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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 (시 5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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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인과 죄
죄를 짓고도 죄의 심각성과 위험을 알지 못하여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심각하게 죄책감으로부터 너무 고민하여 쇠약해지는 것도 문제입니다.
강해설교가로 유명한 미국의 한 교회를 방문했을 때입니다.
설교하는 강대상이 온통 방탄유리 뒤덮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안내하는 분한테 왜 저렇게 방탄유리로 막아 놓았느냐고 물어 보니까 목사님이 하도 죄를 지적하는 설교를 하시니까 설교를 듣던 사람 중에서 그만 화가 나서 강대상을 향하여 권총을 발사한 사건이 두 번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런 장치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죄에 대하여 별로 감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죄에 대하여 설교할 때 신중한 듯합니다.
현대인이 생각하는 죄란 그저 기분 나쁜 것 사람들 앞에 수치스러운 것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교회에서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괴롭히는 것은 하나님이 과연 내 죄를 용서 하셨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죄책감과의 싸움으로 보내게 됩니다. 죄를 짓고 또 지으면서도 죄를 느끼지 않는 양심을 사단으로 말미암아 화인(火印)맞은 양심이라고 한다면 지워지지 않는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는 양심은 사단으로부터 참소당하는 양심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양면성을 그린 작품이 러시아의 대문호 토스트예프스키가 쓴 ‘죄와 벌’이라는 소설입니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전 러시아를 휩쓸 무렵 젊은 청년 주인공이 전당포 노인을 살해합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정당한 이데올로기로 비생산적이며 프롤레타리아 무산계급의 피를 빨아먹는 부르주아의 전형인 노파를 정죄하고 살해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돈을 훔칩니다. 경찰의 수사가 진행되지만 그는 수사 현장에까지 나타나는 대담함을 보입니다. 그러나 여주인공인 한 창녀와의 사랑에 빠지면서 그녀로부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뜹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자신의 몸마저 팔아야 하는 그녀에게서 때묻지 않은 영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점점 죄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고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 스스로 결코 죄라고 생각지 않았던 살인이 점점 강하게 부각되면서 악몽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목숨을 자기가 죽였다는 이 엄연한 사실 앞에 전율을 합니다. 여주인공으로부터 신앙의 감화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그는 자수를 결심합니다.
욕망을 정당시하기 위하여 인간은 절대 윤리를 상대적 윤리로 바꿉니다. 그리고 스스로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보도록 자신을 최면 시키지만 율법이라는 절대적 윤리 앞에 인간이 서게 되었을 때 한없이 죄에 대하여 두려워 떨게 되는 것입니다. 죄란 결국 벌이 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답게 인간 내면의 영혼에 대한 소상한 터치로 사람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게 하는 불후의 명작입니다. 요사이는 이런 작품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불행한 세상인 것입니다.
죄책감이란 결국 이러한 절대적인 윤리 앞에 인간이 비춰질 때 가지게 되는 두려움인 것입니다.

2. 신앙 속의 네 번째 걸림돌
죄책감으로 고민하던 때가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이제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한 뒤에 나는 내 자신이 많이 변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그러한 생각과 결심들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 줄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으며 교회 내에서 직분을 가지고 있는 것과 별개로 죄는 언제나 나를 따라 다녔습니다. 특히나 나를 괴롭힌 것은 내가 특별하게 자주 짓는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연약한 부분이 다르듯이 죄에 대한 우리의 연약함도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회개하고 기도한 뒤에 하나님 다시는 이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라고 기도하면 내가 다시는 죄를 안 짓겠지 하고 살아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책감은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죄 짐이 무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 지경까지 가게 되고 급기야 하나님에 대한 신앙까지 흔들거리는 것입니다.
① 걸림돌의 원인
그런데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구원의 문제입니다.. 구원의 성경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분의 변화입니다.
엡 2:2-4에 보면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 즉, 마귀의 자녀였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축복 대신에 고난을 당하며 저주 아래 있다가 지옥의 영원 형벌 가운데 들어가는 것은 죄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질적 이유는 마귀에게 속하였고 하나님께로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아들 되신 예수에게 접붙여 마귀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축복 받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며 영생과 생명을 얻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의 공로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요한 복음 5:24에 기록된 대로 과거, 현재, 미래의 완전한 변화요 구속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확신하는 성도는 죄책감을 이기고 또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② 회개란 하나님께로 돌아선 그것입니다.
어떤 아들이 장난치며 놀다가 사랑하는 아버지의 청자를 깨어 버렸습니다. 전전긍긍하며 고민하던 아들이 아버지께 나가 죄를 털어놓았습니다. 처음에는 노발대발하던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합니다. 아들은 다시 그러지 않겠노라고 고백하고 돌아와 가만히 생각하니 너무 큰 죄를 지은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울면서 잘못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대견스러워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생각해 보니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또 다음날 아버지께 나아가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다 용서했으니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들은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아버지께 나아가 용서해 달라고 빕니다. 아버지는 그만 화가 났습니다. 네가 아버지의 말을 어찌 그렇게 믿지 않느냐 하면서 아들을 나무랐습니다.
우스운 얘기지요
이러한 형태가 우리 성도들의 신앙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들 예수에게 모든 징계와 저주를 내리셨는데 그래서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롬 8:1-2에서 약속하셨습니다.
③ 몸을 씻은 자는 발만 씻으면 됩니다.
예수께서 구원 받은 것을 몸을 씻는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즉 우리 속에 있는 악한 영과 생각들을 결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을 모셨습니다. 성령을 모신 자는 결코 구원이 취소 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로마서 8:2에 기록된 대로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되 완전히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자신의 권세 아래 있던 인간의 마음속 즉 옛사람의 성품을 따라, 연약하게 죄를 잘 짓는 습관을 따라 악한 영으로 우리를 유혹해서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옛 성품에 익숙해 있는 우리는 결국 옛 남편에게 속는 여인처럼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우리의 구원을 취소시킬 수는 없습니다.
창 3:15에 이미 예언된 대로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께 뱀으로 위장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뱀의 후손 즉 악령들은 우리 구원 얻은 자들의 발꿈치를 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고도 죄인 줄 모르는 것도 문제이지만 하나님이 이미 용서해 버리신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가지고 너무 죄책감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도 문제라는 말입니다.
요한일서 1:9 에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얻은 자는 죄 지은 사실은 자백하고 고백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3. 다윗의 회개와 고백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깊은 회개와 자백의 기도를 한 사람, 가장 깊은 심연에서 헤매인 사람, 가장 심각한 죄책감에 시달린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야의 아내를 보고 음심을 품고 간통하였던 다윗입니다. 이스라엘이 성군이라고 불렀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를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셨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범죄하여 간음했던 전후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랜 전쟁 기간, 그 긴 망명 정치인의 자리에서 오는 스트레스, 정상적인 가정 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던 나그네 생활, 첫 아내 미갈과의 별거, 전쟁중에 만난 아내들의 노쇠 등등이 그로 하여금 옛성품을 부추겨 자제를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미 상당한 판단력이 흐려져 있었을 것입니다. 왕위에 올랐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남편들이 생존 경쟁 속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시달립니까 가족을 위해서 아니면 성취를 위하여서 일을 하다 보면 대개의 스트레스를 음주와 여자로 풀고 싶어집니다. 거기에다 여자들은 어떻습니까 일이 잘 안되고 가정의 일상에서 생기는 찌거기들은 그때 그때 해소가 되지 않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절제를 잃어버리고 탈선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선지자 나단으로 심각한 질타를 받습니다.
거기에서 청천벽력같은 음성으로 영혼과 마음을 때렸습니다.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용서하소서”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살인 교살 명령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는 곧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서 끊어져 나갈 것 같은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는 사울이 왜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영광과 질서를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했기 때문에 얻게 된 당연 귀결입니다.
그러나 성군 다윗의 신앙이 위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법궤 앞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잘못했습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주옵시고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엎드렸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용서하시면 죄인들에게도 이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들을 잘 인도하리라고 굳게굳게 서원했습니다.
죄책감은 그로 하여금 눈을 바로 떠서 하나님을 볼 수 없게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다윗의 죄의 고백에 대하여 용서하셨습니다.
물론 밧세바에게서 낳은 첫 아들은 거두어 가셨지만 다윗의 구원을 취소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4. 결론적으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도 죄를 시인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죄의 파괴력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습니다.
그리고 죄는 인간의 관계도 파괴합니다.
또한 이 세상에도 죄로 인한 파괴, 즉 오염 현상이 나타납니다.
다윗의 범죄는 음심으로 시작되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파괴가 왔고 사랑하는 부하 우리야까지 죽게 했으며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아이와 가정의 파괴 그리고 압살롬의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겐 실망을 가져다주었고 선지자로부터 파산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죄책감이란 이러한 죄의 파괴력을 깨닫고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죄가 더 크지 않도록 회개하고 고백해야 할 때에 그렇지 못하고 죄가 장성하게 되면 총명이 어두워지고 판단력이 사라져서 결국 파멸의 길에 이르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죄아래 팔려 가는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분을 의지하며 그분께 호소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하여 도전 받고 경책을 받아야 합니다. 앞서 살았던 믿음의 영웅들을 보면서 그들의 실수를 거울 삼아야 합니다.
죄책감 때문에 고민하십니까
날마다 우리에게 ‘이김’과 ‘살림’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합시다.
그리고 그분을 붙들고 성령 충만을 간구합시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은혜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사탄이 틈타지 못하도록 합시다.
죄와 악에게 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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