓았을지라도, 당신의 재산이 전국에 산재해 있을지라도 그것이 당신의 일용할 양식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이 분배해 주셔야 당신은 일용할 양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으로 철저히 신뢰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간구는 이상과 같은 모든 사실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을 가능한 한 일상 생활로부터 멀리 떼어 놓으려는 현대인들의 경향과는 너무나 큰 대조를 이룹니다.
(4) 이 기도는 양식을 얻기 위한 우리들의 노동을 신성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간접적 방법 곧 노동은 크나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일용할 양식을 위한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기 위해서 우리는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노동의 책임을 느끼고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노동을 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공중에 새를 보라 백합화와 들풀을 보라 아무도 먹여주지 아니하고 아무도 입혀주지 아니해도 먹으며 입지 않는가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합니다. 그래서 노동의 책임과 중요성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새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새들이 얼마나 부지런히 먹이를 구하러 다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들풀과 백합화도 땅에 뿌리를 박고 부지런히 영양분을 취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잠6:6)은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말했습니다.
노동은 기도입니다. 가끔 이 말은 땀이 기도를 대신할 수 있다는 의미로 생각하지만 이 표현이 그런 뜻은 아닙니다.
이 문구는 활동적 삶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성별될 수 있다는 의미이며,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빵을 얻기 위한 우리의 온갖 노력이 기도처럼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는 고귀한 것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한 다음, 밖에 나가서는 기도시에 감히 말하지 못한 떳떳하지 못한 수단을 동원해 그 양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재물을 모을 수 있겠습니까
-나의 속임수를 축복하소서!
-나의 교활한 행위를 축복하소서,
-야곱이 그 아비를 속여서 축복을 가로챈 것 같이 축복해 주소서.
이런 기도는 옳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계비를 벌기 위해 행하는 일을 놓고 감히 기도할 수 없다면 우리는 오히려 죽음을 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하여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얻기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5) 더 나아가서 이 기도는 우리가 받은 축복에 대해 늘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고백입니다.
시인은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노래했습니다(시136:26).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이 점에서 전혀 잘못이 없습니까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망각하는 행위야 말로 얼마나 이교도적입니까
온갖 기쁨 가운데서 늘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 가짐, 매일 매일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자세에서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자동차를 처음 사서 운전할 때는 하나님 오늘도 무사히...하며, 간절히 기도하지만 몇달이 지나면 운전대를 잡자 말자 기도없이 차를 몹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심을 먼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운전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자비를 얻는다면 날마다 찬양의 노래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침마다 주의 사랑이 우리를 깨웁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온종일 우리를 따라다니며 은혜를 베풉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식탁을 펼칠 때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교훈
또는 기쁨을 주실 때마다 그 사랑이 매일 새롭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감사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의식도 그의 주
시는 선물처럼 끊임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3. 이 간구는 나만의 양식이 아닌 우리 모두워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에는 형제들과의 연합하는 사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옵시고”라는 말은 자기와 마찬가지로 이웃에게도 주시기를 구하는 이웃에 대한 책임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인간 삶의 법칙으로 묘사합니다. 빵을 위한 투쟁은 동료들에 대한 형제애적 관심의 크나큰 적이라는 것입니다. 장사나 상업은 전쟁이라고 흔히들 말함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한 사람의 소득은 다른 사람의 손실이라는 관념에서 출발하여 재산은 약탈물이라고 까지 선언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읍시고” 이 한절의 기도문은 확실히 우리에게 보다 훌륭한 길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배의 한 구석에 맺혀 있은 염기어린 물방울을 위해 서로 싸우는 완악한 사람들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모두가 부족함이 전혀 없는 하나님의 식탁에 둘러 않아 위대하신 아버지 앞에 함께 무릎 꿇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식탁 아래 누운 개까지도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이 기도를 통해 우리가 양식을 위한 간구에서 남과 일체감을 가지고 공동전선을 펴야할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전제하는 일체성을 깨닫는 자는 자기의 소유물이 남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먹고 살 양식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모두 하나입니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삶에 필요한 양식을 구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자라는 점에서 하나입니다.
이와같이 한 공동체의 일원인 자가 양손에 자기 몫을 가득히 움켜쥐고 한쪽 구석으로 가서 홀로 야금 야금 먹는다는 것이 과연 바른 일이겠습니까
그러한 행위는 좀 과한 말같지만 늑대들의 잔치에서나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한발로 먹이를 밟고 눈을 이리 저리 굴리면서 도적을 경계합니다.
이것은 한 형제인 인간들이 할 짓이 못됩니다.
단지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입니다. 이 간구는 각자가 자신을 위해라는 원칙보다 더 나은 생활 양식이 얼마든지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남부에 있는 칼라하리 사막지방의 사람들은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합니다. 이러한 환대는 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규범이었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사막에서는 누구든지 나누어야만 합니다.
사막에서는 어떤 사람도 자기를 위해서만 음식을 보관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은 공동의 재산으로 간주됩니다. 그들에게는 나의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일용할 양식 입니다. 그 양식은 저장해 두는 것도 아니고 절약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내 일의 필요는 공급을 신뢰함으로써 오늘 지금 먹고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방식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삶의 태도는 분별이 없고 사려 깊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삶의 태도야 말로 하나님 나라의 핵심적인 기도에 가까운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이 자기 가족 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단지 ‘나’와 ‘나의 것’만이 배가 고프지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것을 저장하기 보다는 함께 앉아 그것을 나누어 먹는 그러한 생활 규칙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병이어를 생각해 봅시다.
오늘의 세계는 어떤 사람은 풍요를 누리고 어떤 사람은 굶어 죽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이 사막의 사람들과 같이 자기의 가진 것, 심지어 송아지까지 남과 나눌 수 있다면 식품은 남아돌아 갈 것입니다. 누가 우리와 함께 먹어야 할 것을, 나누어야 할 것을 숨기고 있습니까
유숩(Yussouf)는 나그네를 환대하여 '이 장막은 나의 것이야 그러나 그보다 하나님의 것이지, 들어와 평안하게 있으라. 그대여 자유로이 내 모든 저장품에 참예하라‘고 말했습니다.
초대 교회는 제 재믈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 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인간은 좌우지간 전체 공동체의 알원으로서, 개인의 소유물에 대한 점유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각자는 자신의 소유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재산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마음대로 처분할만한 힘이 있으며, 법적으로 그러한 권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에서
-당신은 그것을 가지고 있으나 그럼에도 당신은 소유주가 아닙니다. 단지 청지기일 뿐입니다.
-당신이 재산을 가지고 있으나 자신의 것으로 점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위탁받아 보관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한 가족, 한 커다란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서 그 재산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남에게 베풀기 위해서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상호의 애정의 끈을 공고히 하고 위대한 수여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끈을 굳게하기 위해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간구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가지는 공동체적 유대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선을 원치 않습니다. 다만 공의를 원할 뿐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외침이 주님의 귓전에 울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떠난 그것이 부정한 수단에 의해 감취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자비와 베품의 자세를 가난한 자와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논리입니다.
모든 부유한 자들이여, 그대는 가난한 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이 빚을 갚지 않고 떼먹을 작정입니까 그들로부터 입은 은혜를 갚지 않으시렵니까
이러한 관점에서 고운 옷을 입고 호화로이 연락하던 부자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음식을 삼았던 나사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대조적 현상은 무수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와 같은 빈부와 격차가 기독교 문명, 상업의 원래 목적과 상치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격차를 좁힐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저 적색 공산주의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소유물을 하나님께 귀속시키는 진정한 공동체의 삶을 체득하여 실천에 옮기고 자신의 소유물이 공동체의 복지를 위한 것임을 깊은 깨닫는데 있습니다.
로버트 번즈는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이 있으나
먹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주기도의 훈련
또 어떤 사람은 먹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나
먹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저에게는 먹을 것도 주시고
먹을 수 있게도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 기도보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
님, 그들도 저에게와 같이 먹을 것을 주시고 또 먹을 수 있게 하여
주읍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벌에게서 교훈을 받습니다. 벌은 6개월이라는 짧은 생명을 가지고도 열심히 일합니다.
벌통에 있는 잘 먹지 못하는 유층이 있으면 동료 벌이 꿀을 먹었다가 다시 토해서 이 유층에게 먹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먹이가 한정되어 있고 먹이를 더 구해 오지 못하면, 지금 남아있는 먹이를 똑같이 나누어 먹다가 함께 죽는다고 합니다.
또한 벌통 안에 적이 침입하면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적에게 침을 쏘고 자신은 죽는 것입니다.
어느면에서 벌은 인간보다 더 흘륭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진 것을 함께 나눕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한 한 가족입니다. 형은 잘번다고 하여 호화호식하고 아우는 못번다고 하여 먹을 것도 얻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모두 회개합시다.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기도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4. 이 간구는 오늘의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오늘날”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메론은 ‘오늘, 이날’을 뜻하며, 또는 ‘지금 시대를 나타내는 오늘날’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오늘날”이라고 번역할지라도 “오늘날”보다 ‘오늘’ 필요한 것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3의 주기도문에는 “날마다”토 카드 헤메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것을 얻지 못하여 불평, 원망할 때에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만나는 매일 매일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매일 아침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날에 필요한 양의 만나를 거두도록 하였습니다. 욕심많은 사람들이 내일 몫을 걷어 놓았더니 썩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
매일내리고 매일 거두어 먹은 것이 만나입니다. 만일 만나가 내리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매일 만나를 주셔야만, 그리고 사람들이 거두어야만 먹고 살 수 있도록 함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선물은 광야의 이스라엘이 매일 아침마다 새로이 만나를 거두어 드렸듯이 현재의 긴급사태에 따라서 전달됩니다.
(l) 우리가 여기서 기억할 것은 우리의 궁핍을 채우시는 이 방법의 아름다움과 복됨입니다.
-그 방법은 매 순간마다 그 특별한 성격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새로운 선물이 그 안에서 가지는 영광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매 순간마다 나타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행위와 매순간마다 출현하는 하나님의 빛나는 임재의 표식이 모두 합쳐서 무수한 점들로 밝고도 선명한 긴 선을 만들어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생활에 매우 가까이 접근함을 실감케하여 줍니다.
-그것은 매 순간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된 존재임을 느낄 필요와 기회를 우리에게 주시고, 매먼 우리의 궁핍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께 우리를 나아오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이끌어 줍니다.
매 순간처럼 매일 그 새로운 의무와 새로운 요망사항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옵니다. 어제의 음식은 오늘 우리를 부양하지 못합니다. 오늘의 힘은 오늘 하나님과 그의 새로운 공급으로 말미암아 임해야 합니다.
따라서 삶의 단조로움은 어느정도 사라지고 매일 신선한 활기와 새로운 소망이 우리에게도 찾아듭니다. 밤의 잠이라는 고마운 벽이 어제의 임무와 피곤을 감싼채 어제와 오늘 사이에 서 있습니다.
신선한 소망이 하나님을 새로이 의지하는 마음과 더불어 아침마다 우리를 깨우고 우리는 일어나 미지의 시간들을 바라보며,“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립니다.
(2) 그 다음 우리가 배우는 것은 미리 앞질러 미래사를 걱정함으로써 이 지혜로운 하나님의 법을 파기하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사전에 미래사를 계획하고 고려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개미나 꿀벌보다 못한 피조물이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에 어떤 확실성이 없는 사람,
-변화무쌍한 현상태와 조화될 수 있는 어떤 지속성에 대한 합리적 예견이 없는 사람은 지성적 혹은 도덕적 성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사람이 빠지기 쉬운 앞일을 걱정하며, 염려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걱정은 무익하고 해로운 것으로써 우리로부터 힘을 빼앗고 우리의 지혜나 우리의 안전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이러한 걱정은 하나님의 공급법칙에 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할 때 자신 정량만 받습니다. 이를 더 일찍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지점에 올 때 비로소 길이 열립니다. 그때까지는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빌딩의 자동문을 보십시오. 그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서면 자동적으로 열립니다.
◎주기도의 훈련
-하나님은 우리의 행로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우리의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물자 배급소를 돌보고 계시며, 우리가 물자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도록 우리의 수고를 덜어 주십니다.-이것이 하나님의 공급법칙입니다.
우리는 지나친 호기심을 가지고 불확실한 어떤 재난을 미리 그려보거나 흔자 멋대로 상상하여 걱정을 만들어 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염려는 오늘에 국한시키고 내일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맙시다.
-우리의 하나님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내 일도 우리를 돌보실 것입니다.
-각 장소마다 무지개가 있듯이 매일 매일 밝은 빛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메마른 땅으로 인도받는다면(그렇다고 염려할 것 없습니다), 거기에서도 샘이 열릴 것 입니다. 우리가 주리기 전에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해 먹을 것을 주실 것입니다. 빵이 주어지고 물이 확실히 공급될 것입니다. 내일도 오늘과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6:2

5.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자만이 자기 몫을 거두어 먹고서 오늘 자기를 먹이셨던 분이 내 일도 먹이실 것을 믿으며, 편안한 마음으로 밤 잠자리에 들어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일은 그대로 놓아두시오. 손으로 그것을 걷어 을려 앞일을 들여다 보려고 하지 마시오.
-지상적 수단에 의해 미래를 확실히 보장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염려하지 마시오.
-오직 현재의 축복을 밝은 소망의 모체로 삼으시오.
◎주기도의 훈련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임을 명심하시오.
-그리고 자비로운 한계가 있는 하나님의 공급법칙을 수용하시오.
-당신의 욕망에도 그러한 한계를 두고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그러면 형통하실 것입니다.

5. 이 간구는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만큼 양식을 구해야 합니까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은 우리가 앞에서 이 간구의 의미를 살펴본바 ‘오늘’이라는 ‘그날에 필요한 양식’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생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양식을 의미합니다.
이와같은 간구는 우리의 욕망을 생활에 필요한 것에 국한시켜야할 것을 지적하여 줍니다. 우리가 가지기를 바라야 할 것,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권리가 있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 뿐입니다.-더도 안되고 덜도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간구는 우리 모든 사람을 하나의 평등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도록 그에게 내어 맡기는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도가 왕의 입에서 나올 경우와, 거지의 입에서 나올 경우, 양자는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그러나 확실히 이 기도는 무절제한 욕망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생필품만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후하게 주시며 삶이 아름답게 장식되기를 원하십니다. 빵 이외의 것은 대개가 삶을 우아하고 세련되게 만들어 줍니다. 나는 그러한 것들에 대한 반대 운동을 전개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호화로운 생활 양식과 이 기도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사치스런 생활이 우아한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시적인 소비 지출이 문화생활의 증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허영심이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의 양식을 구하는 것, 즉 우리의 욕구가 실제적 요망사항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이 기도를 올바르게 시행한다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나타나는 죄악적인 사치 행위는 종말을 고할 것이며 부를 축적하는 여러 가지 의심스러운 수단들도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검소한 생활과 드높은 사상은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의 부요는 소유물의 풍부에 있지 않고 나의 요구의 근소에 있습니다.
-사람이 원하는 것이 적을수록 신에게 더 가까워집니다.
이러한 말들이 진리 외에 매우 필요로 하는 것을 한 기준을 삼는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교훈이 되겠습니까
우리 각자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의 범위를 실상 이상으로 매우
크게 잡기가 쉽습니다.
당신이 젊든 늙든, 필요하다면 가난한 편도 택할 수 있는 용기
를 가지시오. 모든 사람이 다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
신의 욕망을 참으로 필요한 것에 국한시킬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아굴은 잠언 30:8에서 “오직 필요한 양식을 내게 먹이시읍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6:6이하에서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는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라”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3:5에서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고”(눅l2:l5),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보다 승한” 것입니다(시37:l6).
우리는 만나의 교훈에서 내일을 위해 더 많이 가지려고 남겨둔 부분은 벌레가 생기고 냄세가 난 것입니다. 얼마나 자주 재물이 사라지며, 그것을 얻기 보다 지키는데 더욱 힘이 들며, 때문에 그것은 소유자를 괴롭히고 그의 성품을 부패시키거나 자녀를 파멸시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6:9에서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을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윤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이 간구를 앞의 더욱 고상한 기도들 뒤에 놓으셨다는 것과 이 간구를 잠깐 언급하고 곧 바로 보다 고상한 영흔의 요구사항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 유의합시다.
우리는 과연 제반 욕구 가운데서 물질적 욕망을 부차적인 위치에 놓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매일 매일은 복된 나날이 될것 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선물로 풍성할 것이며, 우리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참된 양식이신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여 도와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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