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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에 이르는 수고 (잠 10: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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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지혜문을 통하여 3 가지 교훈을 생각하게 합니다.

첫째로, 부자는 그 재물을 성(城)처럼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것과,둘째로,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른다고 했고,셋째로,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간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이 벌써 수천년전에 기록된 말씀인데도 마치 오늘 우리를 보고 기록한 말씀처럼 그렇게 생생하게 들려 옵니다.

 1. 사람은 무엇이든 한가지씩을 의지하고 살아 갑니다.

전혀 의지하고 사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는 본질적으로 의존적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것이 좋지 않으니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한 것처럼, 사람은 이 땅위에 태어 나는 순간부터 어머니와 아버지를 의지하게 되고, 그리고 장성하면 부모를 떠나 그 배필을 찾아 나서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면, 결국 그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자신을 의지하고 산다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재물을 의지하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여기에 기록된 말씀처럼,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① 성은 안전을 의미합니다. ② 성은 피신처를 의미합니다. ③ 성은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볼 때, 사람들은 세상에 믿고 의지할 것은 재물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재물만 있으면 생활 걱정이 없을 것같이 여겨지기 때문이고, 재물이 있으면 자신을 위태로운 지경에서도 건져내 줄 수 있을 것 같고, 재물만 있으면 모든 즐거움을 누리며 살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없는 사람 편에서 볼 때 그렇지, 재물이 정작 많이 쌓아 놓고 보면 그렇지 않음을 봅니다. 제가 이번에 인도네시아를 잠시 방문하는 동안에 느끼고 본바 대로는, 재물은 결코 사람을 안전하게 지켜 주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만 가지고는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실제로 많이 보고 왔습니다. 인도네시아는 GNP 적으로 보면 우리나라 보다 훨씬 떨어지지만, 실제로는 가장 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나라임을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돈이 불과 몇몇 사람들의 손안에 편중되다 보니 GNP는 불과 600불에 불과 하다는 결론입니다. 그런데 가장 서민층이 그렇게 연약한 경제적 환경 속에 살면서도 도리어 저들의 얼굴에 불행스러움을 못느끼리만치 가난을 숙명적으로 받아 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아시아 선교지의 선교 전략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인에게는 요즘 자본주의 사상에 물들어서 재물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재물 얻는일이라면 하나님 같은 것은 저만치 밀어 버릴 수 있는 경우들을 얼마든지 보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생각인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재물!, 하나님 없이 모아진 재물! 결국 그것이 어떻게 쓰여지는가 16절에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른다고 하였듯이 결국 죄짓는 일로 끝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죄짓는 일로 끝난다고 하니까, 무엇 도덕적으로 큰 방탕한 생활을 연상할는지 모르나, 그런 것 만이 아닙니다. 16절 상반 절과 연결 지어서 생각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그의 수고하는 모든 것은 생명에 이르게 되지만, 그러나 악인은 자기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결국은 죄의 값인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도덕적으로 무슨 큰 잘못은 없었다 하더라도, 재물만 의지하고 산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시한 자기중심적인 삶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재물이 많아, 하나님 보다 그것을 더 의지하고 살게 된다면, 훈계를 받으려고 아니합니다. 그래서 잠언 30:8절에 보면, "나로 너무 가난하게도 마시고 너무 부하게도 마시고 일용할 양식으로 내게 먹이 시옵소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 바로 그것으로 감사하며 살 수 있을 때, 그런 삶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오! 하나님, 오늘도 이 하루 동안 기키 시사 일용할 양식을 주시 오니 감사 하옵나이다." 바로 이런 기도는 매일 매일을 하나님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는 축복 인줄 깨달아야 합니다. 기도할 줄 모르고 식탁에서 경건의 삶의 훈련 없이 키운자식들! 저들의 소득이 이를 곳은 뻔합니다.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고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2. 이제 우리는 재물을 더욱 쌓기 위해서만 수고를 할 것이 아니라, 생명에 이르는 수고를 해야 하겠습니다.

생명에 이르는 수고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가려는 <애씀>을 말합니다. 수고 많이 했다는말을 애 많이 쓰셨다고 인사하는 지방 사투리가 있습니다. 생명에 이르는 애들을 많이 써야 할 때입니다. 애쓰지 않고 거두어 드릴 수 없습니다. 추수할 수확을 바라보는 농부라면 여름철에 땀을 많이 흘리는 애를 쓰는 농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제일 곤란한 사람들이 누구인가생명에 이르는 수고 없이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재물을 모으려는 애씀만큼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면, 아마도 모두 일등 신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문제 있는 신자들이 누구냐 생명에 이르는 수고 없이 믿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가끔 자신이 꽤 잘 믿고 있다고 착각 속에 살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믿고 있는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알려는 수고 없이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하나님의 형상! 자기가 생각해서 만들어 놓은 상상의 하나님이지 살아 계신 말씀으로 임하는 하나님은 아니란 말입니다.

한번은 힌두교를 믿는 브라만이 자기는 평생토록 생명을 죽인 일이 없다고 자랑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기독교 선교사가 그에게 물 한방울을 현미경으로 보도록 권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현미경 속에는 수를 혜아릴 수 없는 많은 생물체가 우글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가 얼마나 많은 생명을 끼니때마다 삼키고 있는지를 비로소 알고는 그만 그 현미경을 깨트려 버렸다고 합니다. 왜 자신의 양심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오늘의 우리들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양심의 편한 대로 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편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합니다.

말씀의 현미경으로 자신의 삶을 보려고 들 아니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죄인임을 사실대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대인들은 그저 양심의 편한 대로 만 살려고 하지 생명에 이르는 수고를 하려고 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면 생명에 이르는 수고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우리는 자신의 죄악을 볼 때 스스로 역겨워 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잊고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활 태도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제아무리 모든 것을 가추어 놓고 산다고 해도 그것은 죄에 이르게 하는 것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주님을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요 섬기려 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무엇을 해 드리는 사람보다, 당신 스스로가 무엇을 해 줄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는 당신에게 무엇을 좋은 것을 해 드리는 사람보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온 것은 양들에게 생명을 주어 더욱 넘치도록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들 보다는, 도리어 자신의 무능을 절감한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 줄 수 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참되게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인정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임을 뼈저리게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얻은 결과로, 나타나는 행위들! 그것이 바로 생명에 이르는 수고들이란 것입니다. 오늘날 선교 사업에 실패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모두 자신이 하는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번 인도네시아에서도 보면, 선교에 실패하는 대부분의 경우를 보면, 모두가 자기가 더 많이 수고했다는 그런 주장에서 부터 불화가 생기고, 선교사들 간에도 갈등이 생겨 서로 실패하는 경우들을 보았습니다.

생명에 이르는 수고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자기 부정이 되어야 합니다. 조그마한 일을 해 놓고 침소 봉대하는 그런 경우에서는 절대로 생명에 이르는 수고를 할 수 가 없습니다.

여러분! 어느 누구인들 임신한 부인이 생명을 잉태한 것에 대하여 혼자만 수고하는 것처럼 생색을 내는 이들이 계십니까 오로지 10달 동안을 수고와 희생이 따를 뿐입니다. 생명에 이르는 수고도 그런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의 시간, 우리의 재물, 우리의 마음 전부를 그 한 생명을 위하여 참고 인내하고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명에 이르는 길은 그 길이 좁고 협착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노력 없이 쉽게 갈 수 있는길이 아니란 말입니다. 끝까지 인내의 경주에서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생명에 이르는 수고! 우리들의 지금 얼마나 하고 있습니까우리의 생명을 건져 주신 주님의 구원의 은총을 생각할 때,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는 양으로 수고가 따르는 헌신의 생활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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