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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끝까지 견디는 자 (마 10: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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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올라가는 인생과 내려가는 인생입니다.
산 고기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죽은 고기가 물살을 따라 내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는 올라가는 산 물고기와 같습니다. 세상은 불의와 불법과 죄악으로 가득 차서 물과 같이 흘러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세상 조류를 따라 내려가는 인생이 아닙니다. 진리를 따라 올라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를 위해서 삽니다. 하나님의 복된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니다.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힘씁니다.
그러므로 희생이 따릅니다. 어려움이 따릅니다. 악을 좇는 자들의 조롱과 멸시와 미움과 훼방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전도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험악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모습은 마치 양과 같고 세상은 마치 이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양이라고 하는 동물은 천성이 낙천적이요, 무 방비적입니다. 짐승 중에 가장 약한 축에 속합니다. 반면에 이리는 잔인하고 사나운데다가 약한 짐승을 잡아먹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양이 그 속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괴로움이 따르고 아픔이 따르는 것입니다.
고통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이것을 괴로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육체적인 고통입니다. 이것은 아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아픔이라고 하는 것은 순간 적이며, 현재적입니다. 과거에 지나간 아픔은 아픔이 아닙니다. 아픔은 항상 현재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현재에는 아픔이 없다고 하더라도, 과거에 있었던 일이 마음에 남아 항상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이 후회라고 하는 것은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괴롭힙니다. 그런가 하면 현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미래를 걱정하므로 아픔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서부터 그리스도인다운 인격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부정적으로 여길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에게는 고통이 불가결하게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고통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다 같이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다 문제없이 평안한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계속되면 유익보다는 손해가 더 많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평안만 하면 생각도 없고, 발전도 없고, 향상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멍청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새 문제가 되고 있는 오렌지 족이니, 밀감 족이니, 재벌2세니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사회의 문젯거리요, 골칫거리입니다. 이들은 꽤나 잘난 줄 알고 돌아다니는데 속은 텅 비어 있습니다.

쓰고 싶은 대로 쓰고, 먹고 싶은 대로 먹고, 가고 싶은 대로 가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다 보면 멍청해지는 것입니다. 자아의식도 없고, 세계 의식도 없습니다. 가장 바보스럽고, 가장 나약한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세상에 누구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은 요지경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짐승처럼 되어서 쓸모 없는 인간 짐승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육체적인 아픔과 경적인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의 내적 존재를 각성하게도 하고, 인격을 강하게 단련시키기도 하고, 그 영혼을 순수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고통을 굳이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아픔 때문에 순수한 소망을 생각하게 되고, 고통 때문에 진실하게 되고 또한 겸손해야 될 줄을 알면서도 겸손할 수 없었던 사람이 실패와 어려운 고통을 겪고 나서 겸손해지기도 하고, 의심 많던 사람이 믿음을 가지게 되고, 영적인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면 고통이 고통이 아니오, 슬픔이 슬픔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역사를 보아서 우리가 잘 알 수 있지만 참으로 어이없는 핍박이 많았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고, 많은 오해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몇 가지만 생각해 봅시다. 성도들이 모일 때마다 사랑의 예찬을 나눕니다. 떡과 포도주를 먹으며 ‘이것이 내 몸이요 이것이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나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멀리서 이 이야기를 들은 핍박자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람의 피를 먹고 마시는 식인종이다’라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리고 한 가정에 먼저 예수 믿는 사람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처음에 잠시 가정이 불화하고 식구들의 관계가 불편하게 되는 것을 보고 ‘기독교는 가정을 파괴하는 종교다’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남녀 노소, 빈부 귀천 할 것 없이 평등하게 그리고 노예들을 해방시키며 인간 대접을 하니까 노예를 부리고 사는 핍박자들은 ‘기독교는 부도덕한 종교’라고 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하심을 친히 보고들은 확실한 진리에 대하여 자신 있게 증거하는 것을 보고 이방 종교와 핍박자들은 ‘기독교는 독선이다’라고 반박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앞에 있는 큰 핍박을 미리 아시고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를 죄인 취급하여 공회에 넘길 것이며, 심지어는 회당에 끌어다가 채찍으로 칠 것이며,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도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 나중 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말씀은 바로 ‘끝까지 견디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1. 믿음이 있어야 끝까지 견딜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숫한 핍박과 고난을 기쁨으로 참고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 없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무슨 일이든지 나중까지 기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7:7-8절에 보면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당장 응답이 없어도 우리는 낙심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요일5:4절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만이 끝까지 참고 인내하여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14:1-3절에 주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기에 성도들은 세상에서 모진 환난과 고통과 심지어는 죽음을 당할 찌라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에게는 우리 하나님께서는 지혜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마음에 평안함과 담대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확신을 가지고 견디는 것입니다.
딤후1:12절에 보면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하셨습니다.

2. 끝까지 견디는 자만이 승리합니다.
믿음으로 참고 인내하는 자와 우리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하수에로왕의 식민지 통치를 받던 중 정적들의 모함으로 수산 성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몰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위기 속에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중단하지 아니하고,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을 믿고 끝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때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왕 앞에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감동시키시사 에스더의 요청을 받아 드려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려고 음모를 꾀했던 하만이 처형을 당하고, 수산 성의 모든 백성들이 구원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18세기 유럽 대륙을 정복한 바 있는 나폴레옹이 사관학교 다닐 때의 일입니다.
사관학교의 교관이 사관 생도들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제군들, 똑같은 병력, 똑같은 지형 조건에서 똑같은 무기를 가진 두 군대가 싸운다고 하자. 과연 어느 편이 이길 것인가’ 이때에 나폴레옹이 일어나서 주저 없이 대답했습니다. ‘마지막 5분까지 견디는 자가 이길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버티는 자가 이길 것입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인내로써 결정됩니다.’ 이 대답은 오늘날까지 유명하게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3. 끝까지 견디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참는 자가 복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내하는 자의 복은 여러 가지 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할 때 성도들의 마음은 오직 믿음으로 미래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환경이 너무 편하게 되면 성도도 사람이니까 그 신앙이 태만해지고 세상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일시적인 것이지만 고통의 고비가 있을 때 성도의 믿음이 밝아지고 교회는 깨끗해지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나, 우리의 신앙 체험을 통해서 잘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성도들의 깨끗한 믿음의 열매를 원하셔서 때로는 악이 왕성하고, 성도가 고통하는 일시적인 기현상을 용납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고통을 통해서 잠깐 되는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아니하고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성도들로 하여금 잊지 않도록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같이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힘쓰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재물을 더 소중히 여길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시므로 환난을 통하여 소망의 눈길을 하나님께 돌리도록 하십니다.
딤전6:17절에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라고 하였습니다.
그 뿐입니까 고통을 통하여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겸손과 경건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벧1:7절에 보면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 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고통은 나의 서재의 많은 책 가운데 가장 좋은 책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고통은 믿음으로 살며, 진리를 위해서 살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오는 방해와 고통이 있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끝까지 견디는 것은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일이며, 자신에게 큰 유익과 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받는 유익과 복도 크지만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견디는 자는 천국의 영원한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에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딤후2:10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여 함이로다”고 하였습니다.

4. 끝까지 견딘다는 것은 사명을 다한다는 말입니다.
‘견딘다‘는 말은 고통을 면한다는 것도 아니오, 고통을 피한다는 것도 아니오, 고통을 주는 가해자를 죽여버린다는 것도 아닙니다. 고통 가운데 있지만 오히려 그 안에서 맡기신 사명을 다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만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 있든 감옥밖에 있든 가리지 않고 어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주님이 자기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다했습니다.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행20:23-24절에 보면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구원 역사를 다 마치시고 십자가를 지시며 운명하실 때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9:30)
사도 바울은 딤후4:7절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자기에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견디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믿는 사람은 환경에 지배를 받거나 오염되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은 구부러져도 성도는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다 변하여도 성도만은 여전히 하나님께 충성합니다. 끝까지 양이 되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양으로 출발했다가 이리를 만나니까 자기도 이리가 되고, 사자를 만나니까 사자가 되고, 곰을 만나니까 곰이 되고....그렇게 변해서는 안됩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양은 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 세상이 다 변해도 우리의 믿음만은 변치 아니하고, 온 천하가 다 변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전도의 사명은 중단되지 아니하고,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변해도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더욱 더 뜨거워질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인 인내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끝까지, 그리고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자유하리라. 승리하리라’.....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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