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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자 (빌 0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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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니무어니 해도 죄와 죽음 아래 사는 인간에게 가장 크고 귀한 복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모든 인생 문제의 해결자이신 구주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주님을 알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주님을 알고 믿는다고 하는 교인들 중에도, 주님을 마음속에 모시지 못한 이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옛날, 빌립보 교회에도 그러한 교인들 때문에 내분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랑의 화합에 필요한 겸손과 자기 부정의 열심을 갖출 수 있도록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이 성탄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더욱 확고하게 품어야 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선재와 강림
우리가 마음속에 모셔야 할 그리스도 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선재하신 그리스도, 즉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 영원부터 존재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적 본성 및 속성과 일치하며, 또 그것들을 드러내는 존재의 표현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시면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아무 거리낌없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사람들에게 현현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선언이 돌에 맞아 죽을, 신성 모독죄인 줄 아시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고 공언하신 것입니다.
영원부터 성자 하나님으로서 존재하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즉, 하나님으로서의 영원한 영광과 영화로운 존재 양식을 계속 유지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죄와 죽음 그리고 멸망의 길을 가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3. 그리스도의 겸비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구원의 대업을 위해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 말씀 이하를 근거로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겸허설’을 말해 왔습니다.
‘자기를 비어’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서의 본질과 속성 전부를 포기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주석가들과 그 일부를 포기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주석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능력과 지혜 등은 영구 불변한 것이라는 점 때문에 두 주장 모두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셨다는 것은, 본질과 속성, 능력과 지혜 등에 있어서 하나님과 똑같으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는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는 놀라운 겸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점은 ‘사람이 되셨다.’라고 하지 않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라고 한 것으로도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같이’란 엔 호모이오마티(ν μοιματι)로서, ‘똑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는 사람에게는 없는 신성이 있으시기 때문에, 참 인간이시며 참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즉, 신과 인간의 본질과 속성을 지닌 한 인격체라는 뜻입니다. 루터는 이 신비로운 성육신의 사건에 있어서 신성과 인성의 연합은 인간의 이해력을 완전히 초월하는 비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 곧 성육신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겸비의 한계에 대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모양의 ‘모양’은 스케마(σχμα)로서, 감각을 통해 인지될 수 있는 ‘가변적인 형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의 본질과 속성을 가진 존재로 이 땅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겸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계속해서 자신을 낮추셨고, 마지막에는 천박한 노예나 흉악한 죄인들에게만 사용되는 십자가의 형틀에 못 박혀, 극도의 수치와 극도의 고통을 겪으시며 죽으시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의 대업을 완수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성탄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절대 복종과 놀라운 겸손, 철저한 자기 부정과 동정심 등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모든 덕을 내포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지고한 사랑의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의 마음을 품어야만 지식이 있되 마음은 무지한 자들과 같아질 수 있고, 재물이 있되 마음은 가난한 자들과 같아질 수 있고, 명예가 있되 마음은 이름 없는 자들과 같아질 수 있고, 힘이 있되 마음은 약한 자들과 같아질 수 있습니다.
한때 연세대학교 교목이었던 주한 미국 대사인 레이니가 에모리 대학의 교수로 지낼 때의 일입니다. 근무하는 대학이 집에서 약 20분 거리밖에 안 되므로 걸어서 출퇴근을 했습니다. 출퇴근 길에 있는 작은 집에 한 노인이 살고 있어서 오가며 인사를 드리고, 성탄절이 되면 조그만 선물을 드리고, 새해에는 새해 인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2년 후에 그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나면서 “이런 사람 처음 보았다.”라고 하면서 113억불을 주었습니다. 바로 그 할아버지는 코카콜라 회사의 회장이었습니다.
레이니 교수는 그 돈을 학교에 들여놓았고, 학교 당국은 그를 총장으로 재직하게 했습니다.

4. 그리스도의 영광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좇아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지극한 겸비를 보신 성부 하나님께서, 그에게 놀라운 영광을 부여하셨습니다.
첫째, 그리스도 예수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둘째, 영적 피조물과 육적 피조물을 포함하는 모든 만물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께 우주적 주권과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 예수의 주권과 권세의 특징은 사랑입니다.
셋째,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것에 의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톰은 “성자가 영화롭게 되는 곳에 성부의 영화가 있고, 성자가 수욕을 받는 곳에 성부의 수욕이 있다.”라고 풀이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인생과 자연의 이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땀 흘려 심고 가꾼 사람만이 달콤한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열매는 심은 수만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심은 것의 수십 배 수백 배 수만 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나무는 수 백년 이상을 살면서, 해마다 수백배 수천 배의 열매를 맺어 주기도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와 같은 영광과 영화를 원하십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5. 맺음말
해마다 성탄절에는 먹고 마시고 즐기느라 술집이나 여관, 호텔 등에 사람들이 차고 넘칩니다. 또, 교회들은 즐겁고 흥겨운 행사들로 요란합니다. 모든 교회들 안팎에, 그리고 거리 곳곳마다 아름답게 장식을 합니다. 마굿간 말구유에 탄생하신 구주 예수를 기념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절대 복종과 놀라운 겸손, 철저한 자기 부정과 동정 등에 대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그 모든 덕을 내포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지고한 사랑의 마음을 품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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