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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기도 (마 06:12)

첨부 1


주기도문의 후반부에 나오는 여러 간구의 순서를 보면 우리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며, 매일의 용서도 필요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용서의 필요성도 양식의 필요성처럼 보편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빵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만드셨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용서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기도에 대한 응답도 양식을 구하는 기도에 대한 응답만큼 확실합니다.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용서를 보류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소서’와 ‘용서하소서’는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욕구를 반영해 줍니다.
양식 곧 육신의 필수품 공급을 위한 기도가 다른 기도들에 선행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요망사항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성에 있어서 뒤에 나오는 기도들보다 낮습니다. 용서는 영적 본성의 제일 욕구입니다.
이 간구에는 죄 용서를 받는 4가지 단계를 암시해 줍니다.
-첫째로, 우리 인간은 죄인이며 죄를 계속 범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근거로하여 죄인에게 용서를 베푸십니다.
-셋째로, 죄인이 하나님께 죄를 고백, 회개함으로 용서를 받습니다.
-네째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은 형제를 용서할 수있고 용서합니다.
이 간구는 이 네째 단계의 사람,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그의 자녀들이 날마다 짓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I. 이 간구는 죄를 의식하고 통회하는 기도입니다.
“죄지은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옵헤일레테스는 ‘빚진자, 의무를 지닌자, 자기가 상해를 가한 자에게 배상을 하지 않은 자’를 의미한다. 여기서 복수가 사용되어 문자적으로 ‘빚진자들’을 의미한다.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읍헤일레마는 ‘빚, 빚진 것’ 또는 ‘의무’를 뜻합니다. 여기서 복수가 사용되어 문자적으로 ‘빚들, 빚진 것들’을 의미한다.
이 두 단어는 ‘빚지다, 의무가 있다(흑은 마땅히 해야한다), 은혜를 입다’를 뜻하는 헬라어 옵헤일로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단어들은 금전적인 빚만이 아니라 사람이나 국법에 대한 도덕적 의도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신적 규례를 위반하거나 신(神)의 은혜에 대한 댓가로 반드시 드려야 할 감사를 드리지 않을 때에도 그 사람은 빚진 자가 되어 제의적 참회나 제의 행위를 해야할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빚진자’는 ‘죄를 지은 자’, ‘빚진 것’은 ‘죄, 죄짓는 것’ 가리킬 수 있다.
‘빚’과 ‘의무’는 한 단어입니다. ‘빚을 지다’와 ‘마땅히 해야 한다’도 한 단어입니다. 의무는 마땅히 해야할 일입니다. 의무는 남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여러 의무를 안고 있습니다. 양심이 속에서 우리가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속삭입니다. 이행하지 않은 의무는 빚입니다. 그 빚은 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하나님께 대한 것, 이웃에 대한 것, 자신에 대한 것으로 3분합니다.
(I) 우리 자신에 대해-우리는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 주어진 기회를 선용하는데 실패함으로 자신에게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의 영흔을 위해 신중하게 행동하고 자제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죄를 과중시킵니다. 우리의 기질, 혀, 정열을 조정하지 못하여 죄에 빠집니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이행하지 않는 의무, 악한 기질, 게으른 손, 밭고랑을 잡초가 가득하게 내버려두는 태만한 살림살이, 활시위를 최대한도로 잡아 당기지 아니하고, 거울을 밝게 닦아두지 않은 삶등에 대해 우리를 고소합니다.
(2) 우리 이웃에 대해-우리가 이웃에 대해 짓는 죄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사랑과 도움을 주고 모든 선한 일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시기, 증오, 앙심 등 나쁜 감정을 품을 때가 많습니다. 불친절하고 진실치 못한 말들을 발하며, 우리가 행한 일 때문에 남들이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양심은 이웃에 대한 의무 불이행, 불친절, 봉사의 기회를 무시하는 일, 기타 많은 과실 등을 놓고 우리를 고소합니다.
(3) 하나님에 대해-우리가 하나님께 짓고 있는 죄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전생명과 사랑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하여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나 우리는 이 형언할 수 없는 소증한 선물들을 어떻게 취급해왔습니까 우리의 신앙 양심은 이러한 의무 불이행에 대해 고발합니다.
우리는 이와같이 우리의 의무를 3분하여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피상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신이나 남에게 진 빚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빚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 없고...주를 위하여 살고”롬l4:7, 8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주를 위해 열심히 살았습니까 우리가 주를 위해 열심히 살았으면 내 자신과 이웃에 대한 의무도 보다 더 잘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양심이 이에 대하여 우리를 고소하고 있지 않고 있다면 우리가 무지하거나 양심이 무디어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하늘의 제왕께서는 자기 백성에 대한 범죄를 자신에 대한 범죄로 간주하십니다. 우리의 과실을 하나님에 대한 죄로 돌리는 보다 엄중한 사상은 일면 불합리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상 지극히 복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무거운 빚을 제거할 수 있는 권한을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는 하늘의 채권주의 손에 두기 때문입니다.
죄의식은 육체적 배고픔처럼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러한 죄의식에 대해 잠들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대는 이러한 죄의식을 일깨우는 일이 몹시 시급합니다. 오늘날은 유전이나 환경에 관한 학설이나 죄를 견책하기보다는 동정심으로 대하려는 성향등으로 인해서 죄의식을 무시하는 자연적 경향이 오히려 강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죄의식을 병적인 불건전한 현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실패나 불완전함은 인정하면서도 죄를 별로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은 구원자에 대한 필요성도 느낄 수 없으며,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회개나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아무리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도 이 죄많은 세상에 사는한 범죄로부터 완전히 떠나 있을 수 없습니다. 무슨 죄를 짓든 죄를 짓지 않고 지나는 날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매일 내가 범한 죄를 의식하고 용서 를 구하십니까
우리가 우리의 죄를 의식하고 통회하는 이 기도를 할 때, 우리 죄 때문에 당하신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기억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죄 때문에 수치를 당하시고, 멸시를 받고 배척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2. 이 간구는 죄의 고백과 용서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사하여 주옵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압헤스는 ‘내어 보내다, 버려두다, 가게하다, 탕감(면제)하다, 용서(사면)하다’ 둥을 뜻하는 압히에미의 과거 명령형입니다. 따라서 이 문구는 문자적으로 ‘우리의 빚을 탕감하여 주옵소서’입니다. 과거형은 완전한 탕감을 나타냅니다.
자신에 대해, 이웃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짓는 죄는 빚입니다. 빚이란 당연히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갚지 않으면 언제나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빚을 갚지 않고서는 해결하는 방법이 없습니다. 혼자 뉘우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결단을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공로를 세운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빚은 빚진 그분에게 갚아야만 면제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적이지 주관적인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지금은 빚지고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지만 언제가는 독촉받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갚기 전에는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갚지 못하면 누군가가 대신이라도 갚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용서해야 하고 용서받아야 하는 당연한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곽선희의 산상수훈 강해 참조).
우리는 종종 용서를 구합니다. 그떻다면 우리가 구하는 용서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까 진장한 용서는 쌍방에 어떻게 나타납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용서할 때,
(l) 용서하는 편에서,
-마음의 소원함이 사라지고 온갖 회의의 구름이 마음에서 걷힙니다.
-그의 행동과 느낌이 어떤 층격적 상처나 불쾌한 일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변
합니다
-그는 용서받는 자에게 그 기분을 생각해서 더욱 부드럽고 상냥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2) 용서받는 편에서,
-그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더욱 깊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는 용서받기 전보다 용서받은 후에 자기의 잘못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됩니
다.
-그는 참으로 참회의 느낌을 가지고 겸손해집니다.
(3) 그리하여 쌍방은,
-서로 사랑을 보이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교제의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같이 용서를 하고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참으로 참회의 느낌이 없고, 죄의식의 느낌이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용서를 받았다는 확실한 느낌이 없다는 점에서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형제에게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한다면서 스스로 속고 있지 않는지, 오히려 우리 죄를 우리 자신에게 고백하고 우리 스스로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수없이 동일한 잘못된 행위로 떨어지고 우리의 기독교적 순종이 약화된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 자기 죄를 용서함으로 살고 진정한 용서를 받음으로 살지 않는 사실에서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에 의해 받는 용서는 결코 죄와
인연을 끊어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심판하시며 사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형제에게 지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을 때 예외의 경우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 형제 앞에서도 죄를 고백해야 함니다. 이렇게 고백할 때에 우리는 형제 앞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용서의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형제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이 청준의 작품 벌레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의 아들 알암이를 둔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 사랑하는 아들이 유괴를 당해 피살되었습니다. 아들이 피살체로 발견이 되고 그것을 목도한 알암이 어머니는 극한적인 심정에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한 알암이 어머니에게 이웃집에 사는 김집사 아주머니가 끈질기게 접근하여 기독교 신앙에 의지하여 살아갈 것을 권고했습니다. 김집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결코 악의없는 접근이요 친절이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알암이 어머니는 그 정성에 감복했던지 마침내 동의하고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진범이 체포되었고, 그 범인이 바로 아들이 다니던 주산학원의 원장 선생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알암이 어머니는 격렬한 증오의 감정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 다시 김집사가 나타나 범인을 증오로 대할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써 대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그러는 김집사의 말에 반발심을 느끼기도 했지만 알암이 어머니는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을 바꿔 먹고 범인을 용서해 주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결국 알암이 어머니는 사형수를 찾아가 용서의 증거를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열려가던 알암이 어머니의 마음은 사형수를 보는 순간 갑자기 꽉 닫히고 말았습니다. 사형수는 처형을 앞두고 예수님을 믿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알암이 어머니가 보기에 너무나 침착하고 뻔뻔스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알암이 어머니는 이에 대해 침착하고 평화스러운 성인같은 모습을 한 범인의 너무나 뻔뻔스러움에 대해 반감을 느끼고 자기보다 먼저 자기가 용서할 필요도 없이 그 범인을 용서해버린 하나님에 대해 분노를 느끼었다고 말하면서, 자기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가더니 이제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아 버렸다고 술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것이 신의 공평한 사랑이라면 자신은 차라리 신의 저주를 택하고 말겠노라고 외치었습니다. 우리는 그 범인의 거동이 그녀를 얼마나 분노케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범인의 처형 소식을 들은 직후 그녀는 자신의 너무나 인간적인 절망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참조, 풀핏목회).
어쨌든 알암이 어머니가 그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었더라면 그의 인생은 그렇게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알암이 어머니는 아직 용서를 할 수 있는 기독교적 사랑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 범인은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는가 라는 강한 의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 범인이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면 그는 용서받기 전보다 더욱 깊이 부끄러워 하고, 더욱 깊이 자기의 잘못을 느끼고, 더욱 겸손한 자세로, 그 피해자에게 용서를 빌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스스로에 의해 용서를 받고 있는지 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더나아가서 생각해봅시다. 아버지가 자기 자녀를 용서한다고 할 때 그것은 단순히 매를 아낀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린 범죄자에게 사랑을 쏟아 붓는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용서도 재판관으로서 보다는 아버지로서 의 용서입니다. 자녀가 용서를 구하며 빌 때, 용서해 주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br>
인간의 용서에 있어서 형벌의 면제는 용서의 한 요소일 뿐이며, 결코 최고 요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더더구나 그렇습니다.
인간들의 경우 죄를 용서받는 다하더라도 용서로 말미암아 지워질 수 없는 죄의 결과(주로 외적 부분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용서받은 자는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그 결과를 회피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흔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을 때, 우리 영흔이 받는 은혜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막힘없는 사랑을 확산하게 됩니다.
-영흔이 거두어 들이는 죄의 결과는 더 이상 형벌이 되지 않고 교육적인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의 표현이 되지 않고 그 용서 받은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 관하여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막대기와 인생의 채쩍으로 징계하려니와...내 은총을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삼상7:14, l5)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확신하게 될 때, 그는 그의 마음에 평화가 넘치는 것을 느낍니다.
-그는 더욱 겸손쌔 집니다.
-그는 더욱 죄를 무서워하게 되고 의무에 더욱 층실하게 됩니다.<br>
-밝은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됨니다.
우리가 용서를 받을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치르신 그 십자가의 희생을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에 근거하여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것이 없습니까<br><br>
-나쁜 성질을 부리지 아니했습니까
-해야할 일을 게을리 하지 아니했습니까
-살림살이를 태만하게 하지 아니했습니까
-열심으로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까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의무를 등한히 하지 아니했습니까
-남을 괴롭히거나 불친절하거나 해하지 아니했습니까
-남을 위한 봉사나 동정의 기회를 무시하지나 아니했습니까
여러 과오에 대하여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 하지는 아니
했습니까
-예배 참석을 잘하는지,
-봉사를 잘하는지,
-십일조를 드리는지,
-전도를 하는지,
-열심히 성경을 보며,
-열심히 기도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잘못한 것이 생각나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주여 내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사소한 일까지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확실히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3. 이 간구에 부과된 놀라운 말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라는 문구를 생각해봅시다.
이 말씀은 불층분한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의 조건내지 분량이 된다는 뜻입니까
언뜻 보기에는 이 부가어가 하나님의 용서에 어떤 한계를 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절망에 빠뜨릴 수도 있습니다.
이 간구에 대한 그릇된 사상이나 실행들이 있습니다.
(1) 어떤 기독교인들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처리되었기 때문에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2) 어떤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성결관(그들은 죄가 완전히 근절되어 무죄하다고 가르치는 성결관) 때문에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올 받은 자나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완전주의자도 이 세상을 통과할 때 죄를 범합니다(참조, 요I3장).
그러므로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우리 뢰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했습니다(요일1:8-10).
(3)어떤 기독교인들은 ‘나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라고 기도합니다.
어느 교수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를 ‘예수님이 예수님에게 죄지은 자인 우리를 용서하신 것같이’라고 이해하고는 ‘나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오’라고 기도한다는 것 입니다. 이것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자기만 용서받겠다는 아주 이기적인 발상입니다.
(4)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남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주기도문으로 기도하지 아니합니다. 혹은 주기도문으로 기도할지라도 입으로는 하지만 마음에서는 삭제해 버럽니다.
이것은 남도 용서하지 않고, 자기도 용서받지 않은 죄인으로 남으려는 행위입니다. 그래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기도할 수 없는 기도문을 가르쳐 주셨겠습니까
그러면 이 문구의 의미를 생각해봅시다.
이 기도문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더욱 위로가 넘치는 그러면서도 엄숙히 경고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간구와 관련된 듯한 용서의 법 3가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형상(성픔)을 따라 서로 용서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용서의 정신이 약화되어 남을 용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특별히 선민 이스라엘에게 서로 용서하라는 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이 그 법을 완전히 시행할 수 없었습니다.
-최후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합으로 말미암아 서로 용서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은혜 안에 있는 인간은 용서의 본 성품을 회복하여 용서의 법을 완전히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용서하라는 명령을 받아 시행합니다.
이 3단계는 이 간구와 관련하여 생각할 때 정도나 차원은 다르지만 남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조건이라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이 단계를 염두에 두고 이 간구를 생각해 봅시다.
(I) 이 기도는 우리 인간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의 반영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의 빛의 희미한 반영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 온유, 인내, 용서 등이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그러한 특질이 내재한다는 점을 얼마든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인간 속에 있는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무엇이든 존경할만한 것, 무엇이든 기릴만한 것, 무엇이든 사랑할만한 것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인간 속에 나타나는 그러한 특질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눈을 지으신 이가 보지 않겠느냐”
“너회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녀에게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천부께서 원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하게 됩니다. 인간이 용서한다면 하나님은 더욱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만일 서로 용서한다면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이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의 본체이신 하나님은 무한히 완전히 우리를 용서할 수 있고 또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 죄를 용
서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2) 어떤 현실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용서 행위는 우리가 용서받
을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율법아래서).
우리는 믿음과 회개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조건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지향될 때 믿음과 회개를 일으키는 인간 내면의 바로 그 성향이, 남에게 지향될 때 용서하는 기질을 낳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무가치성에 대한 깊은 의식이 나로하여금 남에 대해 판대하고 온화한 성향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반쪽으로 나누어 안으로 깊이 통회하면서 밖으로는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베풀어주지는 않으면서도 하나님께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용서를 비는 우리의 기도가 실질적인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동 전체에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남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 기도가 이러한 실제적이지 못하면 응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기도를 신명기 15:1-5과 연결하여 설명해 봅시다.
이 기도는 문자적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매 칠년 끝에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 하니라 무릇 그 이웃에게 꾸어준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찌니 이 해는 여호와의 면제년이라 칭함이라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인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는 것입니다.
이 해방법은 매 7년 끝에 채권자는 채무자를 용서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채권자가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채무자를 용서해야 한다는 법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이 기도는 ‘우리가 토라의 해방법에 따라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탕감)하여 주는 것같이 우리의 빚들도 반드시 용서(탕감)하여 주옵소서’라고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을 적용하면 용서에 대한 강청(눅11:8)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이 신명기의 말씀은 우리의 용서의 범위를 암시하여 줍니다. 신명기에서 “형제”는 이방인과 대립된 의미의 유대인 동족을 뜻하듯이 주기도문에서 우리는 불신자와 대조되는 그리스도인들을 뜻합니다. 곧 신명기의 ‘동족끼리’가 주기도문에서는 ‘우리 끼리’로 새롭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명기는 이 기도가 일차적으로 공동체 내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 즉 우리 믿음의 형제들 사이의 용서행위를 예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이 용서는 믿음의 형제를 중심으로하여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3) 더 나아가서 이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남을 용서해야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용서 행위가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습니까
-우리가 남을 용서해야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말은 우리의 용서 행위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의 이유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는 죄사함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사역이며, 죄용서의 조건은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모든 죄를 원천적으로 용서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의 축복을 향유하는 조건은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를 본받아 시행하는 것입니다(엡4:32).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그리스도와 같이 남을 용서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매일 짓는 죄에 대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계속 체험하면서 의식적으로 향유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여부는 우리가 남을 용서하느냐의 여부에 좌우될 것입니다.
주인에게 빚을 탕감받은 종이 동료종을 만나서 그 멱살을 붙잡고 자기에게 진 빚을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으라고 다구쳤습니다. 이 행동은 자신의 탕감받은 빚을 원점으로 되돌리고 오히려 산더미 같은 빚을 자기에게 쌓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를 거절하겠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안에서, 그리고 그 피를 통해서만 용서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주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알고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깨어지며, 강팍해질 수 없으며 용서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형제에게든지 용서하기를 거부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결코 용서반은 일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해 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의식이 매우 뚜렷해질 것이며 큰 만족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용서의 광선으로 따스해질 때, 가장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남을 온전히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보고 나의 복되신 주님께서 나를 위해 해주신 것을 인식할 때마다 나는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도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할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오 하나님이여, 주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것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나를 용서하여 주읍소서, 내가 구하는 모든 것은 주님께서 이와같은 방식으로 나를 용서하여 주옵소서’하는 것입니다.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같은 정도로 용서하여 주읍소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방식으로’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용서하신 것 같이 나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 마음 속에서 행하신 것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들을 용저하는 것과 같이 나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아뢰십시요.
우리는 이렇게 기도를 함으로써 우리 안에 용서의 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속죄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기도의 내용을 반복하신 사실을 보아서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기도를 끝내고 나서 뒤로 돌아가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회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O.M. LoydJone).
지금으로부터 약 l700년전, 초대교회에서의 일입니다. 크리소스톰이 목회하던 그 교회 신자들은 주기도문을 외우다가 바로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긍휼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살이 그들의 입을 다물게 했던 것입니다.

보물섬이라고 하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스코틀랜드의 작가로 버트 스티븐슨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가정에서 가족들과 예배를 드리던 어느날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습니다. 부인이 놀라 뒤따라 나가서 남편을 붙들고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스티븐슨이 말하기를 ‘오늘은 내가 죄용서해 달라고 주기도문을 드리기가 몹시 괴롭소 마음이 편치가 않소’ 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사례들이 비일비재하면서도 주일마다 또는 수요 예배마다 의젓하게 하나님 앞에 이 기도를 했습니다. 흑은 우리는 그저 앵무새처럼 외워댄 것입니다(욕한음의 ‘무엇을 기도할까’ )
여러분 우리 마음에 용서가 없으면, 우리가 용서할 줄 모르면 우리의 기도는 진짜가 아니며 참된 것이 아니며 효과가 없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용서해야 합니다.
코리 텐 붐(Corrie Boom) 여사는 네덜란드의 유명한 부흥사였습니다. 제 2차 대전 때 그녀와 가족들은 유대인을 집에 숨겨주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독일의 라스부르크 수용소에서 온갖 학대를 받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여사는 독일인에게 용서의 복음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용서의 복음이 선포되었으며 예배가 끝나면 많은 사람들이 여사에게 찾아와 손을 잡고 눈물을 홀리며,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해 감사를 드렸습니다.
어느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한 사람씩 여사의 손에 입맞추며, 혹은 악수를 하며, 여사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감사를 표하는데, 문득 손을 내밀면서 다가서는 한 남자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여사는 마치 심장이 멎고 온 몸이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그 남자는 포로 수용소에서 여사의 옷을 벗기며, 채찍질을 하고 침을 뱉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사의 언니는 그 남자의 손에 많은 고문을 당하고 죽었습니다.
여사는 거기서 받았던 온간 조롱과 고통을 생각할 때 손을 내밀어 그 남자의 손올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여사는 용서를 바라며, 서 있는 그 남자를 생각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영흔의 진통속에서 하나님께 ‘주님, 나는 이사람을 사랑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어요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고는 손을 내밀어 그 독일 간수의 손을 잡는 순간 하늘의 사랑이 자기의 영혼 속으로 파고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사는 후에 ‘그날 자기는 새로이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참으로 깨달았으며, 미움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위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깨닫는 엄청난 환회의 순간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시요. 용서하시요. 여러분은 용서받는 삶, 그리고 용서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다음 기도문을 읽고 우리도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서로 용서합시다. 남을 용서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여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직 당신만이 이 기도대로 살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실 수 있습니다.
남의 잘뭇을 곱씹고 지난날의 응어리를 풀 줄 모르는
용서를 모르는 심령에
어찌 당신의 용서가 이르겠으며 축복이 임하겠습니까
당신의 십자가는 강렬한 빛으로
우리가 희미하게 알고 있던 진리를 밝혀 줍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진 빚이 얼마나 작은지요
우리가 당신비게 진 빚이 얼마나 큰지요!
주님, 우리 영혼 속의 깊은 수렁을 정결케 하옵시고
우리의 응어리를 풀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들과 화목케 하여 주옵시고
우리의 삶이 당신의 평화를 전파하게 하옵소서.
(J. I. 팩커의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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