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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데나리온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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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복음 20장 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포도원 주인과 품꾼에 관한 비유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 동시에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이상한 점은 첫째로, 한 데나리온씩 똑같이 주었다는 점입니다. 유대 나라에서는 보통 해 뜨는 시간부터 별이 보이는 시간까지 를 일하는 시간으로 잡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니까 포도원 주인이 오전 여섯 시부터 일한 사람과 저녁 다섯 시에 들어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한 사람에게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품삯을 주었습니다. 데나리온은 당시 로마의 은화입니다. 로마 통 치 하의 유대 나라에서도 이 돈을 썼습니다. 노동자 하루 분의 품삯으로서 가장 많은 액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반 시민의 하루 생활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열 한 시간 노동한 사람과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똑같은 품삯을 받았다고 하는, 즉 불공평하다고 하 는 것입니다. 노임을 줄려고 하면 일한 시간이 길다든지 짧다든지, 일의 분량이 많다든지 적다든지, 힘이 든다든지, 쉽다 한다든 지, 또 결과가 좋았다 나빴다 한다든지, 그 일하는 태도에서 열심이었다든지 게을렀다든지 성실하였다든지 불성실하였다든지 그 자세를 살펴서 적절하게 주는 것이 공평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모두 무시하고 똑같이 주었다고 하는 것은 사 회 정의를 깨치는 처사가 된다고 해서 항의를 한 것입니다. 유대 나라 랍비 문서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왕이 일꾼들을 불러서 왕궁 뜰에 나무를 각각 가꾸게 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한 노동자들을 하나씩 불러서 노임을 줍니다.왕이 노동자 한 사람에게 "그대는 어떤 나무를 가꾸었느냐 "
"이 나무를 가꾸었습니다." "흠. 그것은 호수목이다. 황금 한 개를 주겠다."
둘째 노동자에게 "그대는 어떤 나무를 가꾸었느냐 "
"저는 저 나무를 가꾸었습니다." 왕이 "이것은 배화목이다. 황금 반 개를 주겠다."
셋째 일꾼에게 "그대는 어떤 나무를 가꾸었느냐 "
"그 쪽에 있는 나무입니다."
"아니 그것은 감람 나무 아니냐 은 하나를 주겠다." 하고 각각 다르게 노임을 주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이 놀라서 이야기하기를 "임금님께서 미리 어느 나무에 일하면 얼마라고 하는 것을 미리 알려 었으면 합니다. "라고 항의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 왕이 대답하기를 "내가 만약 미리 그렇게 알려 었으면 왕궁 뜰 전체가 아름답 게 될 수는 없게 될 것이 아니냐."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계명을 지킬 때에 이 계명을 지키면 많은 보상을 받으니까 더 잘 키자 하고, 저 계명을 지키면 보상이 적으니까 지키지 말자고 하는 그런 태도를 해서는 안된다는 뜻에서 온 이야기입니다. 어느 계명이든지 최선껏 잘 지키는 것이 우리들이 할 의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을 이렇게 해석해 보더라도 우리들의 이해력으로서는 그렇게 만족할 만큼 해결되지 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의 주인, 즉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주신 한 데나리온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가 명해지면 이 문제가 해결 될 것입니다. 이 본문에 나오는 한 데나리온은 예수님 자신을 의미한다고 하는 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 고 택하심을 입어 포도원 즉 교회와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을 열심히 한 대가(對價)는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는 것입니 다.예수 그리스도는 속죄의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모든 문제 해결이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명의 근원이십 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 생명을 얻고 온갖 은총을 입습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천국에 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에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열두 시간 일하고 한 시간 일하는데 따라서 보상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보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는 이상 더 만족할 것이 없습니다.예수님과 함께 하는 이상 더 영광이 없습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대관식의 마지막에 저 유명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가운데 할렐루야가 주되었습니다. 세계 각 국에서 온 귀빈부터 시작하여 하객들이 모두 관례로 모두 다 일어섰습니다. 여왕은 실 주례 때문에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젊은 여왕은 앉은 대로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께 충성할 것을 백하며 합창 소리에 맞추어서 예수님 앞에 찬양 드리는 심정이었 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 "왕의 왕, 의 주" 하는 그 대목에서는 여왕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서 손 을 가슴에 모두고, 고개를 수그리고 게 경배하는 자세를 가졌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앞에는 제왕(帝王) 초부(焦夫)가 따로 없습니다. 오로지 감사하는 자세, 예배드리는 자세뿐이어야 니다. 토마스 아켐 피스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서 그 영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우고 닮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포도원 품꾼이 된 우리들이 바랄 수 있는 대가, 가장 놀라운 보상은 오로지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자신뿐인 것입니다. 남의 데나 리온에 대한 간섭이나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에게 신 속죄의 주, 생명의 주, 나의 전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오로지 충성하며 영광스럽게 살아가는 것 뿐입니다.
또 이 비유 가운데 마지막 다섯 시에 들어온 품꾼을 우대한 것도 이상한 점의 하나입니다. 여기 본문에 보니까"나중 온 자로부터 먼저 온 자까지 품삯을 주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한 시간밖에 일하지 못하였는데 먼저 주라고 했고, 또 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었습니다. 특별히 우대한 인상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도 깊은 뜻이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비유를 신앙의 역사로 생각해 본다고 하면 오전 여섯 시쯤 들어온 포도원 품꾼은 아브라함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 브라함이야말로 신앙의 날이 밝을 때 가장 먼저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 나라의 훌륭한 일꾼이었습니다. 훌륭한 품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했을 때 "예!" 복종하며 떠났습니다.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에도 서슴지 않고 바치려고 했습니다. 죄악의 멸망을 받게 될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계속 간구하여 구원 역사에 힘을 썼습니다. 하나님께 서는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고 귀중한 약속을 내려 주셔서 선민 계보가 시작되어 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일을 많이 했 는데 그에게도 한 데나리온, 풍성한 대가를 주셨습니다.
오전 아홉 시에 들어온 품꾼은 아마 모세와 엘리야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노예의 자녀로 태어나서 아주 기적적인 하 나님의 섭리로 바로의 명령을 벗어나서 궁중에 들어가서 사십 년을 수학(修學)하게 되었고 자신 스스로 무엇을 하려다가 실패하 였을 때, 미디안에서 사십 년 훈련을 받은 연후에 자기 민족 해방 운동과 또 하나님 나라 율법을 세우는 일과 이스라엘 건국의 기초를 놓는 일과 또 여호와 종교, 생명 신앙의 확립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일을 했습니다. 엘리야는 가장 우상 섬기기를 힘 쓰며 백성을 괴롭히던 아합 시대에,
우상을 철폐시키며 머뭇거리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며, 불의의 죄악 세력을 공격했던 위대하고 영웅적인 일을 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오전 아홉 시에 들어온 품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도 다 풍성한 한 데나리온씩을 주셨습니다.
열두 시 정오에 들어온 일꾼들은 아마 신약 시대의 베드로와 바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사람을 두려워하 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마지막에는 로마에까지 가서 자원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를 했고, 바울이 야말로 일차, 이차, 삼차에 걸쳐 대 로마 판도를 걸어다니면서 마침내 대 로마제국을 복음화 하는 데 크고 놀라운 힘을 발휘했 습니다. 이들이야말로 훌륭한 품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의 놀라운 보상들을 주셨습니다.
오후 세 시에 들어온 품꾼은 아마 성 프랜시스 같은 사람, 마틴 루터 같은 사람, 죤 칼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30년의 종교 전쟁으로 헤이 해진 개인이나 교회에 불을 일으키고 그리스도의 산상보훈적인 참 사랑을 실천해서 참 생명력 있는 신앙 운동을 일으켰고 가장 암흑한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게 하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산 신앙을 얻게 한 인물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오후 세 시에 들어온 품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다 각각 한 데나리온 의 풍성한 보상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후 다섯 시에 들어온 품꾼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십 세기 후반 말세-얼마 일할 수 없는 이 심판이 눈 앞에 있는 이른 때에 우리가 부르 심을 입었습니다. 부르심을 입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지마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힘써 헌신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고마운 것은 주인이 마지막 얼마 시간이 남지 아니한 때에 들어온 우리들에게 오히려 더 관심을 두시고 후대해 주시면서 동등시 해 주신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것이 황송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또 한가지는 이 주인의 자세인데 오전 여섯 시, 아홉 시, 열 두 시, 오후 세 시 이 시간에 품꾼들을 불러들인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오후 다섯 시 한 시간이 못 남았는데 또 품꾼을 불러 들였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포도원을 위해서도 물론 필요했지만 그보다는 종일 놀고 장터에서 쉬고 있는 이 품꾼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셨다고 하 는 점입니다. 만약에 한 시간이라도 끌어들이지 아니하였다고 하면 그의 가족이 굶었을 것이고, 그의 생활이 어려워졌을 것이라 는 것을 생각해서 불러 주셨다고 하는 점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되 마지막까지 생각 밖의 넘치는 은혜를 베풀어주신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나온 품꾼들은 불만을 말했습니다. 여기 보니까 처음부터 나온 품꾼들은 불만을 말했는데 오후 다섯 시에 들어 온 품꾼은 불만이 없습니다. 자기 중심으로 일하는 사람은 언제나 불만이 있습니다.그러나 오후 다섯 시에 들어온 품꾼은 자기 를 위한다는 것 있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포도원을 위해서, 그저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되니까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른 자세입니다. 오늘 이 비유가 주시는 깊은 뜻을 생각해서 우리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며, 감격하며,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되 오후 다섯 시에 들어온 일군과 같이 그저 황송한 마음을 가지고 조건없이 최선껏 충성하는 그런 자세로 남은 생애를 온전히 바쳐 야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오후 다섯 시에 우리들을 불러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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