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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르지 않는 샘 (창 26: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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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앙의 사각지대.
자동차를 몰다보면 시선의 사각지대가 네군데 있습니다.
사각지대란 눈으로도 백밀러로도 잘보이지 않고 감각이 없는 곳을 말합니다.
첫째는 앞 범퍼 밑이요, 그리고 뒷바퀴쪽입니다. 그런데 이 앞뒤의 시야가 막히는 곳은 그렇거니 하고 조심하기 때문에 그렇게 잘 긁히거나 충돌하기 않습니다. 그런데 운전석 바로 뒤 뒷문 아래쪽은 대충 보고 지나가기 때문에 긁히거나 스쳐서 생채기를 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크리스챤의 신앙생활도 이러한 사각지대가 있음을 많이 보게됩니다.
첫째란, 하나님께서 과연 병까지도 고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질병! 어떤 이는 말합니다. 질병을 이길 수 있는가 이 질병이 과연 의술로만 해결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역사 이래로 인류는 수많은 질병을 이겨내었지만 미안하게도 아직도 이겨내지 못하고 미제로 남아있는 질병의 수효가 훻씬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질병과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는것인데 이 질병이 과연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쳐질 수 있을까 라고 사람들이 물어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내 짝까지도 예배해 놓으셨을까
청년 남녀들의 고민은 또 무엇입니까
믿음안에서 “하나님은 정말 나를 위해 배필을 예비하고 계신가”라고 의심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난을 감수하고서라도 결혼이라는 문제에 부딪혀 그만 불신결혼을 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정말 나를 축복하시며 부자도 되게 하실 수 있는 것일까
사업가들처럼 하나님을 믿기 힘든 직업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오늘날에도 “사업의 줄기들을 붙들고 계신가”라고 물어옵니다.
넷째, 하나님만을 의지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일까 특히 요사이 같이 I. M. F.시대에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분들은 더욱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지나온 날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라도 근심치 않은 날이 있습니까 문제가 마치 책상 위에서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뭉치 만큼 많이 쌓여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과연 문제가 없어지며 해결된다고 믿는 사람이 과연 몇 명 있을까요
오늘날도 우리는 여전히 산적해 있는 문제 때문에 긴밤 잠을 못 이루고 고뇌하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2. 이삭의 신앙 고민
자! 그러면 지금부터 이삭의 입장에 서보도록 합시다.
이삭도 위의 네가지 신앙의 사각지대에서 일평생 괴로워했던 사람입니다. 아니 그가 이 땅위에서 육 신의 삶을 영위하는 동안에 한번도 벗어 버릴 수 없이 따라다녔던 문제들입니다.
이 문제를 벗어 버릴길은 아주 믿음이 깊었던 그로서도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믿음이 좋았던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많은 신앙의 모범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 제인생의 문제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상당부분 부를 얻어 거부가 되고 세력이 커졌음에도 여전히 그는 산적해 있는 문제들에서 해멜 수 밖에 없었습니다.
① 시기를 받는 이삭
오늘 본문 26장 12절에 보면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해에 백배나 얻었고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양과 소는 떼를 이루고 그가 부리는 노비와 종들이 심히 많아 마침내 정상에 오른 듯 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 추적하는 입장에 서있던 이삭은 이제 추적을 받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 그를 형통케하고 물질의 축복을 심히 누리게 했지만 그는 그 땅 원주민이었던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시기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탄다(burning)’라는 뜻인 ‘카나’에서 온 말인데 이것은 매우 강렬한 질투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대의 사람들은 아직 국가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씨족과 부족 중심의 공동체관을 천수답적이었기 때문에 땅에 대한 개념은 희박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관계가 발달해 있지 않던 관계로 우물은 생존의 터전이요. 삶의 발원지였습니다. 그래서 우물,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오아시스겠지요. 이 샘에 대한 개념과 소유는 정확했습니다. 이삭이 가지고 있던 우물은 그 아비 아브라함이 팠기 때문에 분명히 그들의 계약관계에 있어서도 그 우물은 분명히 이삭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원주민들이 와서 그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던 것입니다.
이것은 전전포고요 전쟁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삭이 떠나지 않으면 전쟁이라도 불사하겠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가끔가다가 동해의 고도인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그 땅의 이름을 ‘다께시마’라고 하며 일제 시대 때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무인도를 자기가 발견하여 자기들의 국토에 영입시켰기 때문에 자기네 땅이라고 국제 사법 재판소에 심판을 청구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선전포고 입니다. 만약 그들이 어느날 군함을 동원하여 그 땅을 무력으로라도 점령한다면 그것은 한.일간의 전쟁 이 시작되는 때일 것입니다 그들은 언젠가는 이 땅을 차지하여 전쟁의 구실로 삼을 것입니다.
이삭의 경우가 그런 것입니다.
이삭은 나약한 성격의 소유자 입니다.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거짓말도 곧잘 했습니다.
자기의 아내도 누이라고 속였던적이 있습니다.
그런 그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합니까
17절에 보니까..........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결국 이삭은 농사짓던 농토와 그 땅의 우물을 포기하고 그랄 골짜기로 내려가 그곳에 다시 장막을 치고 우물을 팝니다.
19절을 보면.......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그런데 이 우물이 터지니까 이번에는 그랄의 목자들이 와서 시기하여 우물의 소유권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 우물을 ‘에섹’이라고 이름짓고 그 소유권을 포기합니다. ‘에섹’은 ‘다툰’이라는 뜻입니다.
21절에서 다시 우물을 파서 샘근원을 얻어 생수를 가졌습니다만 또 시기와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 우물의 이름은 ‘싯나’라고 짓고 또 소유권을 포기합니다. ‘싯나’란 ‘대적함’이란 뜻인데 ‘사탄’이란 말이 이 ‘싯나’에서 파생되어 나온 말입니다.
누구나 사람이라면 이쯤되면 결코 양보하지 않습니다. 한 번은 싸움을 하고 전쟁을 벌이게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삭은 싸우지를 않습니다. 시기를 받을 때,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인생과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감당하기 힘든 사각지대입니다.
② 이삭의 실패
여러 면에서 살펴볼 때 이삭의 삶은 실패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공에서 5공까지 대개의 기업들은 사장실이 도청을 당했습니다. 제가 아는 한 기업인은 그 어려운 시절에 어찌하여 제법 큰 기업을 이루는 축복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는 라이벌 회사의 계략으로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넘어진 가장 중요한 실수는 사장이 전화상으로 도청되는 줄도 모르고 그의 사적인 애기를 했다가 그만 약점이 노출되어서 주저 않고 말았던 것입니다.
축복을 받았다고 자랑하고, 떠벌리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티를 내고 당장 차를 바꾸고 전에 없이 거드름을 피우며 교만해집니다.
이삭은 축복을 받을 수록 그것을 감추고 겸손해지고 그것을 축소해서 말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③ 이삭의 재빠른 회복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못합니다.
다툼이 일어나고 대적들이 생기도록 하는 것은 내 잘못도 있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처신하지 못한탓도 반은 있다는 말입니다. 이삭이 겪어야 했을 고민과 좌절을 생각해봅시다. 오죽하며 그가 우물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어 불렀겠습니까 사람은 충격적인 사건은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합니다. 자기의 마음을 글로 남기거나 새겨두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에섹’,‘싯나’ 이것은 그의 마음의 고민을 반영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삭의 아름다움은 문제를 직시하고 바라보는 시야의 정확함입니다. 그는 이 문제의 해결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을 것이라고 판단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생존과 부의 축적에 있어서 우물이 생명만큼이나 중요하고 귀하겠지만 하나님을 포기하고 그것을 소유해야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소유하고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내가 가진 기득권을 포기한다면 하나님은 기꺼이 내 삶에 더 큰 축복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한 번 정도 그가 포기하거나 두 번정도 포기 했다면 그의 나약한 때문이거나 성문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네번째 우물을 다시 팠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과 지혜의 차원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이요. 영적인 차원이요. 할렐루야의 4차원적인 영역이라는 것입니다.포기하고 하나님을 바라는 이삭의 믿음에 대하여 하나님은 게속적으로 형통케하셨다는 것입니다. 포기하고 다시 우물을 팔 때마다 하나님은 어김없이 그들의 가솔들과 양떼와 소떼를 먹이고도 남을 만큼의 물이 터져 생수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얻은 물은 지하수라서 펌프나 모터로써 길어 올려야 할 물이 아니라 용천수여서 솟아 터져 올라오는 물이어야만 했습니다.
과연 광야에서 그런 우물을 인력으로 만난다는 것이 과연 쉬운 일입니까 결코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승리인 것입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며 두려워하느냐 너는 잠잠히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바라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도우시리라”하신 말씀대로 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 로마서 8장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이런 노래를 외쳐 부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오늘 예수 안에 들어와서 굳건히 서있는 자가 있습니까
오늘도 의심하지 않고 예수 안에서 고뇌하며 싸우는 분있습니까
요한복음 7:37, 38을 다시 한 번 소개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 말씀은 예수의 약속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을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때에 결과는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책임지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대로
예수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안에서 이 은혜에 충만하시기를 전심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니의 승리
결론적으로 정리해봅시다.
이삭은 신앙의 사각지대에 빠졌습니다. 다른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지만 이미 식구와 가족이 많아진 그에게 생명의 젖줄이요 부의 근원, 경제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원초적인 에너지인 물의 문제까지도 하나님께서 과연 책임질 수 있으신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과연 이 경제적인 문제까지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포함하는 것인가
이것이 이삭의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 성도들이여
여러분들의 신앙의 사각지대는 무엇입니까 건강입니까
자녀입니까 경제입니까 주택입니까 문화이며 교육입니까 여러분들이 고민하는 그 부분에 하나님은 전혀 관심도 없으시고 도우시며 간섭하실 수 없으실까요
계속적으로 어려움과 고난과 고민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예수님께로 나아가 그분안에 서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잘 모르시고 잘 인정하지 않으시지만 예수는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의지할 때, 예수와 함께 살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살리시고 도우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나를 부인하고 포기함으로 예수를 따르는 삶!
이러한 삶속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에 계속적으로 나타날 때 세상은 완벽하게 우리와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전파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를 알아서 그것을 체험하는 마르지 않는 샘의 축복을 받으시는 성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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