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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난한 예수, 부요한삶 (고후 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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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생동안 예수를 바라보고 삽니다. 그러나 어떤 예수를 바라 보느냐에 따라 받는 은혜가 다릅니다. 부요한 예수를 바라보면서 우리 의 욕구를 층족시키는 은혜가 있고, 가난한 예수를 바라보면서 현재 자 기 삶의 부요를 고백할 수 있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 성탄에 우리는 가 난한 예수를 바라봄으로 부요한 삶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아침에 예수를 바라보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며, 저녁에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잠이 들어야 합니다. 마치 해바라기가 아침부터 해를 바라보고 방향을 돌리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자고 삶의 방향이 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 인생이 끝날 때 스데반 집사처럼 우러러 보좌 우편에 서신 인자를 바라보며 그 일생을 마칠 수 있는 사람은 최대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바라 볼 때 내가 온전해집니다. 내 영육이 온전해집니다. 내 삶 전체가 온전 해집니다. 우리가 말구유에 나신 예수님을 보면 겸손해집니다, 섬기는 예수, 종으로 살아가신 예수를 볼 때 우리는 열심히 헌신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의 교만한 마음 을 못박을 수 있습니다. 허탄한 생각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를 희생시킬 수가 있습니다. 재림하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소망 가운데 살 수가 있습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욕구는 부자로 사는 것입 니다. 부자 되기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부요하다.' 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에서 “부요.라는 말과 '부자'라는 말은 의미가 다릅니다. 부자는 소유의 표현이요, 부요는 존재의 표현입니다. 자기가 자신에 대하여 만 족하며 넉넉하고 풍성한 삶을 누리는 상태를 부요라고 말합니다. 영국의 어느 귀족집에 하인이 있었습니다. 그 하인이 어느날 탄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탄식하느냐.'고 물으니까 '예, 1만불 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내게 만불이 없어서 이렇게 탄식하고 삽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인자한 주인이 '그래, 네가 내 집에 와 있는 게 너무 고맙다. 내가 l만불을 줄테니까 잘 살아라.'하고 주인이 나가면서 들어보니 '아차 이럴 줄 알았으면 l0만불을 달라고 할 걸 그랬다면서 또 탄식하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목구멍까지 기어오르는 욕심을 제어할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어떤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까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가난해진 예수를 보라.' 예수님은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능력이 온전하시기 때 문에 전능하시다고 말합니다. 그 지혜가 온전하시기 때문에 전지하시다고 말합니다.
성품이 온전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부요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요케 하시려고 '가난해졌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난하게 된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 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내가 부자 되어야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겠습니다. 낭을 도와줄 수 있도록 부자 되게 하여 주옵소서. 좋은 일 할 수 있도록 부자 되게 하여 주시 읍소서.' 교회 성장을 원하는 목사님들은 대교회 명분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많은 생명을 구원하려는 동기이고, 두번째는 교회가 커야 선교 사업도 하고, 구제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 큰 교회 세우려는 욕망은 좋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는 큰 교회 목 사 되지 말고 네가 가난한 자가 되라.'하십니다.그러므로 이것은 보통 사람들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종아 큰 교회 목사 되어나 를 따르는 것보다 네가 가난해지면 된다.'고 하십니다. 큰 교회를 원하는 욕망은 부자 되려는 사람의 욕망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창고를 열어 구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집을 지어 나누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 해 가난해졌습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예수님의 신비한 비밀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구제사업을 하여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돌봐주 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네가 가난한 형제를 돌보고 그들이 잘살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네 가 가난해져라. 네가 민중을 위한다면 네 스스로 가난해져라.'하신 것입 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 집에 가난한 친척이 왔습니다. 그의 장롱 문을 열고 좋은 옷 한 벌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얻어가면서 친척은 마음의 부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많은 옷 중에서 한 벌밖에 안주네.'하면서 섭섭한 마음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인정 많은 가난한 형 제가 있었습니다 자기 집에 놀러온 그 가난한 자를 보고 자신의 옷 한 벌을 줍니다. 그때 그는 참 부요를 느낍니다. 얻은 것은 적지만 더 많은 부요를 얻게 됩니다. 그것은 가난한 친척에게서 자기 자신의 부요를 얻 은 것며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요케 하시려고 가난해지셨습니다.예수님은 우리 를 부요케 하시려고 부요하신 주님으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주 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은혜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어느 회사 사장니이 계셨습니다. 회사에는 노사분규가 그칠 날이 없습니다. 매년 임금 인상을 요구합니다. 매년 20퍼센트씩 올려도 만족 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어찌할 수 없어 새벽마다 기도를 하였으나 해결이 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사정을 호소했습니다. 그때 예수님 이 조용히 들뎌순 음성이 있었습니다. '사장이 가난해지면 된다.'였습니다. 사장이 가난해지면 됩니다. 사장이 가난하면 사원들은 할 말이 없습니다. 네가 가난해지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자본주의 이론에 따르면 사장은 많이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으로서는 안 맞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에 도 가난하게 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아무리 주어도 만족이 없습니다. 목구멍이 열린 무덤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어떤 부자도 만족하는 부자가 없습니다. 아무리 가져도 만족할 줄 모릅니다. 모든 심령들이 다 가난뱅이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천지를 다 가지고 계 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가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가난해 지셨는지 이 땅에서는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하늘의 부요를 인간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았습니까 이 타락한 인간들에게는 천지를 다 주어도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광주에 가서 부흥회를 하는데 신기한 것 하나를 배웠 습니다. 목사님 말씀이 돼지가 돼지인 줄 알았더니 돼지가 아니라는 것 입니다. 돼지 사육장에서 물과 사료를 마음껏 준다는 겁니다. 마음껏 먹고 살찌도록 하는데 창자를 수술해 보니 꽉 차지 않고 80퍼센트밖에 안 찼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100퍼센트까지 먹느냐 하면 l20 퍼센트까지 먹는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날 l00 퍼센트를 먹은 모양이 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녁에 굶어버렸습니다. 굶으니까 은혜가 넘쳤 습니다. 우리는 욕심을 제어하기가 힘이 드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돼지 선생님에게서 많이 배워야겠습니다. '나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80 퍼센트가 아니라 날마다 100퍼센트를 채우고도 만족이 없으니 돼지를 욕심쟁이로 비웃는 것이 부끄럽다.'고 반성해야 합니다. 저에게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주님이 친히 본을 보인 것처럼 부요한 자로서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이 부자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니까 그걷 응답이 왔습니다. '어느 정도 부자 되기를 원하느냐.'그러십니다. 그래서 제가 자기 집을 한 채씩 가져야겠습니다.' 하니까 '집 없는 자가 있느냐. 그러십니다. 전셋집이라도 다 살고 있습니다.'했더니 '나 그대로 왔다가 갈 인생이 전셋집에 살면 됐지 자기집이란 없다.'하십 니다. 그리고 조용히 들리는 음성은 네가 가난해져라. 그러면 네 교인 들이 다 부자가 된다.고 응답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가난해지셨는지 너무 가난하셔서 태어날 장소가 없었습니다. 여기 수많은 성도가 모였지만 예수님보다 더 가난한 집에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태어날 장소가 없어 짐승과 함께 마굿간에서 태 어나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그의 태어남의 증인은 가축들이었습니다. 애수님은 궁전에서 태어나 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구유에서 나셨습니다. 그는 황금 요람 속에서 황금으로 만든 수저로 식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손으로 떡을 떼었습니다. 천사를 시종으로 두실 수 있었으나 말구유 옆에서 짐승이 수종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얼마나 가난하셨습니까 너무 가난하여서 그분이 세상을 만드셨음에도 불구하고 거처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히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드디어 그는 땅을 침상으로 삼으시고 낙엽을 이불 로 덮으셨습니다. 바위가 그분의 베개였습니다. 시냇물은 그의 세숫물이었습니다. 산들바람은 그의 얼굴을 닦는 수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람은 그의 머리를 빗어주는 빗이었습니다. 그분은 죽으실 때 호화로운 궁궐에서 편히 죽지 않으시닌 두 범죄자 사이에 십자가 형틀에 달려 옷을 다 벗고 알몸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는 너무 가난해서 자기 어머니를 다른 사람에게 돌보라닌 의다했습니다. 그리고 장사 지낼때 자기의 무덤이 없어서 남의 무딤을 빌렸습니다. 주님은 가난하게 오셨고, 그의 일생도 가난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그렇게 가난했느냐는 질문에 성경은 이떻게 말합니다. '그의 가난을 인하여 너희를 부요케 하려 함이라.'예수님은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부자 되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가난하게 되어 우리 로 하여금 부요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너무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영화로운 영광의 옷을 벗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벗어버린 인간에게는 아무리 좋은 옷을 입혀도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 피흘려 그 구속의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이것이 제일 좋은 옷입니다. 이 땅의 어떤 것을 먹어도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먹고 또 먹어도 인간들은 끊임없이 배고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떡을 먹는 자마다 영원히 주리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생명의 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거처가 되시기 위하여 친히 말씀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예수님이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천국으로 예비하퍼 간다는 말이고 또 하나는 죽으러 간다는 말입니다. 내가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서 죽는다 죽는데 네가 처소를 예비 하면 다시 온다. 내가 너희에제 부활한 주로서 다시 을 것이다. 그때 나는 너희 거처가 될 것이다. 네 심명 속에 부활의 영이 들어가면 어느 곳 에 있든지 나는 너희의 좋은 기처가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는 집 때문에 불평도 많고 아쉬움도 많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생명으로 살면 거할 곳은 많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기 위하여 다시 온다. 너에게 부활의 생명을 덧입히려 내가 올텐데 그때는 나와 영원히 함께 있을 것이다.'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굶어죽는 가난은 사라졌습니다. 우리들이 남들처범 좋은 옷을 못입거나 좋은 집에서 살지 못한다고 탄식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현재 우리는 모두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평생 훈련은 자기 욕심을 버리는 훈련입니다. 우리는 여행을 할때 짐을 가볍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행을 할 때 짐을 많이 들고 다니면 참 고생입니다. 하늘나라 가는 성도는 짐이 가벼 워야 합니다. 동물의 세계는 인간처럼 탐욕이 없습니다. 어떤 새도 이 웃에 사는 새들보다 더 많은 둥지를 틀지 않습니다. 어떤 여우도 자기 가 잠자고 숨을 쉴 수 있는 굴 하나를 만들고 살 뿐입니다. 어떤 다람쥐도 도토리 창고를 짓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어떤 제비도 자기 집이 흙 이 아닌 금강석으로 만드는 제비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교훈하십니다. '저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피는 백합화를 보라.'그들은 탐욕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 을 비우면 모두가 다 편안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주요 온전 케 하신 예수, 가난해진 예수를 보라. 그리하면 네가 부요하리라.'하십 니다. 우리가 좋은 가문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가문도 다 선악 과를 따먹은 아담의 후손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죽음의 선고를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습니다. 성령으로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만이 자기 가문의 부요롤 누릴 수가 있습니다,
지난 가을에 부흥회를 갔습니다. 거기서 옛날 시골 교인을 만났습니다. 옛날 교인들을 만나서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어떻게사느 냐고 물으니 옛날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더 가난해졌느냐' 했더니 잘 산다고 했습니다. 이 종이 농촌에서 목회할 때 사람들은 밥을 배불 리 먹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농촌도 잘 먹고 삽니다. 집집마다 냉장고가 있고, 자가용 가진 사람도 많습니다. 그때 저는 연기나는 부엌을 개량해주기도 했었습니다.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윤택한 생활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했던 그 형제들에게 평화가 없어 보였습니다. 목사님, 그때가 좋았어요. 그때가 살맛이 있었어요.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요 그때 행복했어요.'하는 저들의 모습에서 큰 교훈을 받았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생활로는 만족도 행복도 얻을 수 가 없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저는 다음날 오후에 시골에 가서 그 언덕길을 넘어가 보았습니다. 길은 옛길이로되 사람은 옛사람이 아 니었습니다. 3o대의 젊은 목사가 걷던 길이었으나 20년이 지나 반 백이 되었으니 허무한 인생길에 눈물이 젖었습니다. 이 종과 함께 이곳에서 춤추던 교인들이 생각났습니다. 기쁘고 기쁘도다, 항상 기쁘도다.'그때 부르던 찬송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춤추며 걸었던 생각이 났습니다. 인생의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들은 춤추며, 기뻐하며, 찬양했습니다. 우리들의 행복이 어디 있습니까 가난해진 예수를 바라볼때 우리에게 만족이 있습니다.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가난해 진 예수를 바라보아야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부자 되려는 노력보다 심령이 가난해지는 연습이 더 필요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조용히 하늘의 음성을 들어야 됩니다 이제 우리는 좀더 내 심령을 가난하게 만들어야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내 마음이 너무 교만했습니다. 목끝까지 기어오르는 욕심을 낮추어야 합 니다. 솟아오르는 허영심을 넘어뜨려야 합니다. 허탈한 생각을 깎아내 려야 합니다. 탐욕의 우상을 헐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하게 주님께 무릎을 꿇고, 오 가난하신 주시억, 내 심령을 가난하게만들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내 심령을 가난하게 만들어 놓을 때 하늘의 놀라운 부요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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