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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악에 대한 기도 (마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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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의 전반부는 마치 언제나 푸른 창공에 별들이 말없이 빛나는 고요한 하늘과 같고, 후반부는 폭풍에 휩쓸리고, 눈물이 쉴새없이 흐르는 변화와 파란이 많은 지상과도 같습니다.
전반부는 그렇게도 정적이 감도는데 후반부는 그렇게도 재난과 한숨이 가득합니다.
이 후반부의 간구들에는 인류의 암흑 상태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들어있습니다. 굶주림과 죄와 시험, 그리고 한층 더 넓게,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그 비극적인 낱말, 악이 있습니다.
용서와 보호와 구원, 이러한 것들이 있기 위해서는 얼마나 깊은 슬픔이 전제되어 있는가를 보게됩니다.
이 후반부의 간구들은 매 단계마다 우리를 점점 더 깊은 그늘과 흑암속으로 끌고 가는듯 합니다. 그리고 각 간구는 앞으로 나아갈수록 인간 삶의 실존이 지닌 보다 어두운 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이 최후 단계는 인생의 온갖 병패를 내포하는 포괄적인 외침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본문이 하나의 기도인 동시에 하나의 예언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간구에 표현된 소원이 애절할수록 성취의 소망도 그만큼 큰 것입니다.
이 간구는 인간의 어두운 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언가에 대하여, 또는 반대하여 기도할 때 그것은 곧 우리의 자아가 하나님의 뜻에 반한다는 고백이며, 하나님이 그것을 제거해 주시리라는 확신의 표현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우리 아버지여...우리를...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을 우리에게 명하셨다는 사실은 매우 광범한 이 단어에 표함된 모든 악이 제거될 수 있다는 산 소망, 주님이 모든 멍에를 끊고 압제받는 자기 백성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참 소망을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이 이 한 간구 속에 모아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그 불행의 온갖 항목이 희석되거나 소멸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가장 슬픈 저음을 발하는 듯한 이 간구는 실제로 가장 높고 고상한 위치로 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 아래서 벌어지는 온갖 불행에 대한 통곡처럼 울리는 이 간구 자체 속에 승리의 함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가장 감미로운 노래들은
가장 슬픈 사상에 대해 말하는 노래들입니다’.
지극한 희열과 확신이 넘치는 기도는 죄악의 짐을 가장 예리하게 느끼며, 그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세상의 가장 큰 제단에 엎드려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다음 사상들을 살펴봅시다.

1. 이 간구는 악에서 구원을 호소합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문구는 앞 문장과 연결하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하옵소서”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다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라는 접속사로서 ‘그러나(but)’를 의미합니다. NASB, NRSV, KJV, NIV 등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는 6 간구와 대조되는 또 하나의 간구인 7 간구와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두 가지 간구를 한 가지 간구로 생각하기도 한다.
“악”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네로스는 ‘수고하다’를 뜻하는 포네오에서 유래했으며, ‘힘든, 고생스러운, 불행한, 불쌍한, 악한, 나쁜’ 등을 뜻하며, 여기서 한 마디로 말하면,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악’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에 붙은 관사는 남성도, 중성도 될 수 있는데, 중성으로 볼때는 ‘악’, 남성으로 볼때는 ‘악한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악한자(사탄)의 세력까지도 ‘악’이란 말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구하옵소서”에 해당하는 뤼오마이는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다, 구(출)하다, 보존하다’를 뜻하며, 여기서 이 단어의 과거 명령형이 사용되었으며, 과거가 사용된 것은 ‘완전한 구원’을 나타냅니다.
이 간구를 ‘악한 자’에게서 구원받는 것에 대한 언급으로 간주하느냐 아니면 ‘악’ 으로부터 구원으로 간주하느냐에 관한 문제에 대해 일반적으로 제자들이 이 시대를 지배하며 계속 그들을 위협하고 있는 악한 세력으로부터 해방받음을 간구 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간구에는 현재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어조도 있다. 구원의 목표인 영원한 구원 사상도 나타나 있다.
그러면 “악”이 무엇이며, 어떤 악이 있습니까
이 “악”을 ‘악한 자나 사탄’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하면 그 의미를 제한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이 단어의 범위에 대하여 어떤 제한을 가할만한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영어나 기타 여러 언어에서는 ‘악’을 뜻하는 한 단어(evi1)를 사용하여 죄(의 세력)와 불행,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악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이 단어에 이상의 두 가지 의미를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할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안녕과 행복에 반하는 물리적 악, 즉 고통, 슬픔, 재난 등이 존재합니다. 또 우리의 순결에 반하는 도덕적인 악, 즉 죄가 존재합니다. 둘 다 악입니다.
인간의 양심이 죄를 악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감각이 물리적 고통을 악이라고 부릅니다. 악한 자 사탄의 온갖 술책과 공격이 초래하는 악도 이 모든 악에 포함됩니다.
어떤 사람이 육체적으로 엄청난 괴로움을 겪거나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받았을 때, 그에게 지금 당신은 고통을 겪고 있지 않다고 아무리 교묘한 말로 속삭여 보아도 그는 믿지 않을 것입니다.
육체적 고통 증에 있는 것은 악입니다. 허약, 불구, 피로, 굶주림과 각종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은 악입니다.
마음의 짐을 지닌 것은 악입니다. 판단의 과오, 기억의 실수, 계산의 착오, 말의 실수나 과실, 그릇된 사상과 논리와 그리고 배신. 불신, 의심, 원한, 절망으로 인한 마음 또는 정신적 고통은 악입니다.
이런 악의 몇가지를 열거해 봅시다.
-우리가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의지해온 어떤 대상이 상실되는 것은 악입니다.
-손실과 가난에 짓눌리는 것도 악입니다.
-사망자의 관을 삼키는 그 검은 구덩이 곁에 선다는 것도 악입니다.
-비방과 증오의 화살이 흔들리고 있는 우리 영흔으로 날아 오는 것도 악입니다.
-세상에서 변화와 불운의 충격을 연달아 받는 것도 악입니다.
-실패의 쓴 맛도 악입니다.
-힘에 겹도록 고달픈 일에 땀을 흘려야 하는 것도 악입니다.
-서로 언쟁을 벌이고 싸우는 것도 악입니다.
-흥안 소년이 주름 투성이의 여윈 얼굴로 바뀌어 버리는 세월도 결국은 외적 측면에서 볼 때 악입니다.
이 기도에 별 공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단조롭고 평범한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 기도를 배울 수가 있으며, 언제나 이 기도를 올릴 준비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자신의 전부로 삼는 자들은 세상의 악을 가장 예리하게 느끼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슬픈 세상 중에서 이 기도를 전혀 사용해 본적이 없는 입술로부터 매시간마다 사실상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를 의미하는 부르짖음이 얼마나 많이 올라가고 있습니까!
그러나 이 기도가 이러한 외적인 악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간구에 표현된 악은 온갖 종류의 죄,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온갖 영역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이 간구는 “구하옵소서”, 즉 ‘우리를 밖으로 끌어 내소서’, ‘(악으로)부터 완전히 끄집어 내소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악과 악이 우리에게 미치는 온갖 영향력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그것의 '철저한' 소멸을 구하는 부르짖음입니다.
이 간구는 악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가운데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악이나 고통이 우리에게 유익하며,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이 지금 당장 모든 고통과 번민에서 구원받고 싶은 거친 욕망보다 낫다는 심오한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악은 어디까지나 악이라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하는데서부터
출발하며,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은 이를 전제로 합니다.
욥은 선의에서 나온 친구들의 진부한 말에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욥이 제위에 누워있음에도 마치 장미 침대위에 있는 것처럼 말하였습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고 깊은 슬픔을 느끼면서, 때로는 불합리한 말을 쏟아내기도 하였으나 결국 하나님은 욥의 편을 들었습니다.
욥은 감각을 통해 고통이 쓰리고 악하다는 진리를 체득하여 고수하였으며,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선한 분이라는 진리를 체득 고수하였기 때문입니다. 욥은 이 양자를 조화시킬수 없었습니다.
욥은 의인이 고통을 받는 것, 그것도 죽음과 같은 고통을 받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조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기도에서, 사실들을 부인하거나 교묘하게 둘리댐으로써 양자를 조화시키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릴 때 그 모든 넓이와 폭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모든 것과 우리의 양심을 쓰리게 하는 모든 것이 여기에 내포되어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간구를 드립시다. ‘선하신 주님이여. 모든 해악, 곧 재앙과 악한 병과 기근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시기와 증오, 위선 등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마귀의 온갖 술수와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우리가 부요하고 평안할 때나 죽음의 시간에나 심판의 날에 선하신 주님이여 우리를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2. 이 간구는 악의 단일성과 근원을 암시하여 줍니다.
이 간구에서 “악”이란 말이 단수로 표현된 것은 모든 악이 다양한 형태로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임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코일과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같지만 하나의 근본 뿌리가 그 안에 있습니다.
악은 느릅나무를 질식시키는 담쟁이 덩굴과 같습니다. 그 뿌리를 뽑아 뻐리면 모든 것이 파괴됩니다.
악은 ‘많은 평수를 차지하고 떠있는’ 어떤 거대한 바다 괴물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단 하나의 생명이 존재합니다. 히드라(hydra)는 머리가 일백개나 되어도 심장은 하나입니다.
이 간구가 주기도문에서 나오는 위치를 볼 때, 그 뿌리가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죄입니다.
이러한 위치는 인간의 모든 불행과 고통이 인간 악의 결과임을 시사해 줍니다. 사실 많은 고통이 악의 자연적 결과로 나타납니다.
질병은 종종 방탕의 결과로, 가난은 게으름의 결과로, 친구가 없는 것은 이기심의 결파로 나타납니다. 대도시나 여러 국가에서 범죄의 방치와 불공평의 결과로 얼마나 많은 블행이 발생합니까!
인간에 대한 인간의 비인간성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아 ! 모든 사람이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 이다”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많은 불행이 종식되겠습니까!
나아가 고통은 죄 때문에 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점에서도 역시 온갖 불행은 죄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반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심판을 행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샤랑할 때 불행이 주는 격동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볼 때 역시 불행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불행의 성격이 거의 완전하게 변화되어 불행을 옛 이름 그대로 부르기가 어려워지 며,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한다”는 역설을 우리도 체험하게 됩니다.

3. 이 간구는 악과 대립적인 위치에 있음을 암시하여 줌니다.
이 간구는 모든 악이 하나님의 뜻에 반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았습니다. 한 종류의 악(죄)은 절대적으로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반합니다. 또 한 종류의 악(고통)은 하나님이 이용하시는 방편입니다.
만일 처음부터 상황이 바로 전개되었더라면 하나님은 이러한 방편을 사용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간구는 하나님이 이 두 종류의 악을 모두 제거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칫 악이 영원한 것이라고 믿기 쉽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절망에 빠지기 쉬우며, 자신과 동료들에 대해 실망하기 쉬우며, 과거에도 언제나 그랬으니 미래에도 항상 그럴 것이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회개혁가들은 이 간구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로 잡기가 어려울 때를 많이 느끼지만 이 간구에서 그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세상의 악을 정복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자신과 세상의 악에 대항해 싸우면서 이용할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는 이 기도를 간절히 드리는 것입니다.
불경건한 계획들이 실패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시요. 사람들이 정치적 천년왕국, 흑은 기타 수단에 의한 천년왕국을 세우려한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죄를 해결하시는 하나님만이 세상의 병폐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행동 대신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행동하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기도에 응답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라는 말에 유의하시요. 이 말은 우리가 우리의 형제를 위해 일하며, 우리의 불행의 총화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4. 이 간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악에서 구원하는 방법을 암시하여 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악에서 어떻게 구원하십니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리스도가 전부입니다.
-하나님은 앞의 간구들에 대한 응답을 통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에 견디는 법을 가르쳐 주심으로써, 고난의 목적을 보여주심으로써 우리를 고난에서 건지십니다. 악 속에서 악이 제거됩니다. 삼키는 불 주위에서 밝은 빛이 납니다(겔l:4).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에게로 취하심으로써 구원하십니다.
이 기도는 현재적 체험의 한계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완전한 구속에 대한 갈망의 표현입니다.
이 기도 속에는 우리가 예수님처럼 변모하고, 온갖 악에서 구원받을 그 위대하고 복된 때의 도래에 대한 분명한 예언이 담겨있습니다.
이 기도는 재난도, 죄도, 이 아름다운 세계의 모습을 영원히 망
치지는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어디에서나 거룩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뜻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고,
우리의 모든 곤핍이 충족되며,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온갖 유혹이 사라지며,
온갖 종류의 악이 하나님의 우주에서 쫓겨나고,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날 것입니다(사35:10).
그때 이 강력한 기도는 완전히 응답될 것입니다. 모든 시대에 살았던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도는 응답될 것입니다.
땅 위에서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라고 기도하셨던 주님께서 보좌 앞에 드리는 기도는 마침내 응답될 것입니다요l7:l5).
흰 옷 입은 영흔들이 제단 아래서 “대 주재여,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라며 울부짖는 기도가 마침내 응답될 것입니다계6:10).
6천년 동안의 온갖 흐느낌, 울부짖음, 슬픔이 무의식적으로 드려왔던 그 기도가 응답될 것입니다
이 기도는 끊임없는 자비를 통해, 수많은 용서와 은혜로운 인도하심을 통해, 지금도 매 시간마다 응답되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꾸준히 그 완성을 향해 줄달음 치고 있습니다.
온갖 시대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들의 사랑 속에서 자라 왔습니다.
그의 뜻이 점점 더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더 완전하게 이루어져 왔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행복에 넘치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게 될 때, 그리고 높은 산 위에서 들리는 먼 바다의 희미한 물결 소리처럼, 흑은 온갖 바람이 잠잠해진 이후의 폭풍우에 대한 추억처럼 지상의 온갖 악의 소음이 우리의 기억속에서만 희미하게 들려을 그 때에, 마침내 이 기도는 완전하게 실현될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우리와 함케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리니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계2:4).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가 우리의 기도라면 우리의 삶의 체험도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지리라(고후1:10)는 바울의 말처럼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가면서도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창48:16).
죽음은 우리가 지상에 사는 동안 간구했던 완전한 구원을 안겨줄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순수한 선과 복과 순결의 땅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요란한 고해 위에서 이리 저리 흔들리며, 저 멀리 빚나는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소유하기를 갈망하고 있지만 죽음은 그것을 소유하러 들어가는 문이 될 것입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면 우리에게 이 약속, 곧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시91:14)는 약속이 실현될 것입니다.-할렐루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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