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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칼을 쳐서 보습으로 (미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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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 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 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꼴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 호와의 산에 을깍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을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을 것임이라 그가 많은 민족 증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안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었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 만민 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하 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오늘은 이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을 얻은 날입니다. 이 날은 이 민 족시 자유와 평화를 얻은 은혜의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약소민족으로 일본에 강제로 속국이 되어 30년동안 노예살이를 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자유와 독럽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연합군을 숭리케 하여 일본을 무장 해제시켰습니다. 이방의 나라 일본 의 무장은 해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 해방의 감격은 잠깐이었습니다. 우리 민족끼리 칼을 갈고 서로 원수를 맺고 죽이고 살아야 되 는 분단의 아픔을 가져왔습니다. 지금 이 민족의 최대의 과제는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드는 날이 속히 오는 것입니다.
칼을 쳐서 보습으로, 창을 쳐서 낫으로 만드는 것은 펑화를 창조하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칼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입니다. 보습은 밭을 가는 연장입니다. 농촌에서 소가 밭을 가는 쟁기가 있는데 쟁기 끝에 붙어 있는 쇠붙이가 보습입니다. 낫은 곡식을 추수하는 기구입니다. 이제 우 리는 칼과 창을 버리고 보습과 낫을 들어 평화의 민족이 되도록 기도해 야 되겠습니댜. '칼을 쳐서 보습으로 이 땅의 펑화를!' 이것이 본 교단 총회의 주제입니다. 우리 교단은 통일의 신학을 가지고 민족 통일을 위해서 줄기차게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이것 때문에 고난도, 핍박도 끊임없이 받고 있 는 교단입니다. 그래서 세계사에 우리 교단은 자랑이 되고 있습니다. 큰 교회가 보이고, 사람이 많이 모이면 대단한 것 같지만 언제나 역사 는 사람이 이 모인 것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사실 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계시하는 음성을 듣고 있느냐. 안 듣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역사 에서 민족의 최대 과제가 통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선교하고 계 신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고 있는 신학 입장, 바로 우리 교단의 신학 입장이고 제가 가지고 있는 신학 입장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사섬들 세미나를 할 때 저들은 처음에는 제가 소속 되어 있는 기장을 비판하다가 나중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장이 라야 저런 목사가 나오지.' 정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시대에 필요 한 외침이 저들의 가슴을 뚫는 메시지가 되어 거기에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통일은 국토가 하나가 되고 민족이 화합하고 사상이 일치를 이루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민족이 성민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여기에 통일신학이 필요합니다. 이 민족의 생존. 이것은 평화 통일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 민족이 전쟁의 칼을 녹여서 민족의 생존의 보습을 만드는 날이 빨리 와야 한다 는 것입니다.
예언자 미가가 살던 시대는 주전 739년에서 697년이었습니다. 이스 라엘 민족은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라고 하는 두 나라로 갈라져서 꼭 우리나라와 같은 역사 상황이었습니다. 서로 싸우고 반목하고 원수 를 맺고 있는 당시의 저 북방의 앗시리아라고 하는 큰 나라가 있어 이 스라엘 민족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정치 지도자들 은 민족의 위기를 깨닫지 못하고 가난한 백성을 착취하고 불의를 자행 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타락한 무리들 때문에 시온은 밭같이 갊을 당하게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쑥대밭이 될 것이며, 수풀처럼 황폐하게 될 것이라.'고 미가 선지자는 예언했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은 구웠의 큰 손을 펼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종말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 으로부터 나와서 그 도를 가르치게 되면 모든 백성이 그 길로 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칼로 위협하는 이방 민족을 심 판해서 칼을 쳐서 보습으로 창을 쳐서 낫으로 바꾸어 줄 것이다.'하였 습니다. 본문 4장 l절을 보십시다.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 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여기 '말일이라는 말에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 는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가 망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돌 아가서 성전에 모이는 사건을 눈으로 보게 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 다. 그리고 마지막활 예수님이 오셔서 전세계를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 게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절에 보면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합니다. 이방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에 못들어갑니다. 그런데 다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그 천년왕국이 이루어지면 모든 백성이 다 여호와의 전으로 와서 모 인다는 것압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나올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3절에는 '그가 많은 민족 중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 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 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 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사실 칼을 켜서 보습으 로 완전히 만드는 때는 예수님이 왕으로 오셔서 이 역사를 지배하는 천 년왕국이 될 때의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앗수르 로부터 침략을 당해 망하고 말지만 앗수르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해 방을 얻고, 전쟁은 그치고 평화의 날이 을 것을 예언하면서 장차 이 사 건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칼을 쳐서 보습으로 창을 쳐서 낫으로'만드는 것은 무장 해제하는 것입니다. 여기 무장 해제는 죽음을 꾀하는 일 대신에 생명을 양육하는 일을 하기 위하여 파괴해서 건설로 이용하는 창조행위를 말하고 있습 니다.

평화는 이 민족이 살 길입니다.
지금 이 민족은 칼을 쳐서 보습으로, 창을 쳐서 낫으로 만드는 작업 을 지상 최대의 과제로 삼아야 합니다. 만약에 정치도. 문화도, 교육도, 종교도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목표를 세우지 아니하면 그것 자체가 망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철저한 교육을 시켜도 그 교육이 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면 그 교육은 망하는 교육입니다. 스파르타 교육은 칼을 만 드는 교육이었고 이스라엘 교육은 창조의 교육, 보습을 만드는 교육이 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다엘 민족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민족은 서로 칼을 만드는 것에 총뤄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지금 많은 분들이 '분단되어 서로 이떻게 살면 되었지.꼭 통일이 필요 한가.'질문을 합니다. 그것은 분단의 고통과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입 니다. 우리나라의 분단은 독일의 분단과 다릅니다. 독일은 전쟁이 없었 습니다, 그래서 동서독이 적대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같이 증오 와 살기가 있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6.25라고 하는 전쟁 때문에 계속 증오와 살기로 칼을 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살기 위해서 무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사고입니다. 양쪽이 군사력 을 아무리 강화하여도 안보의 위협은 더 늘어갑니다. 북한이 원자탄을 만들고, 남한이 차세대 무기를 구입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실은 일본이 나 중국을 향한 것이 아니고, 서로 민족의 앞가슴에다 칼을 대고 죽이 려고 계속 무력을 증강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통일은 민족 생존의 문제입니다. 민족의 생존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무기를 양쪽이 계속 가지면 가질수록 위험합니다. 이 무장을 해제해야 합니다. 6.25때는 500만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제 전쟁이 나면 이 민족은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옛날 무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우리는 평화를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통일이 되지 아니하면 경제가 발전할 수 없습니다. 양쪽의 군사 비 l0조원을 계산하면 150억불입니다. 민족의 복지향상을 위해서 써야 할 이 엄청난 돈이 군사비로 지출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칼을 갈고 있 는 민족의 슬픈 사실입니다. 민족의 분단은 민족 주체성을 상실케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강 대국에 종속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서로 침략을 당할 위험을 안고 있습 니다. 강대국에 군사원조를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북은 소련과 중공 에 붙어서 간을 빼주고 있습니다. 또 남한은 미국에 붙어 있습니다. 지 금 우리가 밥을 먹고 살고 있지만 이 민족은 양쪽이 다 주체성이 없습니다. 분단은 민족 양심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민족의 양심이 어디에서 무너진 줄 아십니까 정치와 이념의 차이로 수많은 동족을 죽이 면서도 양심에 가책이 없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사실입니까 지금 이 민족에게는 그토록 선했던 양심이 없어졌습니다. 백의민족의 순수한 양심도 잃어버린 채 도덕성이 무너지고, 사회가 혼란에 빠진 원인이 어 디에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분단에서 가져온 구조악의 비극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갈라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 줄 아십니까 한번 갈라지면 상대 편에 대해서는 양심이 마비됩니다. 그래서 갈 라지면 서로 적이 되기 때문에 어떤 악을 가해도 양심의 가책이 없습니다. 이것이 전쟁이 저지르는 최대의 악인 것입니다. 전쟁에는 양심이 없습니다. 6. 25의 전쟁은 동족 수백만을 죽이고도 양심에 가책이 하나도 없습니다. 남한의 군사 정권도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양심의 괴 로움을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칼을 가는 자는 이미 양심을 버린 것입 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누르고 빼앗고 짓밟았건만 한가닥 양심의 괴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 사회의 분단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힘센 자가 정의입니다. 칼을 든 자가 지배하는 사회는 양심이 마비됩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대에 양심과 도덕을 타락시킨 자가 누구라고 생각 하십니까 가난한 농민들이 이 민족의 양심을 타락시켰습니까 순진한 대학생이 데모해서 나라가 흔갈합니까 불쌍한 노동자가 노사분규를 일으키니까 지금 이 민족의 양심이 어긋났습니까 이것을 똑똑히 아셔 야 합니다. 이 민족의 양심을 짓밟고 타락시키는 자는 정치, 경제, 사회 적으로 가진 자들입니다. 분단을 통해서 정권을 잡고 있는 자들 속에 악이 들어있기 때문에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퇴폐문화가 어디에서 왔습니까 한탕주의가 어디에서 왔습니까 노동자가 한탕주의를 합니까 한탕주의가 어디서 시작되었습니까 전부 칼을 든 자가 칼로 빼앗아 버리면 한탕입니다. 그래서 이 문화는 전부 병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냥 밥먹고 사니까 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들어야 됩니다. 다른 때는 신비한 천당 애기를 들어도 오늘은 역사의 문제를 똑똑히 알아야 됩니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바른 하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 민족의 양심을 짓밟고 타락시킨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 악이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분단이 가져온 비극입니다. 이 분단은 어디에서부터 왔습니까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죄가 가정을 분리시키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분리시키고, 그리고 형 제간을 분리시켜서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이 무서운 죄가 분단인데 분단의 죄에 대하여 전혀 아무런 감각이 없다고 한다 죄에 대하여 감 각이 업다는 것이고, 죄에 대하여 양심이 마비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민족을 살리고 자손 만대를 위하는 최대의 과제는 민 족의 분단을 극복하는 통일입니다. 월남식 통일은 안됩니다. 월남식 통 일은 무력에 의한 공산당 통일이고, 독일식 통일은 홉수 통일입니다. 우리 남한과 북한의 통일은 동서독이나 월남식이 아니고, 철저하게 하 나님의 섭리에 의해 통일을 해야 됩니다. 독일은 경제로 통일했습니다. 자본주의 경제권으로 통일했고, 월남은 무기로 통일했습니다 우리 한국의 통일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신적인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의 분단은 우리들의 문제가 아니고 세계사의 문제요 역사 의 문제요, 영과 육의 문제요, 하나님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오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라는 이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예수님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어야 할 사람들이 이방의 강대국이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임을 잘 아셨습니다. 이방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 는 백성들입니다. 하나님 없는 백성들은 칼을 들고 사는 민족입니다 칼 들고 사는 민족에게 칼을 쳐서 보습으로 그리고 창을 쳐서 낫을 만 든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칼을 빼앗아서 보습으 로 창조되는 그 놀라운 미래를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 한 놀라운 사실을 사랑하는 제자들과 더불어 우리에게 교훈으로 주었 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 들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히는 저 로마를 칼로 쳐서 보습을 만드는 날이 을 것이다. 저 로마를 무장 해제시키는 날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 의 전능하신 아들이 왔으니 이제 이스라엘 민족을 저 로마로부터 해방을 시키는 날이 을 것이다.'라고 기대하면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이 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는 알 바가 아니요 성령이 너희 에게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네 속에 있는 칼은 보습으로 바꾸어질 것이다. 네가 로마를 향하여 가는 칼을 보습으 로 바꾸어 로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지금 베드로는 마음속으로 로 마를 향해 칼을 갈고 있습니다. 로마로부터 칼로 망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베드로는 칼을 갈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는데 대제사장의 종들이 예수님을 포박할 때 베드로는 칼을 쳐서 말고의 귀를 끊었습니다. 베드로는 칼을 품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칼올 든 자는 칼로 망 한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칼을 집에 꽂았습니다. 칼은 집에 꽂았으나 가슴 속 으로는 여전히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심.령 속에 도사리고 있는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마가의 다 락방은 대장간이었습니다. 성령의 도가니는 칼을 녹여서 베드로의 가 슴 속에 보습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주셨습니 다. 예수님은 뜨거운 성령의 불로 베드로의 가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칼을 녹여서 보습으로 바꾸어 주사 평화의 사도로 로마에 가게 했던 것 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토록 원한에 찼던 로마의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들어 로마로 갔습니다.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복음의 보습 은 로마 사람들의 가슴을 갈아엎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로마 사람의 묵은 밭은 베드로가 외치는 복음을 통해서 갈아엎어지기 시작했고,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평화의 열매로 맺어져서 그 땅은 로마의 평화가 아니라 예수의 평화로, 그리고 드디어 그 땅에서 바티칸 왕국을 이루는 놀라운 평화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칼로 점령할 수 없는 로마를 보습으 로 갈아서 그 땅에서 오늘의 평화의 열매를 거두게 된 사실은 얼마나 신비한 일입니까! 바울은 다메섹을 향해 칼을 들고 갑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 고 다메섹을 향해서 칼을 들고 갑니다. 그런데 하늘로부터 성령의 능력 이 사울을 사로잡습니다. 하늘의 강한 능력이 사울을 사로잡아 칼을 쳐 서 보습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의 심령에 평화의 복음을 심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 속에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일은 바로 성령께서 지금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이 S년동안 따라다녔으나 저들의 마음속 에 품고 있는 칼을 버릴 수 없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사 저들의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들었고, 창을 쳐서 낫 으로 만들었기에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가는 데마다 사람들의 마음을 갈아엎는 보습이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려고 40년동안 가슴에 품은 칼 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칼로 자기 백성을 위해서 한 일은 고작 애 굽인 하나를 쳐죽이고 모래 가운데 묻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 를 미디안 광야로 보내어 40년동안 연단시켰습니다. '모세야 칼로는 네 백성을 해방시키지 못한다. 너는 보습을 만들어야 한다.' 드디어 4o년이 지나고 호렙산 기슭에서 사라지지 않는 성령의 불이 모세의 가 슴 속에 있는 칼을 녹여서 보습으로 만들어 이스라엘 민족의 가슴을 갈 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보습으로는 안되었습니다. 왜 모세의 보습으로는 민족의 마음밭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보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 의 보습만이 우리의 심령을 갈 수가 있고 그 복음의 씨앗만이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마음밭에 뿌려진 을법은 결코 펑 화의 열매를 얻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원망했고, 탄식했고, 자기 지도자 모세를 돌로 때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주께서 우리에게 말하십니다. 우리의 심령을 보습으 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우리는 동참해야 됩니다. 예레미야 선지 자는 전했습니다.'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같이 말하노라.
너회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마라. 유대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회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회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 께 속하라.,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발을 갈아야 한다는 것입니 다 이 민족의 마음밭을 갈아야 할 보습은 우리 한국교회요, 여러분과 나 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훌을 거두 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회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 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처럼 너희에게 내시리라 너희는 악을 밭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그 길과 네 용사의 많음 을 의뢰하였음이라. 지금 이 민족은 거짓 열매를 먹고 있다는 것입니 다. 나라가 조용하니까 평화스러운 줄 알지만 이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강대국에 군사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지금의 열매는 거짓 열매라는 것입니다 진짜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평화의 열매를 먹 는 것입니다. 해방 후 우리나라의 민중들 속에 널리 퍼진 민요가 있었습니다.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 속치 마라, 일본놈 일어나니 조선사람 조심하라. 이것은 이 민족에게 들려진 하늘의 음성이었습니다. 지금 일본이 다시 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제 서서히 또 물러가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거짓된 평화 속에 속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민족의 가슴을 기경하는 보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민족을 회개시키는 보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민족분단의 구조악에 동참한 죄를 회개하는 보습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나 자신이 회개하는 일입니다. 민족의 가슴을 갈기 위해 서는 내가 보습이 되어야 니다. 내 속에 칼이 있고서는 밭을 갈 수가 없습니다. 내 속에 보습이 창조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민족통일을 이룩하지 못하고 분단에 동참했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한국 교인들은 개인들의 죄는 잘 회개합니다. 부모님에게 불효하고 목사를 괴롭히고 이웃에게 잘못한 죄는 회개하지만 민족에 게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전혀 양심에 가책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민족은 기독교인의 숫자는 늘어가도 민족 공동체는 달라지지 않고 있습 니다. 기독교인의 숫자가 늘어난 만큼 사회악도, 불의도, 퇴폐도, 부패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는 있지만 생명력은 잃고 있습 니다. 정의의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종교인만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물량적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주님께서 보시는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의 사람은 적습니다. 민족을 살려야 된다고 하는 민족 공동체를 향한 의식 이 없습니다. 유명한 부흥사 찰스 피니가 부흥회를 하면 그 지역사회가 달라졌습 니다. 술먹는 사람이 없어지니 술집에 파리가 앉고, 교도소에 사람이 안들어오니까 간수가 졸았다고 했습니다 그가 지역에 들어가는 곳마 다 악이 물러갔습니다. 그 땅은 의로운 사회가 되었습니다. 교회에 부 흥의 역사가 일어나면 사회가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우 후죽순처럼 늘어나도 역사는 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사람처럼 불의하고. 부패하고, 타락하고 있습니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계명을 어긴 죄에 대하여 우 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갈라진 조국 때문에 같은 피를 나눈 동 족을 미워하고, 죽이고. 살인했고, 그 죄악을 정치와 이념의 다름으로 오히려 정당화하는 이증의 죄를 범해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이북 교회는 공산주의, 남한 교회는 자본주의를 우상처럼 섬겼 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위해 태어난 사람도 아니고, 공산주의를 위 해서 태어난 사람도 아닌데 교회가 사회 체제를 우상화시켰습니다. 자 본주의의 타락을 지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체제를 우상화하면서 거기에 짝지어 살아간 이 남한 교회도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현실에서 우리가 먼저 회개해야만 이 민족의 가슴을 갈아내고 핑화의 씨를 심을 수 있는 보습이 될 수 있습니다 정의의 보습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기도하시고 내려오시다가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너희가 모른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오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았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 하는 집이거늘 너희가 강도의굴을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강도는 남의 것을 고 주인노릇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주인노릇 하는 심령은 바로 강도의 굴혈이 된 것입니다. 당시에 성전에 모인 많은 무리들은 대부분 장사꾼 들이었습니다. 타락한 무리들은 성전에서 경제적인 이권을 따지고 있 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의 심령을 보시면서 네가 정말로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향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 다 너의 경제 적인 이권을 위해서 믿고 있다면 네가 바로 종교적 장사꾼이다.'라고 탄식하시면서 우리를 내어 쫓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용납히고 사랑히는 화해의 보습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초대교회 때는 예수 믿고 천당 가라고 외쳤습니다. 해방이 되면서부터 한국교회는 예수 믿고 복받으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복 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제 이 민족에게 전해야 될 복음은 '예수 민고 화해합시다. 입니다. 이것이 민족을 살리는 복음입니다. 민족의 마음 속에 갈등과 대럽으로 응어리져 있는 한 이 화해의 복음이 우리에게 생 명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민족적으로 남북이 갈라졌습니다. 남북이 분단된 무서운 갈등이 이 역사 속에 심화되어 있습니다. 노사간의 대 럽, 빈부의 격차, 세대차 이런 갈등이 지금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습니 다. 이것을 화해하는 길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먼저 기독교가 이 민족 속에 화해의 복음을 가지고 전해야 한다는 것입 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아무도 미워하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마음 속에 미워하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김일성까지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그를 향해서 미움을 가지면 내가 심판을 받습니다. 그를 하나님 심판에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면서도 자기를 죽이는 원수를 향해서 미움을 갖지 아니하고 '아버지여 저들은 알지 못하여 그러하오니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라고 하시며 화해를 선언합니다.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자기를 돌에 쳐죽인 자들을 위해 '주 예수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며끝까지 원수를 수로 알지아니하고 죽었습 니다. 이것이 바로 화해의 복음이고 용서의 복음입니다. 여러분, 혹시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가인의 후예입니다. 이것은 벌써 전쟁의 사람입니다. 전쟁은 상대방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전쟁문화는 그렇기 때문에 양심을 마비시킵니다. 그러므로 평화만이 하나님의 자녀의 상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민족에게 희년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은 둘이 있습니다.`하나는 애굽으로부터의 해 방입니다. 이것은 바로의 압제로부터 해방받은 것이고, 또 하나는 자국 내에서의 해방인데 이것을 희년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 나안 땅에 들어가서 50년마다 그 역사의 체질을 변화시켰습니다 저들 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다보니 종이 생기고, 노예가 생기고, 빚진 자 가 생기고. 품꾼이 생기고, 결국 부조리가 가득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애굽에서 나올 때 노예살이에서 해방되어 맨몸으로 함께 나 왔는데 살다보니 부자. 가난한 자, 권력을 가진 자, 소외당한 자, 누르 는 자. 누림을 당한 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민족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가진 자는 빚을 탕 감하라, 너희는 풀어주어라, 품꾼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라.'하셔서 민족 전체가 억울한 자가 없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날입니다. 정권을 잡은 자는 정권을 안 잡은 자에게 나누어야 됩니다. 부자는 가 난한 자를 돌보아주어야 됩니다. 이것은 진정한 민족의 화해와 자유와 해방입니다. 진정한 화해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칼을 다 빼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눌린 자는 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한이 칼입니다. 가 난한 자는 가난의 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화해의 복음을 가 지고 가진 자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고 권력을 가진 자는 소외당한 자 에게 권력을 나누고 서로 마음의 한을 풀어야 합니다. 이제 가진 자가 안 가진 자의 마음속에 있는 한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서로 화해와 일체를 이를 때 그 땅이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그런데 가진 자도 안 가진자도 칼을 가지고 있으니 이것이 얼마나 비통한 일입니까 얼마나 통곡할 일입니까 이것은 안믿는 사람들이 할 짓인데 기독교인들까지 도 똑같이 칼을 갈고 있으니 눈물이 납니다. 이방 사람들은 그렇다 하 더라도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이제 이 소리는 참으로 하늘의 우뢰소리로 우리에게 울려오는 것입 니다. 사람의 소리로 귀를 기울여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 종은 어젯밤 무릎을 꿇고 있는데 주의 성령이 가슴 속에서 외쳐라, 네 교인들에게 외쳐라. 이 민족에게 외쳐라. 그리고 이 민족의 한을 풀어야 한다.'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울게 했습니다 이 민족의 칼을 빼서 보습으로 만드는 보습의 사명을 우리 기독교인 들이 감당하여야 됩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서 여전히 랄올 칸다면 이것은 저주받은 자의 길입니다. 우리가 하늘의 복음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저주의 칼을 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녹여야 합니다. 성령의 불로 녹여야 합니다. 교회는 대장간입니다. 이곳에서 한의 랄을 빼서 보습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보습으로 역사의 묵은 밭을 갈아야 합니다. 저는 어젯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눈물이 비오듯 쏟아져 원고를 몇 번이고 적셨습니다. 그것은 민족의 한과 민중의 한이 이 종을 울게 한 것입니다. 이 좁은 나라에 한맺힌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한은 민족 의 가슴 속에 있습니다. 한을 품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눈 물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민중의 한을 녹이고 우리의 가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칼을 쳐서 보습 을 만드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죽는 사람이 있어야 합 니다. 칼은 자기 속에 있습니다. 칼을 치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일이므 로 힘든 일입니다.

순교자는 평화의 보습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가슴을 가는 보습이 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뒤를 이어 자기를 죽여 보습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가는 보습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죽이는 일을 먼저 해 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늘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칼을 쳐 서 이 땅에 평화를 이 말씀은 '너를 죽여 순교의 제물로 이 땅의 펑 화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는 가정이나 교회, 이 사회 어느 곳이든 평화를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순교는 평화의 보습이 되는 신앙행위입니다 순교는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신앙고백입니다. 순교는 원수의 칼에 죽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죽음으로 원수의 칼을 무장 해제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보습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죽음을 자원하고 선언히 는 것입니다. 만약 원수의 칼에 죽으면서 마음속에 칼을 품고 죽어간 다면 이것은 순교가 아닙니다. 다만 약자로 죽어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순교는 죽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자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먼저 죽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여서 보습을 만드는 자는 원수의 마음의 쓴 뿌리를 갈아 엎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가슴을 기경하는 보습이 되려고 십자가 위에서 자 신을 화해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예수님은 죽으면서도 원수가 없었습 니다. 자기를 죽이는 저 악한 무리들에게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 서, 저들은 알지 못하여 그러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죽 기 전에 자기의 할 일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는 원수를 위해 용서를 빌고,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칼을 쳐서 보습으로 이 땅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자기를 죽여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만이 보습이 될 수 있습니 다. 순교의 제물은 어디나 있어야 합너다. 가정에서도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죽이고 가정에 들어가면 가족들의 마음을 가는 보습이 됩니다. 직장에 순교자로 들어가면 직장인의 마음을 기경하는 보습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역사를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보습을 만드는 데 칼을 망치로 쳐서는 안 됩니다. 칼이 녹아야만 보습이 됩니다. 이것 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되는 것임을 계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습니다. 이 권능은 순교자의 권능이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권능입니다. 베드로, 바울, 스데반은 모두가 다 성 령의 권능으로 순교자가 되어 평화의 보습이 되었습니다. 오 성령이여, 우리에게 임하소서.우리의 심령 속에 도사린 칼을 녹 여주소서. 이제 순교의 제물이 되게 하소서. 이 분단된 민족의 가슴을 가는 보습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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