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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향이 다른 사람들 (히 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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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황혼에 심금을 울리는 노래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노래 내용은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라는 유행가였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하도 노래가 애절해서 이 슬픔의 주인공들이 누구일까 궁금하여서 다가가 보니 나이도 어린 문둥이 둘이 하염없이 울면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너무도 안돼서 같이 울었다는 말을 어머니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문둥병이 들어서 어쩔 수 없이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 사람들의 냉대 속에서 살아야하는 괴로운 자기들의 삶이 서글프고 저녁이 되니 고향 집은 더더욱 그리워지고·····, 몇 십 년 전만 해도 흔히 있었던 일들입니다.
고향!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단어입니다. 특히나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향의 의미는 훨씬 더 친숙합니다. 명절 때만 되면 민족의 대 이동이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교통정책을 잘한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는 대 혼란이 일어납니다. 명절 때마다 백 명 이상씩이 죽고 수 만 명이 다치는 교통사고가 일어나도 그래도 고향을 찾는 무리는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고향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주인공들은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흔히들 고향 하면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지역적이고 공간적인 의미로 사용을 합니다. “내 고향은 바닷가이다. 충청도이다. 전라도이다. 경상도이다. 두메산골이다.”라고 말들을 합니다. 그러면서 고향을 아끼고 자랑을 합니다. 북한이 고향인 사람들은 임진각이나 통일전망대에 올라가서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고향이 너무나 그리워서 향수병에 걸린 사람도 있고 못 가는 고향을 안타까워하면서 눈물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고향은 그런 고향이 아닙니다.
‘고향이 다른 사람들’인 우리의 고향은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고향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14절-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현대인의 성경-이와 같이 그들은 찾고 있는 고향이 따로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16절-그들이 갈망한 곳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고향이었습니다.
즉 다른 고향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들이 갈망하고 애타게 그리는 고향은 과거에 그들이 살았던 그들이 떠나왔던 먼 곳이라든지 명절이면 가보고 싶은 그리움과 추억이 담겨져 있는 곳이라든지 옛 친구와 연인의 그 부드러운 음성과 사랑스러운 손길이 잠못이루는 추억으로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그런 과거에 붙박힌 그런 곳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대로 고향은 앞에 있는 곳 그리고 그들이 그곳을 향하여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나아가고 있는 곳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서 본문은 ‘찾아가고 있는 고향’이라든가 ‘갈망하고 있는 곳’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결코 ‘뒤돌아보게되는 고향’이라든가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라는 말을 결코 사용하고 있지 않음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떠나온 그곳을 결코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매우 강력한 어투의 말로서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고향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의미의 그런 고향과는 거리가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I. 우리들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16절-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곳 하늘에 있는 것이라
여기에서 저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등 신앙의 인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고향은 본래 갈대아 우르였는데 하나님께서 이 곳에서 이들을 불러 떠나라고 한 이래 그들은 이 갈대아 우르를 절대로 고향으로 알지 아니하고 더 나은 고향을 찾아 순례의 길을 떠났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사모한 곳은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늘은 죽은 후에 가는 곳만을 말하지 않고 또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적인 하늘이 아닙니다.
여기에서의 하늘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이 하나님의 약속의 표현인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우리들이 간절히 바라보는 고향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 곧 인간의 부족한 뜻이 완전히 사라지고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실현이 되는 그런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곳은 이 세상을 떠나서 가게 되는 영원한 하늘나라도 되지만 이 세상 속에서 내 맘에 하나님을 모시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순간순간을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결교회의 위대한 부흥강사인 이성봉 목사님은 천국복음을 외치고 다니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너 천국을 가봤느냐 가보지도 못한 천국 얘기는 하지도 말라’고 했을 때 “내 마음에 예수를 믿고서 천국 지점이 생겼소. 이렇게 지점이 있는 것을 볼 때 본점이 있는 것으로 확신하오”하셨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우리의 고향은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실현된 세상인 것입니다. 그것의 완성은 미래의 것이지만 오늘도 실현이 되어야할 기독교인의 관심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한 것만 보아도 우리의 사명이 얼마나 막중한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사명을 위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3절-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되었다.
이 세상 사람들과는 고향이 다른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고향이 다르기 때문에 이 지상에서는 어디까지나 타향사람이고 나그네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들은 고향이 아닌 이 땅 위에서는 고향이 다르다는 서러움 타향살이의 외로움, 나그네의 고달픔을 경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향이 다른 우리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까 어떻게 하면 내 자신을 쳐 복종시켜 하나님께 순종할까가 관심의 내용이라면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좀 더 출세를 할까 좀 더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까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갈까 더 나은 배우자를 만날까 좀 더 쉽게 살수는 없을까 입니다.
사실 오늘날 대체적인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돈을 벌었는가 입니다. 증권에 대한 얘기, 부동산에 대한 얘기, 집에 대한 얘기입니다. 좀 더 돈을 벌 수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아깝게 되었다는 후회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촛점을 맞추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세상사람들에 있어서는 이방인이고 나그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5절-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한다.
이 말의 뜻은 아브라함을 비롯한 신앙의 사람들이 나그네 생활이 어려워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 본토 친척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돌아갈 수가 있었지만 그 고향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그곳을 사모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모시고 살아가는 나그네 삶이 어려워 언제라도 세상으로 돌아갈 수가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의 삶을 더 사모하기에 결코 세상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II. 고향이 다른 사람들의 이 세상에서의 삶의 특징
나그네 생활의 특징은 고난의 생활입니다.
히 11:35-38-어떤 이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더 나은 생명을 누리려고 석방도 거부하고 고문도 달게 받았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고 채찍으로 얻어맞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여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돌에 맞아 죽고 톱질을 당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몸에 두르고 돌아 다녔으며 가난과 고난과 학대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로 헤매며 다녔습니다.
정말로 고향이 다른 사람들로 사는 것은 고난의 연속인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타향살이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을 때 무덤 쓸 장소도 없어서 무덤을 구할 때
창23:4-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내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소서 라고 하였고
야곱은 그가 바로 왕의 앞에서
(창 47:9) “내 나그네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인데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하였으며
대상 29:15-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향이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꿈과 희망이 있는 곳이 아니며 궁극적인 관심이 있는 곳도 아닙니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아름다운 사랑의 얘기가 있는 곳도 아닙니다. 고향이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언제나 고독한 곳이 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오늘 날의 이 세대를 보면 진실성과 믿음이 없는 세대입니다. 부도덕 부조리, 거짓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입니다. 미움, 시기, 권력 투쟁, 명예 추구..... 조금 더 있다는 사람, 안다는 사람들이 우리의 이맛살을 찌프리게하는 곳, 온갖 거짓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는 것은 고난의 생활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럼 왜 다른 고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III. 더 나은 고향을 찾게 해주는 믿음
13절-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라는 말로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불신과 배신으로 점철된 이 믿음 없는 세상에서는 타향살이요 나그네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삶은 이 세상의 거짓과 부조리에,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에 역행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기에 고난의 삶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러한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고향이 다른 사람들’에게 더 나은 고향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더 나은 고향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고대광실보다 더 좋은 집이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보다 더욱 고상한 하늘에 있는 집이요. 하나님의 솜씨로 지은 더 훌륭한 성이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음 없는 세상에서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타향살이를 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편기자는 (시 84:10)-“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으니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우리의 고향이 아님을 명심하고 ‘고향이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과 믿음으로 살다가 죽는 것은 고난의 삶이지만 이 믿음은 우리를 더 나은 고향으로 인도하는 것임을 믿고서 이 나그네 삶을 회피하지 말고 굳세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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