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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망설임 (빌 01: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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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난 이틀에 걸쳐서 빌립보서 1장 21-24절을 살폈습니다. 먼저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신앙인의 엄숙한 고백을 살펴보고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는 또 하나의 놀라운 고백을 살폈습니다. 왜 사는지를 묻고나서 죽음의 의미를 살폈습니다.
오늘 우리는 21절에서 26절에 걸쳐서 선택의 기로에 있는 바울의 숭고한 망설임을 살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소망 가운데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분명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소망 가운데 사는 기독교인도 망설일 때가 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을 짓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두 가지 일 가운데서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심히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를 접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두 가지가 꼭같이 다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모두 유익하고 필요한 경우에 그 중 하나만 택해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임에 분명합니다.
바울의 숭고한 망설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본문을 살펴봅시다. 왜 그는 망설이고 있습니까
첫째로 그는 생사에 대한 동일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1-22).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바울은 선택의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두고 저울질하면서 주저하고 있습니다. 저울의 양쪽 접시 위에 같은 무게가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만일 산다면 바울은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는 것이고 죽는다면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이 더 좋겠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 좋겠습니까 삶이란 바울에게 큰 의미가 있었으며 죽음도 또한 그와 꼭 같은 비중을 가진 뜻이 있었기에 그의 망설임은 “거룩한 망설임” 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 고 고백하는 바울에게 있어서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자기 가족을 위한 삶도, 자신의 향락을 위한 삶도 살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일반 신자들처럼 그리스도를 위한 삶도 아닙니다. 오직 삶, 그 자체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동기요 힘이요 목적이요 그의 생각이요 그의 이상이요 전부였습니다. 실로 그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살아 계셨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는 철저한 생사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생명은 그리스도였습니다. 삶은 그리스도로 요약되었고 삶은 그리스도로 채워졌고 그리스도로 지배되었습니다. 바울이 하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공급받고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신뢰하는 모든 것, 바울이 사랑하는 모든 것, 바울이 소망하는 모든 것, 바울이 복종하는 모든 것, 바울이 전파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이 주어지고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만이 삶에 대한 영감과 방향과 의미와 목적을 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바울이 하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사랑 때문이요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헌신 때문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다음부터 그리스도의 위엄과 사랑과 선하심과 용서하심에 감격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 말고는 삶에 아무 의미를 발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실로 유익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단순히 죽음을 모든 문제에서 벗어나는 길이기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의 목표였기에 그는 사랑에 강권받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외적인 환경에 짓눌려 사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사랑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그의 삶을 보십시오. 여러 차례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온갖 싸움을 싸우기도 했고 매를 맞기도 하고 돌로 침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굶주리기도 했고 탈진하기도 했고 온갖 위험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의 삶은 그리스도께 지배당했기에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넘겨져서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데 바쳐졌기에 그에게 삶이란 육신적으로 매우 고달팠습니다. 무거운 인생의 짐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 고 말하도록 까지 된 것입니다. 이 말은 용감한 순교자다운 고백이 아닙니다. 고달프게 살아가는 인간 바울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거의 쓰러질만큼 무거운 짐을 지고가는 인생에게 있어서 죽음은 실로 유익하다는 고백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런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그런 생각을 해보신 분은 없습니까 삶이 고달프게 느껴지는 순간,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 죽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때는 없습니까 고통의 멍에가 너무 커서 견딜 수 없는 순간에 여러분은 죽음을 사모해 보신 적은 없습니까 낭패와 실망을 당한 다음, 거기서 벗어날 기회를 그리워해 보신 적은 없습니까
배반과 좌절을 겪은 다음, 거기에서의 도피처로서 죽음을 생각해 보신 적은 없습니까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은 지상의 모든 괴로움에서 해방되어 참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불완전한 삶에서 완전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의 달관한 모습이 있습니다. 무조건 삶을 원한 것도 아닙니다. 살고보자고 생각하고 무슨 일이든지 채근치 않는 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조급히 죽음을 구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 중심에서 보는 삶과 죽음입니다. 이 바울의 생사관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삶과 죽음을 두고 주저하고 있습니다. 죽는 것도 유익하지만 그가 살아 있는 것이 복음전파에 열매를 맺는 일이기에 사는 것도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것을 택할런지 알지 못하겠다고 고백합니다. 분명하게 한 쪽이 확실하면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 좋을지 그에게서는 결정하기 몹시 어려웠던 것입니다. 육과 그 욕심에서 해탈한 자가 가지는 숭고한 주저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라고 고백합니다. 여기 끼였으니 라는 말은 누가복음 8장에는 사람들이 옹위하여 미는 상황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움직일 여지가 없는 상황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출근시간 만원버스를 상상해 보십시오. 끼여서 마음대로 내릴 수도 탈 수도 없는 상황을 생각하면 됩니다. 삶은 자기 편으로 끌어당기고 죽음은 자기 편으로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으로서는 생사 어느 것도 선택할 여유가 없습니다. 선택은 다만 주인되신 하나님의 손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그가 망설이는 이유를 좀 더 고찰해 봅시다. 두 번째로 그는 죽음에 대한 더 큰 바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
나 (23절)라고 고백합니다. 둘 다 가능한 선택에 직면해서 여기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 더욱 좋다 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진정한 소원입니다.
고역과 오해, 결박과 고독의 세상을 떠나서 영원히 주와 같이 있을 세계를 생각하면 그 두 협곡에서 죽음을 택할 욕망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더욱 좋은 줄을 바울은 알고 있습니다. 아니 훨씬 좋은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죽음이 단연코 더 좋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기독교인에게 자살을 권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바울이 언제 무슨 이유로 이 말을 했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바울은 지금 옥중에 있습니다.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죄선고를 받게 될지 모릅니다. 사형선고를 받을지 모르는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이런 가능한 여러 경우를 상상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왔고 달려갈 길을 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옥중에서 수년간 매여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기독교인을 위한 죽음의 참 유익에 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가 사형집형을 받게될 가능성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기독교인에게 죽음이란 두려운 일일 수 없습니다. 사망은 이제 기독교인을 쏘지 못합니다. 화살의 끝에 발라 놓은 독이 없어진 것입니다. 기독교인을 더 이상 해치울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에게는 죽음은 오히려 바라는 대상입니다. 성도에게 죽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교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불신자는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신앙인 인지 아닌지를 알아 볼 수 있는 하나의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인이 되는 것은 11시에 맞추어서 교회에 나오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들어 올 때에 헌금함에 헌금을 넣으므로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 더불어서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위해서 여기 준비되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서는 죽음이란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것은 사는 것 만큼이나 동등하게 기쁨으로 택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에게는 다릅니다. 하나님과 바른관계를 맺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아이들이 어두움을 무서워하듯 본능적으로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죽음 곁에서 밤을 새우며 화투를 치고 술을 마십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새로운 의미가 있습니다. 신자들은 죽음의 두려움에 종노릇하고 있지 않습니다. 버마의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은 바다에서 난파를 당해서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학교에 입학하는 아이처럼 기쁜 마음으로 간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평안하다
여러분은 어떻게 죽음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의 본질을 바울은 떠나서 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말은 천막을 만드는 바울에게 친숙한 용어입니다. 떠나서 라는 단어는 세웠던 천막을 허문다는 뜻입니다. 텐트를 걷어서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 주일 우리가 살핀대로 이 세상의 삶은 임시적이요 단지 장막 생활에 불과한 것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서 사는 것이 영원한 삶입니다.
죽음은 천막 생활을 끝내고 영원한 집에 거하는 생활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라고 주님이 하신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아나니 (고후 5:1). 바울은 이런 소망에서 떠나서 라는 말을 사용 합니다.
또 하나의 다른 뜻은 배의 닻줄을 풀어 출범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국의 항구에서 정박한 배의 선장이 한 시간 빨리 떠나서 고국의 항구를 향하려는 욕망에다 바울의 심경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기쁨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생활은 고통이 없는 순수한 기쁨의 생활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잠깐 동안의 고생을 의미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저 세상의 생활은 영원한 기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생활은 싸움과 투쟁을 의미하며 영광 중의 생활은 승리와 평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생활은 우리를 죄의 영역으로 몰아넣지만 영광 중의 생활은 우리를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주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훨씬 더 좋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단순히 고통의 착고에서 벗어나기에 하는 말은 아닙니다. 떠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세상을 떠나는 즉시 주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맑은 의식으로 여러분이 평생 사랑하고 섬겼던 주님과 더불어 교제를 누립니다.
죽음은 한 순간도 우리로부터 주님과 더불어 나누는 교제 를 박탈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전 어떤 순간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교제를 제공합니다. 바울에게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갖는 교제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자신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저하고 있습니다. 숭고한 망설임의 마지막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픈 욕망 만큼이나 살아 남아서 빌립보 성도들과 함께 하고픈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24-26).
앞의 욕망은 훨씬 더 나은 것입니다만 뒤의 욕망은 훨씬 더 절실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둘을 놓고 선택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습니다.
자신만 생각했다면 죽는 것이 훨씬 더 나았을 것입니다. 육신의 장막을 벗어버리고 영광 가운데 주와 함께 거하고 싶은 욕망이 훨씬 더 나은 것임을 알았습니다. 돛을 올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소망의 항구로 귀항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림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 욕망 위주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주저하고 망설였습니다. 바울이 망설이는 이유는 살아남아 형제들을 돕고자 해서였습니다.
바울에게는 두 가지 상반되는 감정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만을 위했다면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편이 훨씬 더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친구들을 위해서 머물러 있는 쪽이 주님의 뜻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고 선언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떠나서 주와 함께 하고픈 욕망이 훨씬 더 컸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설립된 지가 얼마되지 않았고 아직도 그 신앙은 약합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산재해 있는데 바울마저 떠나가 버리면 그들에게 유익할 것이 없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이 편지를 받을 때 한 십년 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교인 중에는 바로 이제 막 우상숭배와 음행에서 빠져나온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부도덕적인 삶에서부터 이제 막 돌아서서 새로운 삶으로 들어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의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은 자기 자신의 욕망보다는 교회의 필요 때문에 순교적인 결단을 하고 살아 남기로 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제단 위에 제물로 자기 욕망을 희생제물로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가 개인적인 욕망을 희생시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결정하실 분임을 고백합니다.
물론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자기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빌립보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들으면서 갖게된 확신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앞날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 앞에 예 나 아니요 라고 할 형편이 되지 못함을 알고 있습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지 선택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못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 고백함과 같습니다.
교회의 필요가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필요 그것이 여러분의 삶을 결정해야만 합니다. 제직으로서 교회를 섬기는 일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교회가 필요해서 임명한 일이면 그 일에 끝까지 충성하는 것입니다. 한 해가 다 되어서 새롭게 임명을 할 때가 되면 모든 사람은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교회가 필요로 해서 섬기는 것 같으면 교회가 필요로 하면 어떤 일이든지 맡기는 일을 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성숙한 성도인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필요가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요 거기에 대해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기쁘게 수용합니다.
바울이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두 사이에서 선택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결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붙들린 바 되어 살 것과 빌립보에 있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거할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면 그가 살아서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 거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여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첫째 이유를 25절 상반절은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라고 밝힙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믿음의 첫 씨앗을 뿌린자입니다. 그러기에 그 믿음이 어떻게 자라는지는 바울에게 관심사입니다. 믿음의 진보 를 위하여 바울은 살아남는 편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봅니다. 여기 진보라는 말은 12절에 복음의 진보 라는 말 가운데 사용된 말입니다. 진보 라는 말은 마치 군대의 진격을 위해서 길을 만드는 선봉대의 작업을 의미합니다. 길을 만드는 개척자의 직무를 감당하므로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을 돕겠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믿음에 있어서 진보를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믿음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진보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올해 한 해 신앙생활을 했으면 내년에 발을 내어 디딜 때는 더욱 힘있게 내어 디딜 수 있어야 합니다. 한 해 동안 신앙생활을 한 것이 새로운 힘을 주어 줄 수 있어야 만이 한 해를 헛되이 보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서 배운 하나님의 진리를 잘 이해하고 실천하여 믿음이 성장하기를 바랐습니다. 동시에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고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기를 바랐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는 너무 듣기에 익숙해 있습니다. 주일날, 수요일 성경공부들이 듣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듣고 깨달을 때도 마음에 기쁨이 있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대로 할 일 많은 세상에 나가서 실천하면 하나님이 직접 허락하시는 놀라운 기쁨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바울은 기쁨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에서 없어서는 안될 요소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라고 고백합니다. 진리대로 사는 사람은 하늘의 기쁨을 맛보는 사람입니다. 입에는 감사와 찬양이 있습니다. 얼굴에는 기쁨의 꽃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표정관리를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동양적인 환경속에 살다가 보니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표정을 나타내지 않고 엄숙히 하는 것이 성숙한 모습처럼 생각을 합니다. 유교문화는 얼굴에 기쁨도 슬픔도 나타내어서는 안되는 것이 군자의 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감정억제와 표현하지 않는 것이 유교문화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의 이유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을 얼굴로 나타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표정을 보아 사람들이 궁금증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무슨 걱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세상사람들 말대로 살기 아니면 죽기라고 살아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고 죽어도 유익한대 이마에 내 천(川)자를 그리면서 찌뿌리고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일을 정말로 한다고 하면 일하는 거기에서부터 나오는 기쁨을 맛보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하더라도 주님을 위한 일 같으면 하면 할수록 더 기뻐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일한다고 짜증내고 표정을 굳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는 것 같으면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자로서 누리는 하늘의 기쁨이 우리를 지배해야 합니다. 마음에 기쁨에 가득하고 얼굴을 통해서 나타나야 하고 입술을 통해서 표현되어야 합니다. 불평대신에 감사와 찬양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 일을 위해서 자기가 남는 쪽을 택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기쁨이야말로 기독교인의 신앙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가 살아서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 거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여기는 또 하나의 이유를 26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함이라 고 밝힙니다. 다시 그들과 같이 있게 됨으로 그를 석방하신 하나님을 더욱 찬양하게 될 것은 당연합니다.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 이라는 단어는 영광 가운데 주님의 도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마 바울이 석방되어 빌립보에 도착하게 되면 왕처럼 영광적인 환영을 받을 것을 암시합니다. 그 때 바울로 인해서 그들의 자랑이 더욱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감사와 찬양이 그리스도께, 그리고 그리스도만을 향하게 될 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또 하나 제가 질문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내가 기뻐하는가 로 물어보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늘의 기쁨을 맛본 사람입니다. 하늘의 진리를 깨달았기에 기쁨이 있고 진리대로 살기에 기쁨을 맛보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기쁨이 있습니까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하는 것을 확실히 아노니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가 살아서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 거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여기는 또 하나의 이유를 26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위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고 밝힙니다. 다시 그들과 같이 있게 됨으로서 그를 석방하신 하나님을 얼마나 빌립보 성도들이 좋아하며 찬양하겠습니까. 어쩌면 바울이 빌립보에 다시 도착하는 그 순간은 어떤 세상의 왕의 도착만큼이나 빌립보 성도들이 환영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석방해서 빌립보에 도착하면 왕처럼 영광을 받을 것을 암시합니다. 그때에 바울을 향해서 그들의 자랑이 더욱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감사와 찬양이 그리스도께 그리고 그리스도만을 향하게 될 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바울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영광보다도 오히려 봉사할 것을 선택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하늘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 교회를 봉사하는 것이 그를 향한 하늘 아버지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바울은 마치 이와같이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세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떠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할지라도 떠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봉사를 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세상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
어떤 사람들은 한국의 교회가 성경적인 기독교라기 보다는 오히려 불교적 냄새가 난다는 말을 합니다. 전적으로 수긍할 이유는 없지만 우리가 귀담아 들을 부분이 있습니다. 서양 기독교에 비해서 정적인 기도와 명상을 강조하는 면이 없잖아 있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 동적인 봉사의 생활은 강조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 봉사 가운데 있는 기쁨을 잊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도피하는 대신 세상 가운데서 봉사하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은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할 일 많은 이 세상에 들어가서 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의 봉사와 증거를 위해 하늘의 영광을 누리는 것을 기꺼이 미루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봉사생활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까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시간마다 배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가 듣고 진리를 깨닫는 것은 진리대로 살기 위해서 입니다. 서양기독교인들에게는 나는 섬기기 위해서 구원받았다 는 격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구원받았습니까 여러분을 구원하셔서 세상에 아직도 살도록 남겨두신 하늘 아버지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큰자는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높아지는 길은 낮아지는데 있습니다. 받는 길은 주는데 있습니다. 부하게 되는 길은 가난해지는데 있습니다.
지혜로워지는 길은 어리석어지는데 있습니다. 높아지고 칭송받는 길은 자신을 부인하는데 있습니다. 사는 길은 죽는데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섬기는 삶은 바로 세상에 오신 우리 주님의 삶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8).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은 이 세상을 섬기기 위함입니다. 죄많은 세상 사람을 섬기기 위해 가장 낮은 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의로우신 분이 불의한 세상에 오심은 불의한 세상 속에서 고통 당하는 이들을 구출하기 위함입니다.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 죄인을 위해 섬기셨습니다. 신앙의 성숙은 섬김의 폭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우리는 봉사를 위해 생을 연장하는 심정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살면서 자기 자신만을 알고 쾌락만을 추구하면 살았으나 죽은자라고 성경은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주간 더 생명이 있어서 산다면 그것은 한 주간 더 주의 백성들을 섬길 수 있는 기회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의 진보를 돕는 일에, 다른 사람들의 신앙생활에 기쁨을 공급하는 일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즐거워 하도록 하는 그 일에 우리의 생이 희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의 숭고한 망설임이 의도하는 새로운 삶의 결단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발견하고 섬기는 신앙의 여정이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에게 새롭게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그 때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귀히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그 때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늘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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