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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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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다섯 번째 간구에 해당한다. 이 기도는 주기도문 중에 제일 중요한 기도이며 또한 논란이 가장 많은 기도이다.

1. 이 기도가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① 이미 의롭다함을 받았는데 무엇 때문에 또다시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하느냐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보혈로 죄를 깨끗이 씻음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하여 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요한일서는 요한 사도가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 편지에 보면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한 번 먹고 십년간 살 수 없듯이 한 번 용서받고 10년간 살수는 없습니다. 1번 세수하고 1년간 깨끗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듯이 매일 용서를 구하며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되는 주기도문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자녀들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도 자녀의 기도인 것입니다. 즉, 불신자의 죄가 아니라 자녀들의 죄를 사해달라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죄는 심판의 대상으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정죄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죄를 얼마든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베드로와 하신 대화를 통해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베드로의 차례가 되자 베드로는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6)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8). 성경에서 “씻긴다”는 단어는 죄 문제의 해결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하여 죄씻음을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들은 베드로는 생각을 바꾸어 발만 씻겨 주실 것이 아니라 목욕을 시켜달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10절에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 씻음을 말씀하셨는데 하나는 목욕이며, 다른 하나는 발씻음입니다. 주님은 목욕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영적인 의미에서 보면,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거듭나며, 하나님으로부터 의 롭다함을 얻으며, 단 한 번 그리스도 십자가의 구 속의 사역에 근거하여 우리의 죄는 영원히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늘을 살아가며 전혀 죄와 투쟁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은 논리상, 경험상으로 비추어 보아 죄사함을 받았음에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영생을 얻었음에도,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에도 불구하고 죄악과의 투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예) 비록 목욕을 했으나 하루 종일 거리를 걷다가 저녁에 돌아와서 보면 우리의 발은 어느새 더렵혀져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팔레스틴 거리는 먼지가 뒤덮인 환경인데다가 샌달을 신고 다님으로 아무리 깨끗하게 목욕을 해도 발은 더럽혀져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에 대한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거듭난 사람, 목욕한 사람은 다시 거듭나지 않고, 순간 순간 죄를 고백하므로 사함을 얻는 발씻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막에서 번제단과 물두멍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② 예수를 믿은 후 성령이 임하여 우리의 죄성은 제거되었기에 “죄 용서의 기도”가 필요없는 것이다는 주장입니다.(완전론자)
요일 1: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즉 성도들이 범죄할 수 있음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속임수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선의 시대가 선악의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우리 안의 선악이 분리되어 선은 하나님 나라인 천국으로, 악은 지옥으로 가게 도리 것입니다. 선 시대는 지나갔고, 선악분리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선악혼합시대입니다. 선한 사람에게 악이 있고, 악한 사람에게도 선이 있습니다.
위대한 성자일수록 죄에 대해서 민감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위해 그렇게 헌신 충성한 바울은 자기를 ‘죄인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가장 불완전한 자입니다.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하다는 이론에 근거하여 죄를 범하고도 죄를 인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기도는 누구에게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도입니다.
③ 이 기도는 얼핏 들으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준 사실에 근거하여 그 댓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조건부 기도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율법시대에나 적용되는 조건부적인 기도는 은혜의 시대에 사는 성도에게는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의 의미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에 근거해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한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죄도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앞에 나오는 순간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엄청난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나의 모든 죄가 무조건 용서를 받았다면 어떻게 나에게 잘못하고, 나에게 허물을 받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참된 용서를 받았다면 우리에게 잘못한 어떤 사람들의 허물과 죄도 용서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삶에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2. 이 기도의 의미가 무엇인가
① 영을 위한 기도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듯이 우리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용서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기도이다.
감옥의 사형수는 아무리 잘 먹는다해도 무엇보다 용서가 가장 요구되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어야 육이 편안하듯, 용서를 먹어야 영도 평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화)
어느 사형수가 왕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를 놀리느라고 컵에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 컵은 한 방울의 물도 더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왕은 그 컵을 사형수에게 주며 “이 컵을 들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아오되 이 컵의 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아니하면 살려주마”라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사형수는 살고 싶었습니다. 오직 그의 소원은 한 가지 사형을 면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조심하며 동네 한바퀴를 돌았습니다. 이렇게하여 한 방울의 물도 흘리지 않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왕이시여!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돌아왔나이다. 그러니 제발 사형만 면제 시켜 주시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돌아왔느냐” “네” “우물가에 여인들이 몇 명이나 모여 있더냐” “모릅니다” “나무 밑에 노인들이 몇 명이나 모여 있더냐” “모릅니다” “냇가에 빨래하는 여인들이 몇 명이나 있더냐” “그것도 모릅니다” 왕은 화가 났습니다. “네 이놈, 동네를 돌아오지 않고 거짓말을 시키는구나!”라고 호령을 했습니다. “왕이시여 분명히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왜 모르는고” “예! 내 생명은 이 물 한 방울에 달려 있기에 저는 물만 바라봤나이다. 다른 것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너무도 살고 싶어하는 그 사형수를 풀어줬습니다. 굶주린 이에게 음식이 필요하듯이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사형수에게는 용서가 필요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는 용서를 위한 기도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② 하나님 앞에서 아직도 범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는 빚이라는 말입니다. 마땅히 갚아야 할 빚, 그런데 갚지 않은 빚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약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향해, 이웃을 향해, 가족을 향해 그리고 자신을 향해 마땅히 해야할 것을 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죄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죄가 없다고 하는 것처럼 큰 죄는 없습니다.
파스칼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은 크게 두가지 종류로 대별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하나는 죄를 범하고도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또 하나는 죄를 범한 후 자신의 죄를 깨닫는 사람인데 전자는 희망이 없는 죄인이라면, 후자는 희망이 있는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죄사함의 기도’는 주의 보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고백이며, 주의 은혜가 절대로 필요한 존재라는 고백입니다.
③ 이 기도는 죄의 자백의 필요성을 가르치는 기도입니다.
칼빈은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자백하지 않는 것은 갚아야 할 빚을 갚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하였고, 루터는 사람들이 죄를 자백하지 않는 이유는 스스로에게 겸허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반복되는 죄의 자백과 자백에 따른 용서의 횟수를 가지고 그리스도인이란 용서와 죄의 반복만을 거듭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자백을 포기하면 더 큰 범죄에 빠진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발을 씻어도 또 다시 더러워진다고 아예 발씻음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발을 계속해서 씻을 때 우리는 깨끗함의 필요성과 깨끗한 인격으로 변화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백은 영혼을 청결히 보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요한 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시편 32:1-5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1-4절에서 죄를 자백하지 않을 때의 영혼의 피곤과 침체상태를 여름 가물에 비유하여 고백하고 있으나 5절에서 죄의 자백으로 오는 죄사함의 진정한 기쁨을 고백하고 있다.
죄의 자백으로 용서를 얻는 것은 인생을 위대하게 변화시키는 힘이다.

④ 이 기도는 타인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겸허한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기도이다.
이것은 어떤 조건부적인 것이 아닌 자연스러워야할 그리스인들의 용서하는 삶의 필요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엡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 3: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예화)
독일의 라벤스부르크 수용요소에서 온갖 학대를 받은 유명한 ‘코리 텐 붐’ 여사는 전후에 독일인에게 용서의 복음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그녀가 닿는 곳마다 용서의 복음이 선포되었고 예배가 끝나면 많은 사람들은 코리 텐 붐여사에게 찾아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사랑과 그녀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어느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한 사람씩 코리 텐 붐 여사의 손에 입을 맞추며 그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를 표하는데 문득 다가서는 한 남자의 얼굴을 보니 포로 수요소에서 그녀의 옷을 벗기며 채찍을 가하고 침을 뱉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순간 그녀는 온 몸이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언니는 그 남자의 손에 의해서 죽음을 당했으며 그녀가 받았던 갖은 조롱을 생각할 때 그녀의 손은 도저히 내밀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코리 텐 붐 여사는 말로 할 수 없는 영혼의 진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할 수 없으나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랑할 수 있는 것을 믿나이다. 주여! 믿나이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그 독일 간수의 손을 잡는 순간 하늘의 사랑이 자기의 영혼 속에 파고 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날 그녀는 새로이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참으로 깨닫게 되었으며, 미움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가 어떤 것인지를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라! 용서하라! 이런 명령들은 순종할 때에 비로소 사랑하고 용서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스펄존 목사님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주기도문을 반복하면 당신은 그때마다 당신의 사형판결문을 낭독하는 것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며 드린 기도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 것같이 나도 용서받지 못하게 죽게 하여 주옵소서”하는 기도가 된다는 것이다.

3. 용서의 방법
① 이해
② 사랑
③ 기도
죄사함의 기도는 영을 위한 기도이며, 거듭난 죄인인 성도에게 꼭 필요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용서의 삶을 살겠다는 다짐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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