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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몬이냐 베드로냐? (눅 0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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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교는 시몬의 소명 이야기에 대한 설교다. 형식은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 동안 설교자들이 너무 시몬의 순종에만 초점을 맞추어 설교함으로써 전체적인 의미가 왜곡되어 왔다. 이 이야기는 시몬이 제자로 변화게 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따라서 설교의 방향도 회중을 제자로 변화시키는 데로 가야 한다. 이야기 설교의 장점은 본문의 전체적인 흐름의 방향과 일치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때로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무심코 지나치는데, 막상 그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를 되물으면, 실제로는 별로 알고 있는 것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유학을 하면서 이러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는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한국에 대하여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외국에 나가 외국인들에게서 한국에 대하여 이런 저런 질문을 받으면서, 나 자신이 한국에 대하여 너무나도 모르고 있다는 발견을 하였습니다. 그 동안 너무 잘 안다고 무심코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바로 그런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어느 정도 교회 생활을 하신 분들이라면, 이 이야기를 모르는 분이 없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 대한 설교를 한 두 번은 들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핵심이,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는, 경험적으로 볼 때 전혀 가당치 않은 명령을, 베드로가 우직하게 순종하였다는 데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절대적인 순종이 큰 기적을 낳는다"는 것임을, 아마 대부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식이 고정되고, 이 이야기에 대하여 우리가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나면,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더 이상 다른 의미를 발견해 낼 수 없습니다. 다 알고 있다고 하지만, 위에서 말한 내용은 이 이야기를 옳게 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의 부차적인 주제일 수는 있어도, 그것이 이 이야기의 중심 주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태도는 이 이야기의 중심 주제를 영원히 붙잡지 못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넘겨 버려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잘 알고 있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 동안 알고 있던 것들을 모두 덮어 놓고, 새로 읽는 사람처럼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성서를 반복해서 읽으면서도 그 때마다 새로운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오늘 우리 함께 오늘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읽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5장에서부터 시작하지만, 시몬은 이미 4장 38절에서부터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께서는 시몬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예수께서 그 일행들과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서 방문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시몬은 예수를 만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시의 풍습에 따르면, 대개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감동을 받은 사람이 그 선생을 자기 집에 모셔서 대접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본 베드로는 깊은 인상을 받고, 그분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대접하고, 하룻밤 쉬어 갈 수 있도록 배려를 했던 것입니다.
그 때, 시몬의 장모가 사위 집에 와 있었는데, 마침 심한 열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일행들은 이미 그분이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에, 그분이 시몬의 장모를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께 요청을 하였습니다. 호의를 보여준 시몬에게 보답할 겸, 그 여자를 고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생각하기에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분은 그 여자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누군가를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이 열병아, 왜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이제 그만 그 여자를 놓고 떠나가라!"고 꾸짖었습니다. 그 여인에게 열병을 일으켜 괴롭힌 어떤 인물을 앞에 두고 하는 것처럼, 그는 단호하고 엄중하게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러한 꾸짖음 후, 거짓말같이 열병이 내린 것입니다. 며칠 동안 온 몸을 적셨던 식은땀도 잦아들고, 열꽃도 사라졌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이제야 한숨을 쉰 다음,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주방에 들어가 예수 일행을 위해서 음식을 장만하고 있던 딸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시몬은 이 광경을 보고 또 한번 놀랐을 것입니다. 정말, 자신의 집에 모신 이분이 특별한 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분을 자신의 집에 모신 것이 엄청난 영예처럼 생각되어, 내심 흥분이 되었습니다.
그럴 즈음, 집밖이 점점 소란해졌습니다. 시몬이 나가 보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집 앞에 모여 예수님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보아하니, 그들은 병에 걸린 사람들이거나, 혹은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뒤 따라 나오신 예수께서는 모두를 진정시킨 다음,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불러 손을 얹어 고쳐 주셨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 광경을 지켜보는 시몬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왔을까요 얼마나 큰 경외감을 느꼈을까요 아마도 그날 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신기한 광경들이 필림처럼 연이어 지나가면서 흥분을 계속 자극시켰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예수께서는 시몬의 호의에 감사를 표한 다음, 그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시몬도 갈릴리 호수로 나가, 생업으로 복귀했습니다.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신기한 광경을 보고 좋은 가르침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 일까지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저녁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고, 그 날의 흥분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지만, 시몬은 그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고기 잡이에 충실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참 이상한 날이었습니다. 어부 생활로 잔뼈가 굵어가는 동안 그런 날은 처음이었습니다. 아무리 배를 저어 깊은 곳으로 찾아 들어가도, 수 없이 그물을 던져 보아도, 건져 올린 것은 먹을 수도 없는 물고기 몇 마리뿐, 아무런 수확을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부들의 특징이 뭡니까 뚝심과 오기 아닙니까 시몬은 "어디,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한 번 겨뤄 보자"고 생각하면서, 불을 밝히고, 온 밤을 지새워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새벽녘이 되도록 그물을 제대로 채워 보지 못했습니다. 뚝심의 시몬도 결국에 지쳐 포기했습니다. 날이 밝는 것을 보면서 시몬은 그물을 거두고 뭍으로 돌아 왔습니다.
시몬은 이제 집에 가서 한 잠 잔 후, 다시 도전해 보리라고 생각하면서, 배를 묶어 놓고 그물을 씻어 올려 놓는 중이었습니다. 얼마가 지났을까,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려 올려다 보니, 자기 쪽으로 사람들이 몰려 오는 것이었습니다. 웬 일인가 하면서 자세히 보니, 그 앞에는 얼마 전에 만났던 예수께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시몬에게 오신 예수께서는,
"시몬, 자네의 배를 잠시 써도 되겠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시몬은,
"여부가 있겠습니까 여기 마음대로 쓰십시오."
라면서, 배를 내어 주었습니다.
배를 육지로부터 얼마 떼어 놓은 후, 예수께서는 무리를 향해서 설교를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호수에서 뭍으로 바람이 불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아주 좋은 무대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있었지만, 예수의 숨소리조차 정확하게 전달될 정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시몬도 밤새워 고생한 퀭한 눈으로 예수를 응시하면서, 그 가르침들을 경청했습니다. 아, 그것은 평생 처음 들어보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설교를 하시는 예수께서는 매우 강력한 권위로써 무리들을 압도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보는 듯 했습니다. 그렇게 살면 정말 신나고 뿌듯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룻 밤의 피로가 말끔히 가시는 듯했습니다.
그 감동적인 설교는 한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모두들 흥분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마냥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예수께서는 입을 다무셨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마친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또 다른 요청을 하였습니다.
"자, 배를 끌고 저 깊은 곳으로 들어가게. 그리고 그곳에서 고기를 잡아 보게."
이것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요청이었습니다. 이 요청 앞에서 일순간 시몬은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가리키는 그곳은 자신이 지난 밤에 밤새워 수십번 그물을 던졌던 곳입니다. 쓸만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곳입니다. 게다가, 어부로서의 경험에 의하면, 아침에는 고기가 낮은 곳에 몰리기 때문에 깊은 곳에는 가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하마터면 시몬은,
"아닙니다. 그래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라고 말할 뻔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려고 예수의 눈을 쳐다보는 순간, 그는 그의 눈빛에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분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말을 그대로 따라야 할 것 같았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 지는 몰랐지만, 이 요청을 거부할 수는 없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시몬은 말을 바꿉니다.
"선생님, 제가 지난 밤에 밤을 새워 노력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하겠습니다."
시몬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일단은 하라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친구들을 불러, 배를 저어 나아갔습니다. 예수께서 지시한 곳에 이르러, 그는 마지못하는 심정으로 그물을 내렸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자신을 실망시켰던 그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이제 그물을 내린다고 해야, 무슨 일이 달라질 리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얼마 후, 그물을 끌어 올릴 때가 되어 그물의 줄에 손을 댄 시몬은 속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촉감으로 느껴지는 느낌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을 직감하게 된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흥분에 휩싸여 그물을 끌어 올리면서 시몬은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들이 잡힌 것입니다.
친구들을 불러서 그물을 끌어 올리면서 시몬은 불길한 생각헤 휩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지금 매우 중요한 어떤 기로에 서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그 선생님은 단순히 훌륭한 교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통하여, 그리고 자신이 지금 끌어 올리고 있는 엄청난 고기들을 보면서,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계시는 하나님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 속에 결정적으로 침입하여, 결정적인 위기로 몰아 넣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런 그의 자각은 그를 공포감에 휩싸이게 했습니다. 저 위압적인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그를 압도했습니다. 사실, 그 동안 그는 적당한 거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 왔습니다. 더 멀리 해서도 안 되고, 더 가까이 하지도 않는 적당한 거리! 그 거리에서 적당히 섬기며, 적당히 헌신하며, 적당히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덜미를 잡히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급기야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자신에게 다가와 그의 삶을 요구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고기를 다 끌어 올리고, 예수께로 다가간 시몬은 그 앞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진정으로 간청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스스로 그는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침입해 들어오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자각했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자신이 그 동안 전적인 헌신을 하지 못하고,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히 살아왔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 그냥 자신을 무시하고 떠나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시몬의 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무서워하지 말라고, 이제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살게 될 것이라고, 그러한 새로운 삶에 헌신하게 될 것이라고, 이제는 베드로가 될 것이라고 위로를 해 주셨습니다. 과거에는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히 살면서 살았던 죄인이라면, 이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는 의인이 될 것이라고 위로를 해 주셨습니다. 새로운 삶의 비전을 보고, 그 희망으로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펄쩍 뛰어 도약하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위로와 격려는 시몬으로 하여금 그 동안 무시하면서 연기해 왔던 결단을 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예수와 함께 하나님을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하는 그 길에 자신의 삶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육지에 오르자 마자, 잡은 고기를 배에 그대로 남겨 둔채, 예수를 따라 여행을 떠났습니다.
남아있던 군중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의 참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들이 버리고 간 물고기를 한 마리라도 더 가지려고 서로를 밀치면서 혼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예수와 함께 새로운 길을 떠난 시몬은 그 소란을 되돌아 보면서, 자신의 희망 없던 옛 삶을 그들에게 보았습니다. 그가 버려 둔 것은 그물이나 물고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요청을 끊임없이 외면하면서,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만을 위해서 살아 왔던 그의 옛 삶이었습니다. 과거에 그는 그렇게 살아야만 안전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랬기에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벗고 보니, 얼마나 홀가분한지! 이 자유한 삶, 이 해방의 삶을 이제라도 얻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쁜지! 예수를 따르는 그의 발걸음은 마치 어린 사슴의 걸음처럼 가볍고 생기가 넘쳤습니다. 이것은 시몬의 삶을 벗어두고 베드로의 삶으로 도약하는 그의 "허물벗기"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누구를 보셨습니까 시몬을 보셨습니까 그 시몬에게서 여러분 자신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특히, 예수를 통하여 새로운 삶의 길로 여행을 떠나기 전의 그 시몬의 모습 속에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목격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시몬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만나 수 많은 기적들과 가르침을 들으며 많은 시간을 보냈어도, 여전히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히 살아가려 했던 시몬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도 예수를 소개받고 교회를 다니면서, 많은 기적들을 목격하고 좋은 가르침들을 배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보고 들으면서 어떻게 합니까 그 광경에 압도되기도 하고, 그 가르침에 감동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란 좋은 곳이요, 뭔가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하여 교회에 나오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서 멈춥니다. 시몬처럼 말입니다. 더 이상은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히 감동하면서, 적당히 믿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덜미가 잡혀, 전적으로 매달리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재미를 잃어버릴 것 같은 생각에, 적당한 거리를 좁히지 않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우리가 그러한 삶의 방식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한, 우리의 종교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있는 변화도 줄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종교가 단지 장식품에 불과하다면, 그런 종교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종교가 참된 종교가 되려면, 그것을 단지 장식품으로 둘 것이 아니라, 그 종교적 요청에 전적으로 헌신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에는 이러한 시몬들이 많이 있습니다. 헌신되지 않은 종교인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는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사실, 헌신되지 않는 교인들의 수로써 교회가 그 동안 교세를 과시해 왔지만, 오늘날의 교회의 권위가 추락하게 된 것은 바로 이들 때문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를 드나드는 사람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으냐가 아니라, 철저하게 헌신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에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따라 다녔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의 사역을 돕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협조했던 사람들은 그런 무리들이 아니라, 예수의 목적을 알고 그 목적을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한 제자들이었습니다. 무리들의 수가 얼마나 많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헌신되었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에 감동된 시몬이 얼마나 많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목적에 동참하여 헌신하는 베드로가 얼마나 많으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몬에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베드로가 되어야 합니다. 시몬은 예수에게 매료된 종교인들 의미한다면, 베드로는 예수의 사역에 헌신한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시몬입니까, 베드로입니까 질문을 달리 해 볼까요 여러분은 누가 되고 싶습니까 시몬으로 남아있고 싶습니가, 베드로로 변화되고 싶습니까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하여 대부분은 "베드로"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많은 분들이 그냥 시몬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결단으로 몰아세우는 성령의 요청을 끊임없이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요청에 대하여 시몬은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거부할 이유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지못해서 하기는 했지만, 그 요청을 따랐습니다. 그 때, 그는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만일에 그가 그 순간에, "그래봐야 소용 없습니다"라면서 거부했다면, 그는 평생 시몬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고, 그의 삶은 무익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이와 비슷한 요청을 주십니다. 우리가 한계선 밖에서 맴돌면서 살아가고 있을 때, 그 안으로 도약해 들어올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 자주 우리를 몰아 세웁니다. 사람에게마다 그 방법이 다르지만, 그것이 지향하는 목적은 동일합니다. 무리에서 제자로, 시몬에서 베드로로 우리를 변화시키려는 도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전히 무리로 남아있는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시몬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그러한 요청을 무시하고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덜미를 잡히는 것을 두려워하여 적당한 거리에서 살기를 고집하기 때문에 이러한 요청이 올 때 무시하고 거부합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지금의 내 삶은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인도하는 삶에 나의 미래를 전적으로 맡긴다면, 성령께서 어떤 삶으로 우리를 이끌지 모르기 때문에 공포스럽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전혀 원하지 않는 삶으로 인도할 수도 있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그래서 그 요청을 무시하고 거부합니다. 덜미를 채이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피해 다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십니까 성령의 인도하심에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진정한 안전지대에 들게 된다는 것을!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가치있게 된다는 것을! 인간적인 안목으로 볼 때는 그것이 가장 위험하고 불안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것처럼 안전하고 든든한 삶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 언제까지나 시몬처럼 적당한 선 밖에서 맴돌면서, 무리로 남아 있을 것입니까 오늘날 주님께서는 그의 선하고 아름다운 목적을 위해서 헌신할 제자들을 얼마나 간절히 찾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런 간절한 요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무리 속에 파뭍혀 시몬으로 살아가기를 고집하시겠습니까 그리하여 결국 여러분의 인생을 덧없이 소비하시겠습니까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시몬으로 남겠는가, 베드로로 변하겠는가 무리로 남겠는가, 제자로 변하겠는가 바로 여러분이 선택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이 그 동안 알면서도 미루어 온 선택입니다. 바로 이 시간, 성령께서는 여러분에게 이 선택을 하도록 요청하십니다. 이번에도 외면하고 거부하시겠습니까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이 비로소 의미를 가지려면, 베드로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생이 진정으로 신바람이 나려면, 베드로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성패가 바로 이 선택과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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