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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니엘을 꿈꾸며 (단 0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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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신학교의 교수인 신영복씨가 쓴 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북극을 가리키는 나침반의 지남철은 항상 무엇이 두려운 것 마냥 항상 그 끝이 떨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지남철이 그 여린 바늘 끝을 떨고 있는 것은 그 지남철이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려고하는 고민이고 몸짓이고 또 갈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남철이 떨고 있는 한 우리는 그 나침반을 믿어도 좋다. 그런데 반대로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럽거나 고민스럽게 떠는 것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 지남철을 버려야 된다. 왜냐하면 떨지 않는 바늘은 이미 자석의 힘을 잃고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신영복씨는 그것을 고민하는 이 시대, 이 상황을 당연히 고민해야 된다는 뜻으로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을 믿는 사람들의 상황 우리 믿는 사람들이 현실과 세상에 부딪치는 상황과 비슷하다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한 우리 사랑하는 아들들이 겪고 있는 가치관의 혼란을 대변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믿는 사람으로서의 가치관 세계관 혹은 인생관을 가지고 삽니다. 또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 믿는 사람들과는 다른 가치관 세계관이 있습니다. 이 우리가 믿는 자로서의 가치관과 저 세상에서 통용되고 있는 그 가치관 사이에서 우리는 고민이 있고 갈등이 있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길입니다.
우리는 믿음도 세상도 그 어느 것도 버릴 수 없기 때문에 믿음과 세상 사이에 자칫하면 이중적인 잣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기 쉽고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위선과도 같이 느껴지고 그래서 갈등이 되고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기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세상과의 관계속에서 어떤 마음으로 어떤 태도로 살아야 되는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성경을 보면 꿈을 해석하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 둘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인물은 요셉이고 두 번째 인물은 다니엘입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여러분과 비슷한 나이에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며 믿음을 지켰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같이 젊은 청소년들을 보면 이 두 인물이 생각이 납니다.
오늘은 다니엘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는 바른 신앙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전심으로 주를 향하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중고등부 회원 여러분!
저는 여러분 속에서 21세기의 다니엘을 꿈꿉니다. 참으로 이 시대는 다니엘 같은 인물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또 다른 다니엘을 찾고 계십니다. 바로 여러분이 제2, 제3의 다니엘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망했을 때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은 유다의 젊은 엘리트들과 전문 장인들을 바벨론으로 다 포로로 잡아왔습니다. 그 기록인 다니엘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젊은 신앙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바론이라는 이방 문화 속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어떻게 사회생활을 하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다시피 다니엘과 그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고는 바벨론의 궁전 다시 말해서 세속문화의 가장 깊은 곳에서 왕을 보좌하는 일을 하면서도 그들의 믿음을 잘 지켰습니다.
이러한 이방나라 생활 속에서 어떻게 믿음을 지킬 수 있느냐 또 어떻게 바벨론 문화 속에서 잘 살아나갈 수 있느냐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우리가 이 세상속에서 어떻게 믿음을 지킬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세상살면서 신앙도 지켜야 되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잘 살아야 됩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 속에서 사는 것, 그래서 우리에게 갈등이 있고 고민이 있지만 실은 그것이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5절에 보면 주님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기 위함이 아니요 세상에 살며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기 위함이니이다' 이렇게 주님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가 세상속에 살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그렇게 사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믿음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속에 우리가 빠져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야 될 이 세상은 우리가 느끼다시피 세상 문화는 우리 신앙적인 문화보다도 매력적이고 멋있고 아름답습니다. 또 우리는 그 세상의 교육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식이 눈부시고 세상의 지혜가 놀랍습니다. 그러나 그 세상의 그 모든 지식과 문화는 근본적으로 인본주의고, 방법적으로는 진화론에 기초를 둔 세상문화입니다. 사실 이 세상문화는 그것이 우리의 삶 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습관, 우리의 인생관, 우리의 믿음의 정체관을 다 바꾸어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바벨론 사람들은 교육을 시킵니다. 바벨론의 좋은 옷을 입힙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그들의 이름을 바꿔버립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음식도 바벨론의 음식을 먹게 합니다. 그러니까 교육을 바벨론의 교육을 받죠. 음식을 바벨론의 음식을 먹죠. 이름을 바벨론의 이름으로 바꾸어버리죠. 다 바꾸어버립니다. 이것은 이제 바벨론 사람들은 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신을 그 하나님의 신앙을 빼앗아 버리고 온전히 바벨론화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바벨론 속에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니엘은 어떻게 그것에 대처해 나갔습니까
먼저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바벨론의 문화가 자기의 믿음의 정체성을 위협하게 되자 다니엘은 이제 그 어려운 상황 그 갈등의 상황 속에서 그대로 갈등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뜻을 정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뜻을 정했다는 것은 세상과 믿음과의 사이에 선을 그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 속에 살면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지만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과 거부해야 될 것이 우리에게 반드시 있습니다. 그 경계선을 긋는 것이 우리 믿음 생활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 믿음의 선을 긋고 경계선을 긋는 것이 다니엘로서는 왕이 제공하는 음식을 거부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보면 다니엘은 교육, 즉 바벨론의 교육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음식까지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에게는 신앙을 바꾼다는 것이었고 신앙의 절개를 변하는 것이라고 다니엘은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그것을 단호하게 거부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그 문화를 배우고 받아들입니다.
여러분 학교에서는 사실 진화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학교 안 다닐 수는 없습니다. 다녀야 됩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순간에 우리의 믿음이 도전을 받을 때 우리 믿음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훼손이 다가올 때는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분명한 선을 그어야 될 상황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만약에 예를 든다면 학교에 행사가 있거나 공부 때문에 주일을 지킬 수 없고 학교에 나오라 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단호하게 'NO' 하는 선을 그어야 됩니다. 주일을 지킬 수 없을 때 우리는 거기에 선을 그어야 됩니다.
ex> 다니엘 학습법(김동환전도사 이야기)
그는 2000년에 서울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십대 시절에 “다니엘처럼 되겠다!”며 굳게 정했던 뜻을 따라 곧바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진학한 후배 전도사였습니다.
졸업할 당시 그의 4년 동안의 점수를 환산하면 9

9.26이라고 합니다. 이는 지금까지 서울대학교를 수석 졸업한 어떤 학생보다도 우수한 점수였습니다.
“다니엘 학습법” 여러분이 꼭 읽어봐야 할 책입니다. 아니 우리 부모님들이 모두 이 책을 사서 읽기를 권해드립니다.
제가 참으로 놀란 것은 김동환 전도사님의 어머님이 자녀를 양육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전도사님은 어려서부터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공부하라’는 소리를 거의 듣지 않고 자랐다고 합니다. 그 대신 ‘성경을 읽어라’, ‘기도하라’는 소리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매일 성경읽기와 기도시간을 엄수하지 않으면 아예 밥을 주지 않았다니 요즘 우리들의 부모님들과 많이 다릅니다.
전도사님의 어머니는 교회에서 열리는 부흥회에 자녀들을 데리고 반드시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이 기간에 아무리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코앞이라도 부흥회에 참석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1년에 두 차례 하는 교회학교의 동계, 하계수련회에는 말할 필요도 없이 반드시 참석시켰습니다. 자녀의 경건생활이 느슨해진다 싶으면 간단히 말로 넘어가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회초리를 들고 다리에 피멍이 들도록 때렸습니다. 전도사님은 고 3때까지도 어머니에게 피멍이 들 정도로 많이 맞았다고 합니다. 혹 그 자국을 본 친구들이 성적도 좋은 너를 네 어머니는 왜 그렇게 때리느냐고, 혹시 네 어머니가 계모가 아니냐며 놀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맞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도록 훈련시키셨고, 매일 정해진 양의 성경을 보지 않으면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분이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밥 먹지 말아라. 성경 읽지 않으면 공부하지 말아라.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왕 같은 제사장이다. 너는 너를 위해 살려고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 너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대화이자 그리스도인의 호흡인 기도를 하지 않고 육의 양식을 먹으려는 생각을 하지 말아라. 아무리 시험공부가 중요하고 대학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 일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 어떤 일도 하나님의 영광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인 영의 양식을 먹지 않으면서, 그 시간이 아깝다고 성경을 보지 않고 공부한다면 그런 공부는 할 필요가 없다.”
저는 이 어머니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이런 어머니가 있다니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대개 자녀가 중학생쯤 되면 부모님들은 자녀의 학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전도사님의 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공부하라는 이야기는 뒷전이고 기도 했냐, 성경 읽었느냐, 예배시간에 은혜는 많이 받았느냐고 물으셨다는 것입니다. 매일 저녁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돌아가면서 기도훈련을 시키기까지 하였습니다. 하루를 잘 사는 기준이 신앙의 훈련을 얼마만큼 제대로 잘 감당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어머님은 21세기의 ‘한나’와 같은 어머니였습니다. 그녀는 공부보다도 자녀의 신앙훈련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신본주의 교육으로 신앙훈련을 받아온 김동환 전도사님은 중학교 2학년 때 한 부흥회에 참석하여 큰 은혜를 받고 어머니와 함께 새벽기도를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새벽기도를 드리다보니 그는 공부할 때에도 푯대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위해 명확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과 시간을 아껴서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고 합니다. 누군가 김동환 전도사님에게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느냐고 물으면, 그는 그것이 주님을 기뻐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모든 일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는 말씀을 어려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은 그는 주님의 일꾼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중고등부회원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학생들에게 공부할 여건과 시간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도록 준비시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이란 교회 일만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공부한다면 그 일은 분명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다니엘 역시 그 당시의 학문과 지식을 배우는데 누구보다도 열심이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비신앙적 행위는 목숨을 걸고라도 단호히 배격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다니엘을 보십시오. 다니엘은 어떻게 지혜를 냈습니까
오늘 보면 환관장에게 찾아가서 자기 상관에게 찾아가서 말합니다. 도움을 구합니다. 다른 대안을 제시하며 말합니다. 12절에 보면 나는 채식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10일간 채식을 해서 내가 저 바벨론의 소년들과 비교를 해보아서 누가 더 건강한가 시험을 해보십시오라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 환관장은 다니엘의 청을 들어주었습니까 들어 주지 않았습니까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환관장이 다니엘의 청을 들어준 것은 그냥 갑자기 들어준 것이 아니라 사실은 다니엘의 성실함 때문에 다니엘의 청을 들어준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평소 다니엘의 언행이 성실했기 때문에 환관장은 다니엘의 부탁을 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우리와 같지 않는 세상을 설득하려면 우리와 같지 않는 세상을 이기려면 우리는 무조건 선만 탁 그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평소 성실해야합니다. 평소 우리는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을 지킨다고 막무가내로 탁 선을 그어버리면 안됩니다. 평소 그 사람이 나를 성실하게 내 말을 믿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중고등부 모든 회원 여러분!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신앙생활만 잘 하면 만사형통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평소에 얼마나 열심히, 성실하게 공부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최선을 다하여 공부하면서 여러분이 가고자 하는 길들을 부모님과 상의 했을 때 우리 부모님들은 거절할 수도 없고 여러분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학생입니다. 최선을 다해 공부하십시오. 여러분의 실력이 모자란 부분은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이 다른 길을 열어 주십니다. 더욱 합당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두 번째로 어떻게 했다고요 다니엘은 대안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나에게 10일간 채소를 먹게 해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고기를 먹게 하고 누가 더 윤택하고 아름다운지 봅시다. 그렇게 나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니엘은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학생들이나 부모님들이 이상한 지혜를 짜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아니란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교회에서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기간이 되면, 고등부 예배 시간에 학생들이 급격히 줄어듭니다. 부모들은 대개 자기 자녀가 고3이 되면 아이들을 교회학교에 보내지 않고 주일 낮 예배만 드리게 한다든지 1년간 공부에 전념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간 다음 폼 나게 교회에 나가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외의 일반적인 형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신앙과 학업은 조화될 수 없을 까요 신앙생활이 우리 학생들의 학업에 방해가 될까요 정말 교회에 너무 자주 가면 성적이 떨어질 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학업과 신앙의 별개가 아닙니다. 학생들에게 학업과 신앙 모두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선순위가 바뀐데 있습니다.
왜 교회에 나오면 성적이 떨어지겠습니까 믿음의 자녀들이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경배하는데, 그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성적을 떨어뜨리겠습니까
문제의 원인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되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혹은 프로그램에 집중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을 낭비한다면 그것은 교회에 나오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중고등부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앞에 바른 신앙을 가지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와 함께 하시어 지혜와 지식을 더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억지 말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전도서 2:2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자에게 지혜와 지식을 더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다니엘이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처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마음껏 지혜와 지식을 허락하십니다. 다니엘은 수많은 포로들 중에서 유독 바벨론 왕이 주는 진미와 포도주를 거부했습니다. 다른 포로들은 잠잠한데 다니엘이 왜 그렇게 튀었습니까 우상에게 절한 음식을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단호히 뜻을 정하여 결심하였고 자신의 신앙 양심을 지켜내는데 목숨을 걸었습니다. 보통 우리 같았으면 어땠을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내 사정을 다 아시니까 이해하시겠지 하고 넘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니엘의 중심을 아시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늘의 지혜와 지식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소년 다니엘의 지혜와 지식이 그 당시 바벨론 제국의 내로라하는 석학들보다 열배나 더 지혜로울 수 있을까요 놀라지 않습니까 인본주의 상식으로 생각할 때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니엘을 통하여 이를 분명히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지혜를 주셨고 그 지혜를 소유한 다니엘은 세계 최강대국 바벨론의 뛰어난 석학들보다도 열 배나 지혜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지혜를 소유한다는 것은 너무나 귀한 일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다짐하는 그리스도인에게 허락되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가 다니엘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지혜를 구할 때, 결코 그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속히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에게 준 놀라운 특권이며 엄청난 특권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경배하는 시간이 아까워서 그 시간에 과외를 하고 학원가는 것이 타당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주신 지혜를 주시겠습니까 안 주십니다. 주실 수가 없습니다.
III. 결 론
사랑하는 이 시대의 다니엘 여러분! 뜻을 정하기 바랍니다. 이제 제발, 더 이상 세상의 학생들이 주일날 과외하고 학원 간다고 똑같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시간을 아까워하여 교회에 나오지 않는 어리석은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기 바랍니다. 주일에는 하나님께 최우선으로 시간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왜 삽니까 왜 공부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학생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공부하지만, 믿음의 학생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기독 학생은 주님을 위해 공부하고, 남 주기 위해서 공부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고, 그들을 돕고, 하나님의 기쁜 뜻을 이루기 위해 힘들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모든 기독 학생들이 다 명문대 인기학과에 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각자에게 맡겨진 달란트대로 자신의 고유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등한히 하거나 시간을 흘려보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허락하신 달란트를 제대로 꽃피우기 위해서는 최선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철저하게 성경 말씀에 복종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존재이며, 여러분이 왜 살아야 하는지 정체성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맡겨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하늘의 신령한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인해 세상의 뛰어난 자들 위에 뛰어나게 되며 앞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의 방식으로 공부할 때 비로소 세상의 실력자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에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니엘처럼 세상의 석학들보다 열 배나 더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며 자신의 영역에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 공부하고자 눈물로 지혜를 구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외면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 분명히 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한 자들에게 그 지혜를 마음껏 부어주실 것입니다.
다니엘서 오늘 15절 말씀 에 보면 그 얼굴이 더욱 아름다워졌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과학적으로도 채식이 고기나 포도주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길은 우리가 자연적인 그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모든 사람의 지혜와 능력을 뛰어넘습니다.
뿐만 아니라 16절에 보면 다니엘은 계속해서 채소를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선을 그은 사람은 그 선을 그은대로 계속해서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세상이 우리를 위협했지만 한번 승리하고 나면 이제 세상이 우리를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바로 이 선 믿음의 선을 긋지 못했기 때문에 이 믿음의 선을 탁 짤라서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세상에 지고 세상에 조롱당하고 우리는 갈등하고 고민하면서 평생 능력 없는 하나님을 맛보아 알 수 없는 믿음 생활을 우리는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단하는 자 믿음의 선을 그은 자 그 사이에다가 축복과 능력과 기적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선을 그어야 됩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성실의 지혜로 우리는 살아가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돕습니다. 그리고 세상도 우리를 반드시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간증이요 우리의 선교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성실하게 살면서 믿음의 선을 그은 사람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위대한 일군으로 세움받게 될 것입니다. 이 새롬교회에 속한 모든 중고등부 회원들이 정말 귀한 이 시대의 다니엘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여러분, 어떤 믿음의 선을 긋고 사십니까
여러분, 어떤 것에 여러분은 세상과 갈등하고 고민하면서 어느 만큼 믿음의 선을 긋고 사십니까 그것은 처지와 형편에 따라 각자 조금씩 다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도 어떤 믿음의 선도 없이 세상과 어울러져 산다면 죄송하지만 그 사람은 크리스쳔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어떤 믿음의 그어야 될 선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21절에 다니엘은 고레스왕 원년까지 있느니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은 자기를 사로잡아갔던 느브갓네살 왕이 그리고 그 후대인 다리오 왕을 넘어서 파사의 새로운 왕조 고레스가 설 때까지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 믿음을 무너뜨리려고 했던 세상은 망한 것입니다.
우리 믿음을 무너뜨리려고 했던 그 사람은 그 대상은 망합니다. 그래도 믿음을 지킨 성도는 다니엘은 새로운 왕조가 설 때까지 오래오래 무궁하게 살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이 고레스왕때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이 해방되고 돌아오게 됩니다. 그의 소망도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선을 긋고 사는 성도에게 주신, 다니엘을 꿈꾸며 살아가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붙든 자의 축복인 것입니다.
세상 것을 붙잡기 위해서 믿음의 선을 지워버리고 세상으로 나가버린 사람들의 길은 행복도 잃어버리고 신앙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을 거절한 사람은 믿음도 지키고 세상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니엘과 같이 믿음의 선을 그어야 됩니다. 믿음의 선을 그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맛보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을 꿈꾸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갈등이 있습니다. 고민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 믿음의 정체감을 상실할 수 있을 때 내 믿음의 손해를 볼 수 있을 때 반드시 다니엘을 생각하십시오. 믿음의 선을 반드시 그으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을 꿈꾸며 믿음의 선을 그은 자만이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라는 것을 체험하고 간증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예배드리는 모든 중고등부 학생들이 이시대의 다니엘로 인정받고, 여기에 있는 우리 어르신들은 이 다니엘을 키워내는 믿음의 사람이시기를 주의 말씀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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