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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경건한 삶의 축복 (시 8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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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시편 84편의 이 구절들을 함께 고려하면서 특별히 나는 3절의 메세지를 다루고자한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우리가 이 메시지를 연구하고자 하는 것은, 이 시편 84편의 저자가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경건한 삶의 축복을 향유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 시편의 저자에게는 이 경건한 삶의 축복이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하였다. 그는 온 세상을 다 준다 해도 이것과 바꾸지 않겠다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경건한 삶의 축복은 그의 인생의 의미 전부였다. 모든 일이 잘 될 때 뿐만 아니라 자신이 거의 절망에 빠질 정도로 만사가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더욱 그러하였다. "온 세상에서 이에 비견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그는 말한다. 시인은 이런 의미로 계속 찬양을 올리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에서 시작하여 그는 "주께 의
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12절)로 끝을 맺는다. 우리는 '복이 있나이다' 라는 단어를 '행
복한'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시편 기자의 모든 주제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행복과 어떤 식으로든 비길 수 있는 행복이 땅 위에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형편은 어떠한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의 큰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는 이 시인처럼 그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시편 기자의 체험을 공유하고 있는가 나 자신에 관한 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생명 그 자체보다 낫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가 또 다른 시에서도 다윗은 이런 식의 말을 하고 있다. 여호와의 집의 궁정이 우리에게는 과연 사랑스러운가 이는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이런 교통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모든 삶과 존재와 체험 가운데 최고의 것인가
우리가 지금 이 위대한 시편의 메시지를 고찰하고 있는 것은 그런 상태에 도달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이다. 우리가 이 시인이 했던 것처럼 그런 경건의 삶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모종의 것들이 있다고 시인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첫 두 절에서기자는 두 가지 위대한 선결적 사항을 다루고 있다. 우리가 이 둘에 대해 선명하게 파악하기 전에는 앞으로 나아가 보아야 아무 소용도 없다.
종교는 결국 하나님을 아는 문제이다. 종교는 일차적으로 생존의 문제가 아니며 선한 삶 혹은 선행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 종교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여러분이 보는 대로 기자는 계속하여 이 점에 관해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고 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힘을 얻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그 다음에 기자는 지혜로운 교사답게 그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주의깊게 말해 준다. "나는 그것을 제단에서 얻었으며 다른 길은 없다"고 기자는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박힌 그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아는 길이 없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요 시초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아야만 한다. 거기에는 단 한 길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거듭하여 그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이것은 주님 자신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이미 제일 원리를 부인하고있는 셈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갈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찢긴 몸과 그의 흘린 피를 통해 나아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를 위해 수축된 산 길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갈보리 언덕 위의 십자가가 제시하는 길이다. 우리를 하나님의 존전으로 데려다 주는 유일한 것은 '예수의 피'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히10:19)
우리가 이 시편에서 보게 되는 두 번째 사항은 하나님에 관한 이 객관적 진리가 극도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느낌과 체험, 기분과 상태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행복한 느낌을 줄 수 있는 것들은 많다. 그러나 행복한 느낌이 반드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으로부터 행복한 감정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시인에 의하면, 우리가 위대하고 장엄하신 하나님의 인격을 알고 의지할 수 없을 경우 실질적으로 우리는 아무런 토대도 갖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예비적으로 고려할 사항들이 있으므로 우리는 이를 깨닫고 수용해야 한다. 그러나 시편 기자에 따르면, 우리가 깨달아야 할 또 하나의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에 관한 진리이다. 이두 가지는 말하자면 기독교 진리의 두 기둥과 같다. 기독교의 진리
는 일종의 타원형이다. 거기에서 하나의 초점은 하나님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초점인 인간
이 있다. 우리가 이 시편 기자의 체험을 함께 향유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해서도 바로 알아야 한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
기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음으로 우리는 시선을 낮추어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체험의 본질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고를 올바르게 해야 하지만, 또한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들에 대한 사고도 똑바르게 해야 한다. 책을 통해 성도들의 생애를 읽어 보라. 여러분과 나처럼 이 세상을 살면서 삶을 정복하고 지배하며 모든 역경 가운데서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던, 이 땅을 밟은 거룩한 남녀들의 전기를 읽어 보라.
여러분들이 그런 책들을 읽어보면 그들이 자신들에 관하여 일정한 사실들을 깨달았음이 곧
드러날 것이다. 그것은 누구에게서나 변함이 없는 사실이었다.그렇다면 이 일정한 사실들은 무엇인가 시편 기자는 이것들을 하나의 그림과 같은 형태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다행이다. 그 그림은 사실 그 자체를 잘 설명해 주고있다.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라고 시인은 말한다. 시인이 여기에서 무언가를 다소 불평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 구절의 의미를 받아들임으로써 여기의 진술을 전적으로 잘못 해설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즉 시인의 말이 다음과 같은 뜻이라는 오해이다. "아, 참새와 제비도 장막 안의 주의 제단에서 보금자리를 지을 수가 있는데 나는 주의 장막을 멀리 떠나서 이곳을 발견할 수가 없나이다." 물론 이와같은 견해는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동물들의 몸뚱이가 쪼개지고 불태워지는 그 제단 위에 우리가 어떤 보금자리를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있을 수가 없다. 제단은 참새나 제비에게 안전한 장소가 아니다.
그렇다. 시편 기자가 말하고 있는 바는 실질적으로 이것이다. "나는 참새와 같습니다. 나는 제비와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제 집을 얻은 참새와 같고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은 제비와 같나이다. 그리고 감사 하옵게도, 나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나의 새끼를 두기에 적합한 위채, 올바른 조건이 된다고 내가 깨달은 곳은 주의 제단입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여기에 비밀이 있나이다. 내가 진실로 나의 곤핍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응답과 공급을 받는 것은 오직 내가 자신을 참새와 제비로 여기게 되었을 때 뿐이니이다."여러분은 신약 성경 곳곳에서 이 진리가 보다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방식으로 완성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 구절이나 한 곳을 예로 들어보자. 주님은 자신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신다(눅5:32) 또한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고 말씀하셨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는 말씀도 있다(눅19:10)
다시 말해 우리는 곳곳에서 인간은 누구나 이런 필요를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영적 구원의 축복을 향유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그 필요성을 이미 발견한 사람들뿐이다. 결국 그토록 많은 사람들, 즉 그리스도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비극은 자신들의 필요를 실질적으로 전혀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필요성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 또 그것이 그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알고 그에게 날아가지 않는 이유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결코 들여다보지 못한 거이다.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몰고 가고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 도피하도록 만드는 것, 즉 영혼의 궁핍을 이 놀라운 그림에서 기자가 밝히고 있는 대로 추적해 보자 참된 그리스도인의 특징으로 언제나 나타나는 일정한 요소들이 있다. 첫째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왜소함을 인식한 사람이다. 참새와 제비가 그렇다. 참새는 몸집이 가장 작은 새들 가운데 하나이다.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사실상 이런 취지의 말을 하고 있다. "나는 내가 작은 참새 또는 제비와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나이다."여러분이 알다시피 생명의 위대함과 광대함을 깨닫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물론 사고가 없이는 아무도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곤란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삶에 완전히 정신이 팔리기 쉬우며 이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고 묵상하고 숙고하기 위해 한 순간도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당연시하고계속 그렇게 나아가다가 어떤 사람은 어느날 갑자기 사고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왜소함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그는 자기가 참새와 같을 뿐임을 느끼게 된다.
좀더 설명해 보자. 우리가 처해 있는 이 거대한 우주를 생각해 보라. 특히 20세기 중에 일어난 과학의 발견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신비한 우주를 밝혀 주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현 시대에 많이 있다. 과학자들은 수천 억, 수조마일 등을 이야기하고 이 모든 거대한 별자리들이 숫자에 있어서 거의 끝이 없음을 논한다. 이 사람들은 "그 모든 것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즉시 이렇게 추론한다. "이처럼 거대한 우주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 시편 기자는 제8편에서 이를 아주 뚜렷하게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라고 말한 다음 즉각 이렇게 응답한다.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시인의 말은 "그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아는 문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의 구원에 정면으로 맞서서 이 구원을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조소하기까지 한다. "당신네 그리스도인들은 지나치게 내성적이며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이다. 그대들은 자신들의 중요성을 과장하고 있다. 당신이 누구길래 전능하고 영원한 하나님이 일개인인 당신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가"
그런 이유 때문에 기독교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그들은 말하면서 다른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 세상에 우글거리는
모든 대중들에 대해 생각한다. 또 이렇게 묻는다. "일개인이 무엇인가" "개인의 가치가 어
디에 있는가 일개인이 한낱 총알받이 이상의 무어 라도 되는가 하나의 폭탄이 터짐으로써 수많은 삶들이 갑자기 죽어 가는데 나는 누구란 말인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옳은가 나를 위한 어떤 자리라도 있는가"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피조물의 광활함과 인류의 거대한 크기에 위압감을 느낀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일개인으로서 인식하고 있으며 어떤 정체성을 의식하고 있다. 나는 재 자신의 삶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작고 무의미하게 보이는가 누가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으며 나에게 어떤 희망이 있는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런 생각에 오싹 소름이 끼치고 압도당한다. 그들은 말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결국 커다란 덩어리 속의 작은 얼룩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인간이 거대한 톱니바퀴 속의
한 작은 이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 바퀴를 제외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개인이 설 여
지가 어디에 있는가"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모든 피조물의 광활함과 더불어 자신의 왜소성
및 외견상의 무가치성을 동시에 인식하게 된다. 한낱 참새와 제비일 뿐이다.
내가 지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든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모종의 그런 의식을 가지지 않는 경우가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을 이 거대한 생의 광장 속에 있는 하나의 작은 초점으로 보고 자신의 말할 수 없는 왜소성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 왜소하여 결국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왜소함과 무가치함에 대한 의식 외에도 '집 없음'에 대한 의식이 존재한다. 이 점을 시편 기자는 매우 두드러지게 부각시킨다. 마침내는 "참새도 제 집을 얻었다"고 그는 말한다. 참새는 얼마동안 이 집을 찾았었다. 그리고 제비도 마찬가지로 드디어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다. 제비는 그 보금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날아다녔었다. 제비는 어떤 곳이 유망한 듯이 보여 그 곳으로 가 보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곳은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또 다른 곳, 다른 곳으로 계속 찾아가 보았다.
그러나 허사였다. 그러므로 그 가련한 제비는 결코 보금자리를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작은 참새도 그러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참새는 제 집을 얻었으며, 제비도 작은 보금자리를 짓고 그 안에서 자기 새끼들을 기를 처소를 발견하였다. 이 모든 것은 결국에 가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전에 불가피하게 찾아오는 느낌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집 없음에 대한 의식, 혹은 다른 말로 표현하여 쉴 곳 없음에 대한 깊은 의식이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지 않은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우리 자신도 우리가 만들지 않았다. 단지 여기 세상에 있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할 뿐이다 우리는 세상의 광활함을 인식하게 되고 기타 세력들과 요인들을 의식하면서 어떤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한다.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인생에 어떤 의미 혹은 의의가 있는가 이 모든 삶에 어떤 궁극적인 목적과 목표가 있는가 사람들은 이런 의문들에 직면하기 시작하는 순간 전술한 바와 같은 쉴 곳 없음과 집 없음을 느낀다.
주께 의지하는 자만이
현대 세계는 이런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이 사실을 얼마든지 길게 예증할 수 있다. 아시다시피 남녀 가릴 것 없이 오늘날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붙들고서 어느 정도의 평화와 안식을 얻고자 애쓰는 것은 바로 이러한 쉴 곳 없음에 대한 의식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사이비 종교와 미신이 성행한다. 예전의 위안을 주던 그 철학은 두 번의 세계 대전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1914년 이전에는 삶이 마침내 점증하던 아픔들을 능가하고 인간이 안정을 얻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훌륭한 논증이 제시될 수 있던 때가 존재하였다. 좌우간 이론상으로는 그러하였다. 아마도 영원히 계속될 위대한 번영의 시대가 도래하며 사람들은 서로를 잘 알게 됨으로써 서로 미워하는 일을 중단하고 전쟁을 추방할 것이며, 모두가 함께 행복을 누리며 삶이 조화를 이룰 것이라고 믿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에는 그러한 추론에 상당한 근거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이제 사라졌다. 그 환상은 부서졌다. 우리의 모든 삶은 흔들리고 요동해 왔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안식과 평화를 추구하고 있다. 마음속에는 어떤 안식 없음의 의식이 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새로운 질병들이 우리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다.
이른바 특효약들이 예전의 전염병들과 질병들을 하나씩 차례로 치유하고 있는 반면 이 새로
운 질병들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다수는 스트레스와 긴장으로 인한 질병이다.
심장 질환, 혈압 이상과 신경의 긴장, 근심, 노이로제, 기타 이런 등등의 온갖 질병들이 얼마
나 보편화되고 있는가! 이것은 정부와 국가 차원에서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이 모든 환자
들을 어디에 수용하고,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모든 것은 시편 기자가 우리에게 그토록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바로 쉴 곳 없다는 의식의 표출이다.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작은 참새 혹은 제비 같은 느낌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위한 집을 찾을 수가 없다. 나의 보금자리를 안전하게 지어 거기에 알을 낳아서 어린 새기들을 기를 수 있는 어떤 처소를 찾았으면 좋으련만 어디에서도 그런 곳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로 날아가 모았으나 점점 더 지치고 피곤해졌을 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였다. 날아다니며 찾고 또 찾았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여러분은 이에 관해 뭔가 감을 잡았는가
모종의 지점에 이르기까지는 우리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먹고 마시고 하루하루를 계속 살아가면서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주지 않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떤 계기가 생겨 우리는 전술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 계기는 어떤 질병이나 사고, 누군가의 죽음 혹은 모종의 재난이다. 뭔가 마음속에 변화가 일어나 우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한다. "안식할 처소가 있는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는 어느 곳이라도 있는가 나에게 평온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어떤 철학이라도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소설들을 읽어보지만 다 읽고 나면 소설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
지성적으로 실 편력하여도 만족이 없어 술을 탐닉하거나 쾌락을 추구할 수도 있다. 정치에마음을 쏟거나 사회 활동에 들어갈 수도 있다. 어떤 철학의 분야에 심취하기도 한다. 예술과
음악 등 수천 가지 것을 잡아 본다. 그래도 쉼 없는 상태는 계속된다.
이런 것들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그런 것들은 '세상을 어둠에, 그리고 나에게' 남겨 둔다. 춤도 끝나고 놀이도 끝나고 나만 홀로 남는다. 내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어떤 존재인가, 내가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가, 도대체 이 모든 것이 무엇인가" 당혹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 모든 추구와 찾기를 종결시킬 어떤 집, 어떤 안식의
처소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온 세상이라도 다 주겠다"고 말한다. 여러분이 성 어거스틴 같은 사람의 고백록을 읽어본다면 이 모든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 진상을 알게 될 것이다. 어거스틴은 명석한 사람이었다. 그는 위대한 지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 안식의 처소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날개를 푸득거리며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작은 참새와 같았다. 어는 곳에서 안식의 처소를 발견하였노라고 생각하고 나면 어느새 그렇지 않음이 드러났다. 그는 또 다른 사상을 추구해 보았으나 그것 역시 망상이었다. 이런 식의 여정이 계속되었다. 어떤 사람이든 이런 쉼 없음의 의식, 집 없음의, 느낌을 체험해 보지 못했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본능이 있다. 즉 그것은 귀향 본능 혹은 귀소 본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본향, 안식의 처소가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발견할 수가 없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본질적 인식
그리스도인들, 즉 이 시편 기자가 향유한 바와 같은 종교의 축복을 향유하게 된 자들의 세 번째 특징은 전술한 것들을 느낌과 동시에 내가 지금까지 제시해 온 이유들 때문에 자신의 의지가 없음과 자신의 무방비 상태를 자각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본문의 이 작은 새들은 그 것을 알고 있다. 큰 새들이 있고 고양이들과 기타 온갖 짐승들이 있다. 피조계의 이런 적들이 그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을 노려 본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안전한 장소, 자신들을 위협하는 이적들의 세력권을 벗어난 어느 곳을 찾고 싶어한다.
여러분은 잔디 위의 참새를 관찰해 본 적이 있는가 참새는 그 곳에서 무언가를 계속 쪼아 먹다가 어떤 사소한 움직임이라도 발견되면 즉시 뛰어오른다. 참새는 뒤를 보고 앞을 주시하며 옆을 지켜보는 등 사방을 살핀다. 여러분은 그보다 더 신경이 예민한 생물을 본 적이 있는가 참새의 본능은 이런 경계와 자기 보호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하시라도 어떤 육식성 짐승이 자신을 덮칠라 치면 참새는 날아가 버린다. 이 작은 새들의 무방비 상태와 왜소함과 무기력함이 그 어떠한가!오늘날 그토록 많은 삶의 비극은 허다한 남녀들이 이런 적들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전혀 자신의 의지가 없고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태와 무방비 상태를 의식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길에 들어서게 된다. 우리를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이런 처지를 자각하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가 그중 몇 가지만 살펴보자. 많은 사람들은 어느 날 홀연히 어떤 질병에 걸릴 때까지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인생살이를 지내 버린다. 나는 이를 아주 흔하게 목도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조롱하고 나의 기독교 신앙고백을 조소하면서, 자신들은 나를 바보로 생각한다고 여러 가지로 주저 없이 말하곤 하였다. 모든 것이 정상이고 직장이나 사업이 잘 되어 가며, 물질에도 부족함이 없고 아내와 자녀들도 마냥 행복하며 만사가 완벽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나 혹은 다른 어떤 그리스도인을 병적인 혹은 내향적인 사람으로 간주하곤 하였다.
그들은 "왜 인생을 즐기지 않는가 왜 그토록 불행한 삶을 영위하는가" 라고 말한다. 그들은 어느 날 와락 덤벼들게 될 적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거기 잔디 위에서 음식을 쪼아먹으면서, 그리고 이를 한껏 즐기면서 주의에 모여든 온갖 적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돌연 어느 적이 타격을 가해 온다. 질병, 사고 등 그런 것들이다.지난 19세기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설교가이자 교사였던 토마스 찰머스 박사 같은 사람을 예로 들어 보자. 그는 10년동안 '기독교 설교가'로 있으면서도 전술한 바와 같은 한심한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그는 기독교 설교가가 아니었다. 자신은 이 복음을 안다고 생각했고 전적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상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적' 설교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러다가 10개월 동안 스스로 어쩔 도리 없이 비탄에 잠긴 채 꼼짝 못하고 침상에 누워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그를 깨어나게 하였다. 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음을, 자신을 지탱해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발견하였다. 자신은 무방비 상태, 전적인 속수 무책의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어떤 사고가 우리의 마음을 약하게 할 수도 있다. 죽음이 우리 가족에게 찾아 오거나 우리를 위협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왜소하며 얼마나 나약한가를, 그리고 어찌할 수 없이 얼마나 무력한 처지인가를 자각하게 된다. 이런 일들이 찾아올 때 우리에게 해결책이 없다. 그런 것들에 대해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으며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어디에 호소해야 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물론 우리는 이해력이 점차 영적으로 변할 때 세상에 의해, 육신에 의해, 마귀에 의해 우리에게 가해지는 맹공격을 의식하게 된다. 우리는 아마도 높은 이상과 훌륭한 비전을 가지고 인생을 출발할 것이다. "과거에 어떤 사람들은 실패하였으나 그렇다고 우리가 그렇게 실패하라는 법은 없다"고 우리는 말한다. 상황에 따라 자기를 잘 조종하며 앞으로 계속 전진할 수 있다고, 또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자신 만만 한다.
그러나 공격이 찾아온다. 우리는 갑자기 그 순간까지 가지고 있던 귀중한 무언가를 상실한다. 순결, 깨끗함, 도덕 정직 등 우리가 그토록 높은 값을 매겼던 모종의 것들이 사라져 버린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서 떠나 버린다. 그런 것들을 빼앗겨 버린다. 적이 찾아와 습격할 때 우리에게는 자신을 그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방어 수단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자신의 마음속에 죄가 있음을 깨닫기 시작하는 자들만이 자신의 본성 자체가 비뚤어져 있고 왜곡되어 있음을 자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마음속에 그릇되고 불결한 무언가가 있으며 자기 안과밖에 죄의 세력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 사실 외에도 온 세상이 자신과 맞서고 있다는 것, 육이 자신과 투쟁하고 있다는 것, 마귀가 그 모든 일 배후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을 보기 시작하면서 자신에 대해 무서워하고 두려워한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감히 이런 말을 하지 못한다. "어떤 유혹이든 올테면 오라. 내가 얼마든지 버틸 수 있노라." 그들은 세상에 가장 위험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 자기가 강하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쓰러졌다는 것을 발견한다. 다시는 넘어지지 않으리라 결심하고서
집 밖으로 나갔지만 자신이 처란 곳이 어디인지 알기도 전에 넘어졌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
은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하며, 얼마나 무방비 상태인가를 느끼기 시작한다. 자신은 마치 그
작은 참새, 그 조그마한 제비와도 같다. 아니 이런 피조물들이 그토록 힘있고 강하게 보인다.
여러분은 이런 깨달음에 이르렀는가 여러분은 도덕적 투쟁에 대해 무언가를 체험하였는가 온 힘을 다해 싸우지만 자신을 공격하는 적들 앞에 쓰러지고 마는 것, 이것이 무엇인지
를 알게 되었는가
가장 고귀한 내 영혼
이제 마지막 사실을 설명할 차례이다. 이것은 대단히 기이한 것이다. 시편 기자는 본문에서 말한다.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이 작은 새들은 놀라운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지성적으로 사물을 이해하지 못하고 본능적이고 직관적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기이한 일이 어린 새끼들을 기르는 것임을 알고 있다. 새들은 알을 낳고 품어 부화시키며, 그 어린것들을 기르고 보호하고 먹여, 마침내 새끼들이 보금자리에서 스스로 날아올라 자신의 삶을 시작할 만큼 발전하고 성숙하게 만든다. 그 작은 새에게는 자기 새끼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 그 때문에 새는 어떤 집 혹은 보금자리를 지을 수 있는 처소를 찾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건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비밀, 본문에서 그토록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는 이 시편 기자의 실질적인 비밀은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자신의 영혼임을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본 시편은 다윗 왕의 시이다. 그는 강한 전사로서 골리앗을 죽인 사람이었고 많은 승리에 대해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자신의 적들을 모두 정복했던 사람이었고, 이스라엘에 지금까지 존재한 왕 중에 가장 위대한 왕이었으며, 인간들이 자랑하고 싶어하는 위대하고 화려한 장관과 의전 및 많은 것들을 향유하였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 것들이 아니다. 나는 위대한 왕이지만 내가 가진 가장 값진 소유물이 나의 영혼임을 나는 발견하였다. 이것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 다른 모든 것들은 내가 떠나 갈 때 뒤에 남기고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안에 불멸의 것이 존재한다. 영원토록 존속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이것뿐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 두신 것,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생령이 되게'(창2:7) 할 때 인간 속에 불어넣으신 것이다." 그 영혼은 인간 모두에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인을 찍어 주는 것이다. "내영혼아! 가장 고귀한 그것, 바로 이것이 내가 지키고 보호하기 원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뢰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 바울의 말은 사실상 이런 뜻이다. "아무래도 좋다. 현 상황이 나를 거스르고있지만 나는 전적으로 행복하다. 왜 나의 형혼과 영혼의 안전 보장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의탁하였기 때문이며,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대심판의 날까지 '나의 의뢰한 것(위탁한 영혼)을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영혼은 안전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점을 어떻게 기술하셨는지 여러분은 기억하는가 주님은 마태복음 6:25-34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실 것인지 혹은 무슨 옷을 입을 것인지에 대해 걱정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세상의 모든 백성들은 이런 것들에 관심이 있다. 그와 같은 것들을 따라가는 자들은 이방인들이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에 대해 염려해야 하는가 답이 여기에 있다. "너희는 먼저 그(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오, 그렇다. 육체가 중요하지만 영혼처럼 중요하지는 않다. 그대의 영혼은 어떤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홀은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영혼)을 바꾸겠느냐"(막8:36-37)시편 84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아, 나는 작은 참새, 제비와 같다. 가장 값진 소유물을 가지고 있다. 새들의 경우에는 그 소유물이 어린 새끼이지만 나의 경우에는 영혼이다. 나는 이것을 깨달았다. 나의 영혼이여! 온갖 적들이 공격하는 이러한 마당에 어느 안전한 곳에 나의 영혼을 둘 수 잇는가 나의 영혼이 거기에 있으면 영원토록 안전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어떤 곳은 없는가 그것이 내가 알기 원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우리 모두로 하여금 구원을 추구하고 찾게 만드는 필수적인 단계들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내 안에 이 영혼이 있다는 사실과 우리의 육체가 무덤 속에서 부패하고 벌레에 먹히고 소멸해 갈 때 이 고귀하고 지극히 값진 영혼이 계속하여 끝없이 존재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혼의 안전! 그것이 궁극적인 문제이다. 여러분은 자기 영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가 여러분은 영혼에 대해 경성하였는가 여러분이 자신의 영혼에 대해, 그리고 이 세상에서 자기 영혼을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대해 하나님께 장차 고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는가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시편 기자는 참새와 제비를 들어 이러한 요망 사항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시인의 묘사는 긍정적이다.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닌 영광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내가 지금까지 여러분 앞에 제시한 이상의 네 가지 곤핍을 충족시킨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이 시편의 의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으로서 이 모든 것을 매우 흥미 있게 표현하신 것 같다.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자신들에 대해 염려하고 걱정하지 말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부언하셨다. "두려워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10:29-31). 참새에 대해서도 그러하다면 너희를 향한 천부의 관심과 마음은 얼마나 크겠는가 이것이 주님의 속뜻이다.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작은 참새와 똑같다고 느껴 본 적이 있는가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처럼 작은 존재, 작은 개인, 작은 실체이다. 이 거대한 세상에서 나의 중요성이 얼마나 되겠는가사랑하는 친구여, 당신에게 그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겠다. 누가복음 8:43-48의 이야기를 읽어 보라. 어느 날 오후 주님은 야이로라는 위대한 사람의 따라 매우 중한 병에 걸려서 사실상 이미 죽어 버린 그의 어린 딸을 보러 가고 계셨다. 야이로를 돕기 위해 주님은 그 집으로 발걸음을 급히 재촉하셨다. 거대한 군중이 그를 옹위하고 있었다. 군중은 거의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로 글자 그대로 사방에서 주님을 에워싸 압박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주님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제자들은 주님을 향해 말했다.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눅8:45) 그런데도 누가 나를 만졌느냐고 말씀하시나이까 실로 수천의 사람들이 주님을 만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다.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에 그 거대한 군중 가운데서 한 초라한 여인이 걸어 나왔는데, 그 여인은 부끄러워서 거의 얼굴도 들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제가 당신을 만졌나이다." 홀은 적어도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제가 당신의 옷자락을 만졌나이다." 그렇다. 그 여자는 자신의 극심하고 절실한 필요를 의식하면서 그
리스도를 만졌다. 내가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큰 군중에 에워싸여
있었지만 아무도 고칠 수 없는 혈루증에 걸린 외로운 한 여인, 의사들이 도움을 줄 수 없었
던 이, 무리 속에서 홀로 격리되어 있었던 그 개인을 알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주님은 그를 알고 계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동일하신 분이다. 그대는 이 세상에 우글거리는 수억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세상은 그대가 중요하지 않은 존재이며 거대한 덩어리 중의 작은 얼룩에 불과한 존재라고 그대 스스로 믿게 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너를 안다"고 말씀하신다.우리는 주님의 공생애 말기에 일어난 또 하나의 사건에서 이와 동일한 진리를 엿볼 수 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뇌와 수치를 견디며 죽음을 기다리실 때 한편에 있는 강도는 말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눅23:42). 그의 요청대로 주님은 그를 기억하셨다. 주님은 세상 죄를 담당하고 계신 그 마
당에서도, 그리고 여러분과 내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을 겪고 계셨지만, 그 강도를
위해 시간을 할애하셨다. 주님은 이 사람의 외로운 외침을 기꺼이 경청하셨다. 주님은, 말하
자면 독점적으로 이 사람에게만 자신을 주고 계셨으며 그에게 영광스런 약속을 부여하셨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이것은 영광스런 복음의 메시지이다.
천지와 별들과 별자리들을 만드신 하나님, 시편 기자가 그 이름을 무수히 찬양하고 있는 이 장엄하신 만군의 여호와, 그가 당신을 알고 계신다! 당신은 이 사실을 아는가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참새와 제비에게 말이다. 마귀의 그 거짓말을 두 번 다시 경청하지 말라 당신은 이 복음에서 안식을 얻을 것이다. 하늘과 땅의 창조주가 당신에
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당신을 위해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그 진리를 당신
은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제기했던 두 번째 문제에 있어서도 사실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미 그에 대한 답변을 주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여러분은 세상의 길을 걸어 보았는가
세상의 쾌락. 세상의 웃음을 맛보았는가 세상의 철학, 사상, 예술, 기타 온갖 처소
를 찾기 위해 노력해 보았는가
우리가 그 안식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우주 안에 단 한 군데뿐이다. 그것은 '제단'이다.
여러분이 거기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는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야 비로소 자기 영혼을 위
한 안식과 평화를 얻를 것이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이제 애써 추구하는 일을 멈추라. 더 이
상 노력하지 말라. 여러분에게 안식을 가져다 주는 것은 어떤 추구 행위가 나리라"고 하시며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다. 여러분의 있는 모습 그대로, 실패한 그대로, 쉼 없는 그대로
오라고 말씀하신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세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다. 복음이 주는 안식과 평화와 평온함을 얻었다. 추구와 애씀은 끝
났다.
안식이 있는 보금자리
다음으로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과 보호를 보장받는다.
이 시인은 이를 자기 말로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고 표현한다(11절). 하나님은
어둠 속의 빛이요, 보호하는 방패이다. 여러분은 이 세상과 육과 마귀로부터 여러분을 보호
하는 어느 누구 혹은 어떤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여러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여러분을
약탈하려 하고 여러분의 영혼을 파괴하려 하는 세력들과 권세들에 대항하여 세상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 답은 단 하나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또 하나의 비유를 사용해 우리
를 양에 비기고 자신을 선한 목자라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성령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가진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매시간 내게 주님이 필요하오니
내 곁에 가까이 머물러 주소서"
왜 이 때문이다.
주님이 가까이 계실 때 유혹이 그 힘을 상실하나이다.
-애니 셔우드 호크스-
주님이 가까이 계셔 은혜를 베푸시면 원수도 두렵지 않나이다.
-헨리 프란시스 라이트-
오, 그리스도의 힘과 권능이여! 주님은 우리를 에워싸고 계신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잠18:10). 사도 바울은 말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
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
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금자리 안
에서 안전하다. 어떤 짐승도 거기에 올 수 없다. 우리는 보호를 받고 호위를 받는다. 아무
것도 어느 누구도 그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킬 수 없다.
마지막으로 가장 값진 소유물은 영혼이다. 오, 영혼을 위한 안전을 내가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이 문제의 해답을 제시하였다. 안전을 얻을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뿐
이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 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우리를 위해, 우
리의 죄로 인해 죽은 그리스도,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는 계속하여 우리를 지키실 것이
다. 주님은 '강까지' 우리와 함께 가실 것이다."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
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히13:5). 주님은 죽음의 강까지, 그리고 그 건너
편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우리를 손으로 붙잡아 '그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것이다(유1:24)
내내, 나의 구주 나를 인도하시오니
나 달리 요청할 게 그 무엇이리
평생 동안 나의 안내자가 되시는
주의 부드런 자비를 의심할 수 있으리까
하늘의 평화, 지극히 신성한 위로
주를 믿으므로 여기 임하리니
내게 무슨 일이 닥쳐도
예수께서 만사를 선하게 하실 줄
나 앎이라
-패니 크로스비-
주님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으며, 또 영원토록 영혼을 안전하게 지키실
것이다.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나의 친구여, 그대
도 보금자리를 얻었는가 그대도 이 시인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 당신의 말은 전적으로 사실이다. 나의 모든 필요가 충족되는 것을 나는 알았다. 하
늘의 전능하신 하나님은 내게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나를 알고 계신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
며 나는 그의 자녀이다. 나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지키심 가운데 있으니 안전하다."
주권적인 보호자가 나에게 계셔
보이지 않아도 늘 가까이 있나니
변함없이 신실하게 구원하시고
전능한 손길로 다스리며 지배 하시 도다
그가 미소지어 나의 위로 넘쳐 나오며
그의 은혜 이슬처럼 내리고
구원의 벽이 두르니
주, 영혼을 보호하기 기뻐 하시 도다
-오거스터스 톱레이디-
여러분은 보금자리에 있는가 여러분은 집을 발견하였는가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라고 여러분은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이 길이다. 그 길로 들어가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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