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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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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복의 서론에서 저는 예수 따라 산으로 가자 라는 제목을 붙였습니 다. 흔히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으로 땡! 이라고 생각들을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그때부터 시작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왜 이런 결과가 초래하였느냐 하면 구원이라는 것을 창조 자 편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내 편에서 생각하다 보니 인본주의 적 발상이 싹 트고 그래서 내 편할 대로 예수를 보고 ......

구원의 성장은 없이 단순히 예수 천당(기본구원)으로 단정 지어 버렸습니 다. 자신을 깨어 온전히 바치고자 한 마리아를 질타하고 나무라는 가롯유 다를 보면서도 내 안에 내 성분적 사상과 추구가 가룟 유다와 같은 것이 들 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늘의 복을 듣고 보고 가질 수 있었던 사람은 몇 되지를 않 습니다.

산 밑에 있는 사람과 예수 따라 산에 따라 올라간 사람이 비교되고 예수 따라 산에 올라갔지만 예수 앞에 나간 사람과 멀찌감치 있는 사람이 비교 되어 나옵니다.

다같이 제자 되어 말씀을 듣지만 깨달아 알아서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이 무슨 말인고 하는 사람이 비교되어 나옵니다.

이 광경을 하나님이 나에게 보여 주셨는데 보여주신 까닭이 뭐냐 하면 산 밑에 있는 사람이 되지 말고 멀찌감치 예수 바라보는 사람되지 말고 예수 앞에 나왔으나 알아듣지 못한 사람되지 말고 천국의 복을 받는 사람, 다시 말하면 팔 복의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이제 팔 복을 강론함에 있어 누누이 강조함은 내가 팔 복의 사람이 되자는 데 초점을 맞추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팔 복이다 가 아니라, 이것이 팔 복 이니 이렇게 살아라 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살자는 생각으로 팔 복을 보자는 것입니다.

1 . 복이 뭐냐 팔 복이라 함은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성경의 주변 정황으로 볼 때 이 설교는 반복된 듯이 보이지만 각자 성경이 주고자 하는 계시 성이 다르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본문에서 특이한 점은 복의 강조점 입니다.

복이 뭐냐 하는 것입니다. 기복 주의에서 말하는 목이냐 샤머니즘적 개 념의 복이냐 구국 주의적 복이냐 율법 주의적 복이냐 그 모두는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공생애 첫 부분에서 수없이 강조하는 이 복이 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신령한 세계입니다.

인간의 머리통으로 그것을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차원 높은 경지의 세계입니다. 그곳은 영원한 세계입니다. 처음과 끝이 없다 로 표현 되고는 하는 이 세계는 영원한 세계입니다. 성도는 영원한 존재이니 영원 한 것을 소유하는 것이 복입니다.

한 예를 들자면 A.라는 부모와 B.라는 부모가 있다고 가정을 합시다.

A. 라는 부모 자식의 장래를 생각해서 인격적인 면 교양적인 면 지식적인 면 모든 면에 서 교육과 성장에 신경을 씁니다.

B. 라는 부모 자식이 하고 싶다는 대로 다 하게 하고 달라는 대로 다해 주면서 밭에 나 가 밭갈이도 시키고 심부름도 시키고 꼬박 꼬박 노동의 대가를 현금으로 줍 니다.

이제 객관적으로 우리가 볼 때 아이에게 어느 것이 참 복입니까 어느 부 모를 소망하며 어느 부모를 원하고 바라겠습니까 아이의 입장에서는 B.라 는 부모를 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원하는 것을 다 주는 것이 아 이에게 선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은 수긍하실 것입니다. 아이를 위하는 부모는 A. 라는 부모입니다. A.라는 부모가 주고자 하는 것이 선이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질적으로 우수하고 시간적으로 오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렇습니다.

좀더 구체적인 예를 듭시다.

생면부지 고아이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친 아버지가 나타나서 너는 내 딸이다. 라고 지목을 하고는 강남의 어느 으리으리한 저택으로 끌고 가서 는 이 집은 네 집이니 네 마음대로 살아라 했다고 합시다.

이 아이가 그 크고 좋은 집이 좋겠습니까 좋지요. 무지하게 좋을 것입 니다. 그러나 고아처럼 교육도 받지 못하고 천박하게 자라기만 한 이 여자 아이가 40인치 텔레비전을 켤 줄 알겠습니까, 냉장고에서 고기를 꺼내 요 리해 먹을 줄을 알겠습니까, 텔레비전만 키면 홍콩의 위성 방송에서 유덕화가 나오고 일본의 음악 방송 에서는 시커먼 놈 허연 놈이 나오고 한국의 케이블 TV 에서는 채널이 수십 개 넘는데 그것을 마음대로 키고 듣고 즐길 수 있느냐 말입니다. 40인치 대 형 화면이 무슨 소용이냔 말입니다.

문화의 수준이 다릅니다.

지리산 산골 마을에서는 푸짐하고 넉넉한 여자가 복스럽고 예쁜 여자이지 만 버스타고 30분만 가면 미니스커트에 롱 부츠를 신고 긴 생머리를 하고 가느다란 허리를 흔드는 여자가 예쁜 여자입니다. 하지만 기차타고 택시 타고 서울의 상류 사회로 가면 그 미니스커트 롱 부츠의 패션은 천박한 패 션이 됩니다. 그곳에서는 교양과 우아함과 섹시함이 잘 조화된 여성만이 아름다운 여성으로 봅니다.

하류층 사람으로 크던 사람이 상류층 딸이 되기 위해서는 상류 사회를 알 아야 하고 배워서 자기 자신이 상류 사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회의 일원이 되고 그 사회를 누리고 즐길 수 가 있는 것이지 껍데기만 알고 겉치레만 하면 그 사회에서 조롱을 받고 부끄러운 존재가 됩니다. 이 딸의 입장에서 참된 복은 무엇입니까 상류 사회의 사람이 되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 가지입니다.

산 밑에서는 병 고치겠다고 날 리를 떨고 있지만 예수 따라 산으로 올라간 사람들은 복을 받습니다. 천국의 복을 받는데 천국의 사람이 되는 복을 받 습니다. 이 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류층 사고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땅에서 누리고 즐기던 생각과 사고로 천국을 보고 누리고 다스리려 하지 맙시다. 그러면 부끄러운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복이 뭐냐 하는 개념이 어느 정도 정리되셨을 줄 믿습니다.

그러면 심령으로 들어가겠습니다.

2 . 심령(心靈)이뭐냐 이론적으로 중생댄 영이 가난하여 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장성한 사람이 다시 어린아이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 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심령이란 중생댄 영이 아닙니다. 현재적 으로 인간 개인을 움직이는 자아의 심리 상태를 이르는 말인데 국어사전에 서는 심령(心靈)을 마음 혹은 정신 작용을 일으킨다고 여겨지 는 근원적 존재 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 심령을 마음을 움직이고 작용시키는 존재라고 부르 겠습니다.

마음을 움직이고 작용시키는 것이 가난해야 천국을 갖을수 있다고 예수님 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가난해야 한다고 하니 지금 마음을 움직이는 것, 조종하는 것이 무엇엔가 대단히 부유함을 누리고 있나 봅니다.

자! 그러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 조종하는 것이 무엇에 부유한가를 체 크해 볼 필요가 생겼습니다. 오늘 아침 텔레비전에서 비만 환자를 치료하 기 위해서는 비만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가난 해 지기 위해서는 부유하게 된 원인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이는 지식으로 부자일 수가 있고 어떤 이는 교만으로 부자일 수가 있고 어떤 이는 종교열심으로 부자일 수가 있고 어떤 이는 세상일에 부자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도 경험하는 일이지만 사람은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건강합니다. 그 런데 비만하거나 유달리 야위어서 병치레를 자주 하는 아이를 보면 대개가 공통적으로 군것질을 많이 합니다. 밥먹기 전에 과자 사탕 쵸콜렛 등등을 먹습니다. 그리고 끼니때가 되면 밥 먹기를 싫어합니다.

인간이 본래 밥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영양 분을 섭취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대안 예를 들면 알약 하 나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까지 그런 약이 없으므로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밥 대신 다른 것으로 위를 채우면 입맛이 없고 밥을 먹지 못합니 다. 그러면 아이는 몸이 약해져서 병에 걸립니다.

우리의 영도 마찬 가지입니다.

영은 진리(하나님이 주신 구원 도리)를 먹어야 건강하게 성장하는데 믿음 으로 자라는데 진리가 아닌 다른 것을 먹이고 있다면 그 영은 분명 중병에 걸려 있을 것입니다.(이것은 표현상 그렇고 실제적으로는 영이 성장하지 못 하도록 영양분을 공급하여 주지 않는다는 것이 좀더 정확할 것입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 더라 눅 2:40예수님이 육신이 자라고 강하여 지며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 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모가 마 음을 움직이는 정신작용에게 우상의 것, 세상의 것, 더러운 귀신 들린 것, 그런 것들을 막 퍼다 가 먹였습니까 아니죠 .

지혜를 먹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먹였습니다. 그러니까 진리이신 예 수님이 자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많고 많은 부모 중에 왜 하필이면 요셉과 마리아를 지목하시고 그들에게 어린 예수를 맡겼겠습니까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인간이기에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때로는 예수를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그래 도 예수님을 하나님에 것이 아닌 세상 것으로 배불리며 키우지는 않았단 말 입니다.

지금 나는 예수를 믿고 진리로 성장한다고 하면서 지금 내가 배불리며 지 금 내가 즐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원한 것으로 배불리며 영원한 것으로 위안을 받으며 영원한 것으로 즐거워하고 있느냐 말입니다.

 3. 복이있나니천국이저희것임이요.

그러면 심령이 가난하여 지면 잘먹고 잘 살고 무병장수하며 명예와 부를 얻을 수 있고 만 유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어쫓을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 다는 것을 여러분은 장황한 설명을 통해 인식하셨습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여기서 말하는 복은 천국을 소유하는 복이지 들어가 는 떡반죽 나가는 떡반죽 꽉! 꽉! 채워 주시는 임시적 세상적 복이 아닙니 다.

복이 임시적 세상적 것이다 라고 은근슬쩍 말하는 사람은 천국 복을 받지 못하게 가로막는 사람이고 은근슬쩍 그 설교가 보기 좋고 듣기 좋은 사람은 천국 복 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황금 대신 개똥 줏으러 다니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무슨 말인 지 알아 들으시겠습니까 병중에 살기가 너무 힘이 들어 죽기를 갈망하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 형제가 하는 말 예수 믿으면 천지가 개벽을 해도 천국을 가는데 뭐하 려 굳이 심령이 가난하여지기까지 살아야 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천국만 바라보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천국을 주시데 끝 까지 주시고자 하는 것을 알게되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 을 깨닫게 됩니다.

앞에서 잠깐 얘기했지만 하류층 천민의 생활을 하던 나를 상류층의 사람을 만들어서 그 생활을 누리고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본래 목적입니다. 단순히 상류 사회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그 세계의 최 고자로 만들고자 하는것이 하나님 사랑의 목적입니다 .

그런데 상류층의 세계를 알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고 그 사람되기를 포 기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내 입장에서야 상류 사회의 즐거움을 모르니 안타까울 리도 없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닙니 다.

단순히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인 내가, 내 입장을 개입 시킬수는 없는 일 입니다. 항상 절대적 기준인 하나님의 입장에서만이 생각되고 판단되어 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의 세계를 완전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길거리 부랑아에 불과한 신분으로 귀족 사회를 알기나 하겠느냐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비참하고 고통스럽고 ,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현실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내 마음을 채우고 정신 작용을 채워서 현실 붙들고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주어진 그 현실을 극복하고 정복해서(안개가 걷히고 나면 밝은 태 양을 보듯) 천국의 사람이 되라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4 . 결 론 심령이 가난하여 진다는 것은 천국의 사람이 되기 위한 시작입니다. 산밑 에서 미적거리지 않고 예수 따라 산으로 올라가고 제자가 되어 예수님의 말 씀을 들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여 지면 천국을 갖을수 있다고 하는 예수님 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심령이 가난하여 지면 되는 것입니다. 임시적 이고 세상적이고 변질된 것으로 즐기고 누리고 활용하는 나의 마음과 정신 작용을 비우고 영원한 것, 천국 적인 것 참된 것으로 채우면 그것을 중생된 영이 먹으면 나의 신앙 인격이 성장합니다. 그것이 성화의 길이고 이룰 구 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이것을 잡지 못하면 이것을 보지 못하면 껍데기 신앙 헛된 신앙을 하게 됩 니다.

산 아래에서 귀신 붙들고 씨름하는 사람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신앙 수 준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 따라 산에 올라간 보람이 없게 됩니다.

다음은 애통 하는자가 연재됩니다.

팔복강해

발 신:장애인 선교지 (대한 예수교 장로회 궁극 교회 성도) 주 소:전북 남원시 운봉읍 동천리 486-5 TEL 0671-34-7490 최 석 영 제 목:팔복강해 애통하는 자 수 신: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 갈무리:Alt=L을 눌러 화면 갈무리를 선택하시고 하이텔은 PR 천리안은 NS를 입력후 엔터를 치시면 내용이 갈무리되어 적은 비용으로 본 계시 물을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4 1 . 애통하는 자 A. 누굴위한 애통이냐 지금 우리가 무엇을 위해 울며 불며 눈물 찍 콧물 찍 흘리며 주님 바지 가 랑이 붙잡고 기도를 하고 있느냐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예수를 좀더 잘 믿고 충성 봉사를 하게 해 달라고 선교의 사명을 받았으니 중국이나 티베트 중남미 어느 산간 오지에 가서 예수님 전하게 하여 달라고 다른 사람들 다 방언을 하는데 나만 못 하고 있으니 나도 방언좀 하게 해 달라고 얼핏보면 우리가 지금 울고 있는 애통이 모두가 주님의 애통이고 예수님이 나와 함께 울어 줄 울음인 것 같지만 실상은 그것은 나의 애통이 지 주님의 애통은 아닙니다. 이것은 종교적 애통이지 본문에서 주님이 말 씀하시는 애통은 아닙니다.

나의 애통을 가지고 종교의 애통을 가지고는 주님의 위로를 맛볼 수가 없 습니다. 왜냐하면 그 목적과 수단과 성분이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고 싶은 것은 영양가가 풍부한 저 녘 식단인데 나는 쵸콜렛 먹고 싶단 말입니다. 주님은 저 녘을 먹여 재워서 위가 상하지 않게 하고 각종 영양소가 골고루 체내에 공급되어 정상적인 아이로 성장하기를 바라는데 나 는 달콤하고 맛나는 쵸콜렛 입에 물고 만화를 보다가 잠이 들고 싶단 말입 니다. 지금 우리가 울고 있는 울음이 이 울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그러면 나는 지금 심령이 가난하기 위해 애통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심령이 가난한 것이 복이 있다 라고 예수님이 가르쳐 줬기 때문입니다. 지 금껏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동안 무슨 생각으로 정신을 팔아먹었기에 아직도 그 말귀를 못 알아먹었습니까 겉으로 보기에 신앙이 좋은 것 같고 신앙 지 식이 풍부해서 어떤 신앙 상담을 해와도 성경적 해답을 해 줄 수 있어도 수 천 수 만명의 교인이 아멘 할렐루야하고 외쳐도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생영 (生靈)의 성장 없이 껍데기 운동만 하는 이 나를 보고 애통을 해야 한단 말 입니다. 예수님이 언제까지 당근을 들고 우는 아이를 달래야 직성이 풀리 시겠습니까 내 심령에 종교운동 교회 운동 사회 운동 가정 운동 성령대부흥 운동이 판 을 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흔히들 이를 예수님의 향기라 하나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님)적 성장이 없고 , 천국이 확장될 자리가 없습니다. 꽉꽉 차고 넘칩니다. 내 영혼아 이제는 편히 쉬고 먹자 라고 말하는 인 간에게 천국이 들어 먹히지를 안습니다.

이렇게 우이독경, 마이동풍이라는 말이 새삼 실감이 납니다. 누군가에게 진리를 가르쳤더니 알아듣지 못해서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나 자신이 하나 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본래 주고자 하는 목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엉뚱 한 것 붙잡고 씨름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느끼는 감정입니다.

우리는 나의 심령 깊숙이 박혀 있는 이질적 신앙 관을 보고서 애통을 해야 하고 , 어서 빨리 버리지 못하고 타락한 옛 사람의 기존 성으로만 자라고 있는 현재의 나를 보고 애통해야 합니다.

울면서 씨를 부리는 자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나를 두고 울어야 합니다. 내 영혼의 밭을 갈고 씨를 뿌려야지 내가 내 밭에서 알곡을 생산해야지 나는 밭도 갈지도 않고 나는 씨도 뿌리지도 않고 남의 밭만 갈고 남의 밭에다 울면서 씨만 뿌리면 뭣하겠습니까 추수 때에 콩고물이라도 떨어질 것 같습니까 인간 세상의 정리라면 혹시 모르지만 천국의 구원은 성도 개인의 영적 성장이지 사역이 아닙니다.

2 .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의 위로는 땅에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폭발적 은사가 일어 나는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어서 대통령이 청와대에 사는 것도 아니고 망하던 사업이 번창을 해서 대 기업을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죽어 가던 사람이 약 봉지 버리고 기도원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위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본질이 아 니라 껍데기입니다.

A. 본질(本質)과 본성(本性)을 주는 것이 위로다.

사과라는 과일은 껍데기가 있고 알맹이가 있고 씨가 있고 다음으로 그 성 분이 있습니다. 사과가 성분 적으로 비타민 A.B.C 그리고 섬유질이 있고 갖가지 영양소가 있듯이 우리의 신앙에도 외형과 행동 양식이 있고 신앙의 성분이 있습니다. 껍질만 사과고 성분 요소가 배라면 그것은 배이지 사과 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도 껍데기만 신앙이고 알맹이는 세상이라면 그는 껍데기 일뿐 신앙인 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구원받았다, 받지 않았다의 차 원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나서 중생한 영이 성장을 하느냐 성장하는 진리 를 먹고 있느냐 하는 면에서 하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먹으며 종교 활동 신앙 활동하며 예수님의 위로라고 여기고 있던 것들 중에서는 본질이 아닌 껍데기가 많습니다. 나는 돌보지 않고 내 영혼의 성화 구원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선교 100주년 운동하고 해외 선교사 후원 운동하고 해외에 나가 죽도록 고생하며 전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 까 농어촌 지역에서 노인 어른들 붙들고 전도하며 가난하게 산들 본질과 본성을 외면한 채 내가 영적으로 어린 아이의 길을 답습하고 있는 다면 무 슨 소용이냔 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위로이냐 하면 아니란 말입니다.

B. 본질(本質)과 본성(本性)을 키우기 위해 하나님의 위로는 땅에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을 가져다주고 하늘의 것을 키 우고 하늘의 것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표현으로 성화 구원 이라 하기도 하고 이룰 구원이라 하기도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나가 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 성품을 온전하게 소유하여 성분 적으로 예수의 신앙이 되는 것, 더 나가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이루었던 신앙 수 준에 까지 도달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위로요 천국을 더 많이 소유하고 누리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지금 가 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서론 부분에서 우리는 어느 무리에 속하여 있나를 따져 보자고 했습니다.

이제 한가지 묻고 싶습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가지지 못해 울고 있습니 까 무엇에 소망과 목적을 두고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하나 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입니까 누구의 입장에서 누구의 시각에서 누구의 목적으로 애통하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애통이라는 말은 아무데 나 아무렇게나 붙이는 말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영원한 것을 갖지 못하고 헛된 것을 붙잡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우는 울음의 성질 그것을 놓고 애통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난하지 못해서 천국의 사람이 되지못한 것이 애통할 일이지 머리에 재를 뿌릴 일이지-+ ++ 병 낫게 해 달라 사업 잘 되게 해 달라 종교적으로 경건하게 살 수 있게 해 달라 교회가 부흥되게 해 달라 +-+ +-하는 것들은 본질이 아 닙니다. 그것은 방편입니다. 본질이 아닙니다. 그런데 방편인 것을 가지 고 본질 인양 착각을 하고 그것을 붙잡고 애통하고 있다면 하나님 입장에서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입장에서 안타까운 일만 하는 이 나를 발견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원 목적대로 살지 못하는 나를 보고 애통해야 합니다. 그러 면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본질적인 위로, 본성적인 위로, 그것은 천국의 사람이 되는 것이며 높은 진 리의 봉우리로 올라가는 위로입니다.

팔복강해

발 신:장애인 선교지 (대한 예수교 장로회 궁극 교회 성도) 주 소:전북 남원시 운봉읍 동천리 486-5 TEL 0671-34-7490 최 석 영 제 목:팔복강해 온유한자 수 신: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 갈무리:Alt=L을 눌러 화면 갈무리를 선택하시고 하이텔은 PR 천리안은 NS를 입력후 엔터를 치시면 내용이 갈무리되어 적은 비용으로 본 계시 물을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 로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5 1 . 온유 온유 라는 말은 온유(溫柔)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온유라는 말을 부드러움 자상함 등으로 이해하고 받아들 입니다. 물론 그러한 의미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동안 이해하고 받아들이던 온유(溫柔)가 본문에서 말하는 온유의 본질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원어적으로도 우리의 해석이 잘못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온유라고 해석한 이 말은 안와(히) , 프라오테스(헬) 프 라우데스(헬) 라는 말인데 본문은 호프 프라에이스(헬)라는 말로서 이를 우 리 개역성경은 온유라고 표현했습니다. 내세 주의(천국 복음주의) 사상에서 상당한 계시 신앙을 가지고 보아야 프라우데스 라고 하는 말을 온유라고 표 현한 번역가의 신앙을 엿볼 수 있지만 그저 문자 적으로 보면 번역의 오류 로 밖에 보이질 않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이를 우유부단함 혹은 강함이라는 뜻으로 온유라는 말 을 해석해 왔고 현재는 그 이해의 오류를 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안 와(히)라는 말의 본래적 의미는 절하다-to bend over-, 굴복하다-to bow down-, 노동하다-to labor; to toil-, 겸손해지다 또는 낮아지다-to be low , depressed or humble-라는 뜻이 있습니다.

본문은 헬라어 호프 프라에이스 라는 단어로서 프로오데스에서 파생된 말 입니다. 제가 헬라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정확한 번역 이해 하에서 나온 해 석이 아니기 때문에 이해하는데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말씀 드 리고자 합니다.

먼저 제가 본문을 이해 한 것을 쓴다면 본문은 호프 프라에이스 라는 헬라어로 기록된 말씀인데 이제 문제는 온유를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굴복하고 노동하고 겸손해 지며 낮아지면 그 땅을 기업으로 받 는다가 직역법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뭔가가 부족합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을 하면! 천국의 위로를 받는다고 했는데 이제 하나님께 절하고 굴복하고 노동하며 겸손하며 낮아져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 뭔가 아이러니 함을 줍니다.

A. 온유와 비굴 여러분은 온유한 것과 비굴한 것을 어떻게 구분하십니까 저는 온유와 비 굴함이라는 정의를 이렇게 합니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용서하면 온유한 것이 되지만 힘없는 자가 힘있는 자를 용서하면 비굴한 것이 된 다. 이것이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힘이 있고 실력이 있는 사람만이 무릎을 꿇을 때 온유한 것이고 힘이 있고 실력이 있는 사람만이 노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힘이 있고 실력이 있는 사람만이 절할(복종의 의미)수 있습니다.

힘이 있고 실력이 있는 사람만이 겸손함으로 낮아 질 수 있습니다.

힘이 없고 실력이 없는 사람은 껍대기는 흉내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 은 이미 온유가 아니라 비굴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아래의 말씀을 상기하고자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 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예수님의 온유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까 단순히 하늘 영광 버리고 성육신 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단순히 이새의 아들 다윗의 혈통에서 난 메시야 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온유는 성부 아버지 하나님과 한 점의 오차나 오류가 없이 모든 면에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그 권능으로 온유하신 것입니다. 나를 보았 으므로 아버지를 보았다고 선포하실 수 있는 예수님의 권능이 있었기 때문 에 예수님은 온유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정복하고 다스 릴 수 있는 분, 그래서 온유함으로 정복하여 기꺼이 십자가를 지실 수 있 는 실력자 힘이 있는 분이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온유 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말이 쉽지 온유함을 갖는 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닙니다. 예수처럼 되어야 진정한 온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이지 나는 지금 온유한 사람이다 라고 백번, 천번, 만번 기도를 해서 자기 체면에 빠진다고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와 한 몸 한뜻이 될 수는 없을까 .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온유함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아담(인간)을 창조 하실 때는 분명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두고 창조하셨습니다. 무한한 천국이 있고 그 즐거움이 있는 원인이 첫째요 극치적 천국의 즐거움을 인격적으로 나누어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 의 동기가 둘째요 그 천국을 주시데 한없이 끝까지 완전하게 주시고자 하 는 목적이 셋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어 패역을 하였기에 하나님과 본 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N극인데 인간인 나는 S극이 되고 말았습니다. 꺼꾸로요 반대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과 본질(本質) 본성(本性)적으로 달라져 버린 나 자신의 타락한 기존 성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을 버리지 못하면 예수를 닮데 껍데기만 닮고 예수를 소유하데 껍데기만 소유합니다. 앞서 언급하였듯 하류층의 때를 벗고 상류 층 문화의 사람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 하에 창조된 인간 본성을 소유하는 그 구체적 수단이 뭔가 하면 심령(心靈)이 가난하여 지는 것입니다. 그 심령이 가난 하여 지기 위해 우리는 애통을 해야 합니다. 애통이라는 것은 인간의 감 성에 호소를 해서 바른 것 옳은 것 영원한 것을 갖도록 하자는 적극적 신앙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적극적 신앙 자세가 없으면 심령이 가난하여 질 수가 없습니다. 이 애통이라는 말은 회개라는 말과도 일맥이 상통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 운데 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에베소서 4:1-3 예수님이 우리를 불렀다고 합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불렀느냐 하면 죄악으로 죽은 상태에서 이질적 성분에 서 불러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라는 말은 불러 냈다는 뜻입니다. 불러낸 자의 본분은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천국을 온 전히 완전하게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 주기를 원하시고 교회인 우 리는 이것 받기를 갈망 해야 합니다.

내 심령 안에 천국이 있는데 내가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 성장하는데 임 시것 세상의 것을 가지고 아옹다옹하는 사람들을 볼 때 얼마나 안타까웁겠 습니까,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되어 버렸는데 그들을 사랑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느냐 말입니다. 그 힘 그 실력이 나를 감동하고 감 화해서 내가 상대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풉니다. 그러면 그것이 상대의 입 장에서 아! 저 사람 참 온유한 사람이구나 하는 말이 나오고 스스로도 하나 님의 온유한 성품을 소유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2 .땅과기업 신의 성품을 덧입으면 하나님이 땅을 준답니다.

요즘같이 땅이 금값인 세상에 얼마나 반가운 말씀입니까 그런데 암만 생 각을 해도 이 땅이 토지(土地)는 아닌것 같습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저 는 이 땅을 세상으로 봅니다.

A. 땅 땅은 문자 적으로는 토지를 뜻합니다. 더 나가 지구를 뜻하기도 하고 한 지경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땅은 지역이나 지경을 뜻 한 다기보다는 은유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도 신약에서도 땅을 세상이라는 뜻으로 은유해 쓰여진 곳이 여러 군데 있습 니다. 본문도 그런 맥락에서 땅이라는 말을 세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땅은 흔히 우리가 이해하는 죄악된 세상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 세상이라는 말은 천상과 구별해서 쓰인 말입니다. 다시 말 하면 하나님의 세계가 아닌 인간이 사는 세계를 일컬어 세상이라고 합니다.

천국 선(하나님의 본질,본성,본능 적인 것)만이 존재 하고 지옥 악(하나님의 성품과 반대되는 것)만이 존재하고 세상 선과악(하나님의 것고 하나님의 것이 아닌것)이 공존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낙원이라 여기는 에덴 동산도 세상입니다.

구원받았다고 여기는 성도 자신도 세상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어 천국이 저희 것이다 라 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구원받은 영(중생된 영)이 재세(在世-성도가 구원받아 사는 세월)동안 활동하는 공간을 땅 이라고 표현하셨습니 다. 중생된 영이 활동하는 공간 그것은 육신과 마음과 이성과 가정과 사회 와 국가와 일류 일수 있으며 더 나가 지구촌 일수도 있으며 어쩌면 우주밖 일수도 있습니다.

B. 기 업(크레노미아) 성경에서 기업이라고 하면 상속 후사 장자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렇 게 쓰인 히브리 어는 나할라, 모라쏴 등인데 역사적으로는 생명의 가계(家 系), 부족의 가계(家系), 민족의 가계(家系) 국가의 가계(家系) 등으로 쓰였 고 그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면에서 본다면 이는 신앙 사상을 이어 받은 신앙의 상속으로 보입니다. 아버지의 여호와 사상을 이어 받은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말입니다. 아담의 생명을 이어 받은 아 들은 카인이 아닌 샘이었습니다. 아담을 닮은 아들이다 라고 했습니다. 다 윗의 후대는 압살롬이 아닌 솔로몬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계보 를 이어 받은 사람은 유대인과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들이었습니다. 에서의 사상을 가지고 압살롬의 욕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가만히 보게 되면 기업을 물려받은 자 는 어느 면으로 보나 아버지의 여호와 신앙을 이어 받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땅을기업으로받은자 땅이라는 말은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기업이라는 말은 상속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들이 온유함과 무슨 연 관이 있습니까 온유함의 복이 세상 상속이라니 이해가 가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현재 세상에 살고 있으니 세상은 이해가 갑니다. 세밀하게 심령적 세상 육적 세상 종교적 세상을 구분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세상이 뭔가 한 것은 이해를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상속은 무엇입니까 누구에게 상속을 받았습니까 누구에게 장자의 권리를 받았습니까 하나님에게서 입니다.

A. 하나님의 상속 하나님은 천국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아담의 신앙 계보를 이은 샘의 인생이었고 아브라함의 신앙 계보를 이은 이삭의 인생이었고 형의 생명 계보를 욕심낸 야곱의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뿌리라는 구원의 생명 계보를 타고 내려오십니다. 그 자 신이 구원의 본질이면서도 다윗의 뿌리라는 신앙 계보를 인용하신 것은 우 리에게 그 구원 계보 속으로 들어오라는 무언의 암시가 들어 있는 것입니 다.

세레의 본질이면서도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듭 남의 계보 속으로 들어오라는 무언의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업이라고 지목하여 주신 것은 천국입니 다. 천국을 주셨으면 주셨지 왜 땅과 연 관을 지으셨을까요 땅이란 인간 이 살아 있을 때 가치가 있지 죽으면 그 가치가 없습니다. 활용 성이 없고 존재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살아 있을 때 땅이 왜 필요합니까 우선 은 발을 딛고 서야겠지요. 인간이 피조물인데 공중에 붕 떠 있을 수는 없 는 일입니다. 식물을 먹어야 합니다. 활동을 해야 합니다. 번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땅이 가치가 있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죽으면 이 모든 것 이 땡입니다 , 끝입니다. 예수 믿으며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의 진리 법이 통 치하고 다스리는 나라를 확장하라는 말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았다는 말씀은 활용 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신앙의 계보 자들, 구원 생명을 이어 받은 사람들 중에는 그 구원 생명을 확장한 사람도 있고 축소한 사람도 있고 그저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본문의 의도를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네가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어 진정으로 온유할 진데 사는 동안(땅이라는 말뜻) 예수 그리스도로 덧입은 성품을 성장시켜 보아라 입니다.

왕 이라는 구원 계보 최고봉에서(신앙적 종교적 지도자의 자리에서, 나 라는 내가 나를 다스림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하여야 하는데도 바알과 아세라와 밀곰을 모셔다 놓고 그 우상에게 절을하 며 여호와 하나님에게도 절을 하는 이 패 역함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 앞 에 굴복하고 복종하며 무릅꿇어 절하고 겸손히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진리 가 다스리고 통치하는 나라로 가꾸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일차적으로 내가 내 심령을 진리로 다스려야 하고 이차적으로 내가 내 가족을 진리로 다스려야 하고 삼차적으로 내가 내 이웃을 진리로 다스려야 합니다.

내가 진리로 다스림을 받지 않으면서 남을 다스리겠다고 하는 자는 바리새 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신의 눈의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의 가시 를 뽑겠다고 설치는 돌 파리 의사 놈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C. 기업의 목적은 생산에 있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기업은 하나님의 것을 생산해야 합니다.

온유함(호프 프라에이스)에서 얻은 기업이니 온유함을 생산하는 것이 당연 하지만 가끔가다 엉뚱한 것을 생산하는 기업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예를 호세아의 아내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받은 기업을 하기고 무엇을 생산하고 있는지 정검하지 않을 수 없습니 다.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 입으로 뱉어 지는 수많은 말들 , 손으로 이루 어지는 사건들 , 가는 곳마다 남겨 지는 발자국 진정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하나님의 것을 생산하였느냐 하는 점에 정검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4 . 결 론 호프 프라에이스 라는 말로 시작되는 온유라는 말씀이 참으로 엄청난 말씀 이라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단순히 온화하고 자애로운 성품 정도로만 알 고 있던 이 온유 속에 그렇듯 큰 비밀이 감추어져 있는 것을 깨달아 알면서 새삼 주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하여 짐으로서 바른 것을 붙잡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 하고 심히 애통하게 됩니다. 이 애통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머리에 재를 뿌 리는 철저한 회개의 애통입니다. 이 애통의 울음을 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인 온유함을 갖게 되고 그 온유함은 세상(땅)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보 의 기업을 상속받아 하늘 나라를 확장하는 은혜를 맛보게 됩니다. 내 안에 서 내 심령이 하나님의 법이 다스리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이 구분이 되어 지고 가치의 환산이 정확하여 지니 절대 손해 보는 일이 없고 따라서 하늘에 것 영원한 것만을 생산하는 아름다운 기업이 되는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선배로부터 물려받은 구원 계보가 더 욱더 아름다운 번영의 꽃을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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