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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 (눅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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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ess' 라는 잡지에 이런 글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우리의 가장 큰 필요가 정보였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육자를 보냈을 것이다. 만약 우리의 가장 큰 필요가 과학기술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과학자를 보냈을 것이다. 만약 우리의 가장 큰 필요가 돈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제인을 보냈을 것이다. 만약 우리의 가장 큰 필요가 쾌락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엔터테이너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큰 필요가 죄의 용서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세주를 보내셨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세주를 보내주신 날입니다. 옆에 있는 분들께 '이번 성탄절에 구세주의 은총이 형제자매님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탄생기사는 4복음서 가운데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동방박사들의 경배, 그리고 그에 대한 헤롯왕의 경계심 등이 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헤롯왕과의 갈등관계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아주 중요한 기사를 담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탄생하셨다는 기사입니다.
누가복음 23장 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총독 빌라도에게 문초를 당하실 때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네 말이 옳도다" 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분이 왕궁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분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진정한 왕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예수님의 참된 왕이심을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지 나누고자 합니다.
I. 왕으로 오신 예수님

1.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에 따라서 이 땅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본문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태어나셨습니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베들레헴'이 무슨 뜻입니까 원래 이 말의 의미는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베이트'는 집이고 '레헴'은 떡입니다. 그래서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떡집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서 떡집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것은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구약성경 미가서 5장 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예수님께서 탄생하기 훨씬 전에 기록된 구약성경 미가서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 사람이었으나 호적 때문에 여행을 하게 되어서 베들레헴에 갔고 그 곳에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시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탄생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을 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에 따라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있던 자리를 옮기라고 하시면 옮겨야 합니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늘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섭리하시는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사실을 믿으면 내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인간적인 술수를 쓰거나 다른 사람을 경쟁자로 보고 머리 쓸 필요가 없어집니다. 우리 사회는 경쟁사회입니다. 학교에 진학하려고 해도 경쟁을 해야 하고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경쟁을 해야 합니다. 직장에 들어간 후에는 승진을 위해서 경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경쟁 자체는 이해할 수 있으나 문제는 그 경쟁에서 공정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술수를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데 믿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자신이 계획하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혹은 그 이권을 따내기 위해서 경쟁자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따돌립니다. 한 마디로 페어 플레이(fair play)를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믿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즈음 초조한 일이 있으십니까 내 앞일이 어떻게 될지 초조하십니까 내가 지금 계획하는 일이 잘 될지 안 될지 몰라서 답답하십니까 성공과 실패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나를 향한 그 분의 신실한 계획이 있음을 전폭적으로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비록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지만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어렵고 힘들다해도 그 속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 분을 바라보십시오. 철저히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참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참된 자유와 평안은 성공과 실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자유와 평안은 오직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고 의지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성탄절에는 예언에 따라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사는 삶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이 얼마나 큰 기쁨과 자유를 주는지 깨닫고 그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성탄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 예수님은 인간적으로도 왕족의 혈통에서 태어나셨습니다.
4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은 다윗 왕의 후손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있는 족보를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로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족보를 기술하는데, 마지막에 보면 요셉의 이름이 나옵니다. 요셉은 다윗 왕의 후손입니다. 비록 그가 지금 가난한 목수에 불과하고 절대권력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비천한 자이지만 그는 엄연히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다윗의 집 족속인 것입니다. 비록 호적이라는 세속군주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지만, 그들은 지금 약속의 땅 베들레헴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나사렛은 아주 가난한 동네입니다. 요한복음 1장 45절에서 예수님의 제자 나다나엘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그만큼 나사렛은 아주 가난하고 멸시받는 동네였습니다. 요셉은 지금 나사렛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본적지는 나사렛이 아니라 다윗의 동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나사렛에서 다윗의 동네로 가는 것은, 지금은 비록 요셉이 나사렛에 사는 한 목수에 불과하지만 근본을 따지면 다윗의 혈통을 잇는 왕족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성경은 팔레스타인(Palestine)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히브리 사람들의 세계관을 많이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 사람들의 세계관이 어느 정도 동양적이고, 또 특별히 한국 사람들의 사고와 유사합니다. 한국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혈통과 족보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왕은 왕의 후손 가운데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바로 이 왕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분은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인간적인 왕족을 무시할 수도 있는데 사람들의 사고를 배려해서 왕족으로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마치 요셉이 지금 나사렛이라는 빈촌에 살고 있지만 그의 본적지는 다윗의 동네인 것처럼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본적지는 하늘나라이고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번 성탄절을 맞아서 다른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우리의 본적지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분명히 믿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은 세상의 왕까지도 다스리시고 사용하시는 만왕의 왕이십
니다.
우리 본문 1절과 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로마제국은 위성국가들을 통제하고 다스리기 위해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기 때문에 가이사 아구스도, 즉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제국 전체의 인구조사를 명령했습니다. 가이사의 결정은 이스라엘 민족과 개인의 삶에 깊숙이 영향을 주었습니다. 요셉과 같은 일반서민들은 그 명령을 피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요셉은 두 가지 이유에서 이 여행을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첫째로, 그의 사랑하는 아내가 임신 9개월인 상태에서 낯설고 반기는 사람 없는 먼 곳으로 위험한 여행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둘째로, 그는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인구조사를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로 보았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오직 하나님만 그 백성의 숫자를 세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의 예를 기억하시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사무엘하 24장, 역대상 21장).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다가 온 나라에 역병이 임하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권한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역사에는 외국군대에 의한 인구조사에 반대하다가 순교를 자처한 혁명가들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요셉은 철권으로 다스리는 권력에 마지못해 따르는 대다수의 백성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자, 이제 요셉과 마리아는 자신의 본적지인 베들레헴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본문의 포인트입니다. 나사렛에 살던 요셉과 마리아를 베들레헴으로 이주하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아우구스투스 황제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을 약속에 따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만든 것은 바로 세속군주라는 것입니다. 가이사는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세상의 왕들까지도 다스린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 바랍니다. 요셉이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잘 알지 못하고 한 일이었지만,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종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요셉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 약속의 땅, 베들레헴에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다스리기 때문에 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 땅의 주재이시며, 모든 권력은 그 분의 권세 아래 있고, 아무리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는 백성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진정한 왕이십니다.
자, 여기까지 설교를 들으시면 마음속에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렇게 위대한 왕이시라면 왜 하필 마구간에서 태어나야 하는가" "아무리 겸손해도 그렇지, 그렇게 하실 필요가 있는가"
그런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왕이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왕은 다스리는 자입니다. 그럼 다스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폭군을 너무 많이 겪어보았기 때문에 '왕' 하면 벌써 거부감을 갖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왕은 백성의 눈에 고인 눈물과 한숨을 닦아주는 사람입니다. 참된 다스림은 백성들을 잘 돌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말로 잘 다스리는 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백성의 고통에 함께 동참해야 합니다.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어 가는데 혼자 왕궁에 앉아서 호위호식하는 왕이 어찌 백성의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백성의 고통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여러 명 있었지만 참된 군주는 없었습니다. 학교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선생은 많은데 스승은 없다는 것입니다. 학생의 고민을 모르는 스승이 어찌 참된 스승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은 이 땅에 오셨지만 거할 곳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많은 방이 있었지만 그 중에 그 분이 거할 곳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분을 위해 방을 내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일평생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 그 분이 거할 곳은 단 한 군데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그 분은 그 일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명을 위해서 처음부터 마구간에서 출생하신 것입니다.
그 분은 출생할 때부터 인간사의 모든 고난을 몸소 체험하셨습니다. 출생은 마구간에서 하셨고, 성장은 목공소에서 했으며, 일생을 집 없이 지내셨습니다. 자신이 친히 모든 고난을 겪으시면서 고난받는 종으로 사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은 진정한 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바로 우리들의 고통에 동참하여 우리의 슬픔을 헤아리는 참된 군주가 되시기 위해 겸손히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주님의 성육신과 그 성육신의 절정인 십자가에 그렇게도 감격합니까 하늘에 계셔야 하는 그 분이 우리의 모든 슬픔과 질고에 동참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는 그 사실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까지 들으시고 헤아리시는 그 어질고 인자하신 우리 왕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처한 상황이 고통스럽습니까 주님께서 과연 내가 처한 고난을 돌아보시고 계신 것인지 의심이 가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올해 성탄절에는 성육신의 의미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셨습니까 왜 하나님이신 그 분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만 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구약성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구약을 자세히 보시면 많은 선지자나 의인들이 하나님을 향해 도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도 몇 번이나 그 초청을 사양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향해 항의를 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나 하박국같은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척박한 현실에서 하나님을 향해 때로는 원망을 하고 때로는 하소연을 합니다. 마치 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셔서 이 땅의 슬픈 현실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고난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습니다.
욥에게 오면 그와 같은 하소연이 절정에 달합니다. 욥기 10장 1절부터 4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내 마음의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취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주의 눈이 육신의 눈이니이까 주께서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리이까
욥은 자신의 삶에 닥친 고난의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항의 섞인 하소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사정을 아십니까" "저 하늘에 계신 분이 우리의 고난을 알기나 하십니까" 그런 항의입니다. 주님의 성육신은 그런 항의에 대한 답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드디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먼지 나는 유대광야에서 육신을 입고 사셨습니다. 그 고난의 삶을 위해 주님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실 때부터 마구간에서 말 밥통을 침대 삼아 이 땅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난을 외면하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항의에 침묵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외침을 들으십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도마에게 나타나신 주님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만져보고 그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외치던 도마에게 주님은 몸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분은 그렇게 우리를 외면하고 저 하늘에서 홀로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현실에 참여하시는 분입니다.
저는 이번 성탄절에 여러분들이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이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어질고 인자한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평범한 서민들의 고통이 무엇인지, 삶의 질곡이 무엇인지를 다 아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회의적인 태도로 사시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회의적인 태도 때문에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맡겼습니다. 마치 수술대 위의 탐구대상이 되어 오르듯이 주님은 우리와 같이 믿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나무 십자가에서 지금도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을 열고 그 예수님을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우리 예수님이 멀게 느껴지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 앞에 여러분의 기도제목을 놓고 아뢰십시오. 주님께서 들어주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외침을 들으시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은 지금 여러분의 관심이 무엇인지, 여러분의 문제가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여러분이 그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금 인생의 깊은 고난에 빠져있는 분이 계십니까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는 것 같은 그런 실망감에 지쳐있는 분이 계십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은 더 이상 나와 같은 하찮은 존재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에 빠져 있는 분이 계십니까 2000년 전, 그와 같은 절망에 빠져 있던 유대 땅에 예수님은 참 희망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마리아의 찬가에 있는 것처럼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배불리셨습니다(누가복음 1장 52-53절).
II. 루마니아의 목사, 라츨로 토케의 이야기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루마니아의 목사 라츨로 토케(Laszlo Tokes)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는 공산주의 통치자이며 독재자인 차우세스쿠에 대한 봉기를 촉발시킨 장본인입니다. 그에게 가해진 고문으로 인해 온 국민이 격분했으며 마침내 들고 일어섰던 것입니다.
라츨로 토케 목사는 그 때, 산악지방의 한 작은 교회에 연금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그 교회 교인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설교를 준비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비밀경찰은 반대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고 있었으며 나라 전체는 폭력으로 신음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토케 목사는 문을 걸어 잠그고 앉아서,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거듭 읽었습니다.
루마니아에 또 다시 찾아온 크리스마스를 전과 다름없이 설교할 그 나라 대다수 목사들과는 달리 토케 목사는 헤롯의 대학살 기사를 설교본문으로 택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교인들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들려줄 수 있는 유일한 본문이었습니다. 압박, 공포, 폭력, 불의의 희생자요 패배자로서 당하는 시련 등은 교인들에게 너무도 절실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그 다음 날, 또 다시 찾아온 그 크리스마스날에 차우세스쿠가 체포되었다는 뉴스가 타전되었습니다. 온 나라는 교회의 종소리로 기쁨과 감격을 표현했습니다. 또 하나의 헤롯왕이 폐위된 것입니다. 토케 목사는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나오는 그 모든 사건들은 당시의 우리에게 새롭고도 빛나는 한 차원으로, 우리 삶의 현실에 구체적으로 뿌리를 둔 역사의 한 차원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모든 사건들을 견뎌내며 살아온 우리들에게 1989년의 크리스마스는 더 이상 비극의 크리스마스가 아니었습니다. 저 영원한 트란실바니아 모든 언덕에 뜨고 지는 해와 달이 명백하듯, 하나님의 섭리와 어리석은 인간의 사악한 행위가 명백히 드러난 그 날의 크리스마스는 진정 풍요롭고, 흥겹고 과장된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사십 년만에 처음으로 루마니아의 크리스마스는 온 국민의 명절이 되었습니다.
III. 성탄절을 맞으며 드리는 권면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주님은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가 사는 역사의 현장에 육신을 입고 찾아오신 분입니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그 사랑을 다시 한번 경험하고 확인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삶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헤아리시는 그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감격을 누릴 수 있는,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 땅에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참 마음으로 경배하는 성탄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10여명의 형제 자매들이 주님 앞에 손을 들어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그 손을 굳게 잡아 주시옵소서. 일생동안 그 손을 굳게 잡아 주시옵소서. 그들의 인생에 함께 하여 주시고, 그리하여 그들의 인생의 말년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놀라운 인생의 축복이 있게 해 주시옵소서. 이번 성탄절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참으로 거듭난 인생을 살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 주님께서 일생동안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그 놀라운 선물을 인하여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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