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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눅 13: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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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는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18년 동안이나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진 여인을 고쳤을 때, 안식일을 범한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안식일이라도 자기의 소나, 나귀를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면서 내가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진 자를 고치는 것이 뭐가 잘못 되었느냐며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하시며 여인을 고쳐 주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슬픔이 어떠 한가도 말씀해 줍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22-30)

예수님은 각 성(城) 각 촌(村)으로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면서 더욱 더 애타는 마음으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이것을 본 어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23)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책망하는 말을 들었거나(10-17), 회개치 않으면 망하리라는(1-5) 말씀을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반란을 일으키다가 로마 군에 의해 죽어 피가 재물에 썩인 일이나,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18명이 너희보다 죄가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고 너희도 회개치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
당시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 나라에는 유대인만이 구원을 받아 들어가고 이방인들은 모두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여튼 유대인만 되면 아무런 장애도 없이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 그들의 지배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그와 달랐습니다.
죄를 호리라도 다 갚지 않으면 결단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12:59) 그래서 이 사람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참말입니까” 하고 물은 것입니다.

이런 이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24절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하셨습니다.
좁은 문은 구원의 문입니다. 구원의 문은 좁습니다. 그래서 힘쓰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기서 힘쓴다는 말은 “애쓰다” 혹은 “죽을 힘을 다해 싸운다”(Make every effort)는 뜻입니다. 투기장이나 씨름장에서 사력을 다하여 싸우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애쓰고 힘쓰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습니다.(마7:13,14) 그래서 외롭지 않고 동료가 많으니까 위안을 받으며 세상 재미도 만끽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좁은 길을 걸으며 천국은 힘쓰는 자가 들어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교회 출석을 하니까 구원을 받겠지, 나는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으니까 구원을 받겠지, 나는 모태 신앙이니까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아니라고 대답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습니다.
운동선수들이 경기장에서 온 힘을 다해 싸우듯이 자신과 싸우고 우리를 대적하는 원수 마귀와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신과 싸우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40일 금식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 때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는데 이 마귀가 주리신 예수님에게
① 돌이 떡이 되게 하라
②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③ 또, 마귀가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이며 내게 엎드려 절(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리라 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다만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마4:7)
“사단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4:10) 하니 사단이 떠나갔습니다.

사단이 하나님을 시험치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그릇 순종하면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순종하면 사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경배한다면 사단이 아닙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예수님 당신 자신의 마음에 파고드는 사단의 생각을 물리치신 것이요, 예수님 당신 자신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셨습니다. 자기 부인을 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히브리서 5:7절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또,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떨어지리 만큼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눅22:44)

믿음의 선진 사도 바울도 다른 사람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자신을 진리의 말씀에 처 복종시켰다고 했습니다.(고전9:17)
천로역정을 보면 기독자가 장망성에서 나와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과 싸우며 유혹을 뿌리쳐야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구원의 문은 좁습니다. 죄의 유혹은 마치 움처럼 돋아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났어도 타락한 본성이 남아 있어서 이 죄악된 본성이 움처럼 돋아나므로 이것을 쥐어뜯고 사도 바울과 같이 절제하며 자기 몸을 처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리할 때, 생명의 면류관(계2:18), 의의 면류관(딤후4:7), 영광의 면류관(벧전5:4)을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때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구원의 문은 언제까지나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듯이 닫힐 때가 옵니다. 노아 시대 때처럼 하나님이 방주 문을 닫으시면(창7:16) 아무도 그 문을 열 자가 없습니다. 일단 닫히면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
이 때는 예수님께서 심판장으로 오실 그 날을 의미합니다. 또, 개인적으로 홀연히 죽음이 임할 때입니다. 죽음이 임하면 우리의 구원의 문은 닫힙니다. 이처럼 구원의 문은 개인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언제 닫힐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현세적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또, 현재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어떤 분은 40살이 될 때까지는 자기를 위해서 살고 그 후에 주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합니다.
제 친구 아버지는 예수 믿으라고 하면 항상 환갑이나 지나고 믿으시겠다고 하더니 환갑도 채 못되어서 고혈압으로 쓸어져 2년 동안 혼수상태로 혼미해 있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구원의 문이 닫힌 후에 아무리 울고 불고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최초 버마의 선교사 <져드슨>은 죽기 전에 예수를 믿으면 되지 젊어서부터 믿을 필요가 없다는 친구의 말에 넘어가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와 서부로 여행을 갔는데 그 친구가 여관방에서 그만 죽었습니다. 그 때 그는 회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생 동안 버마 선교사로 귀히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적으로 예수를 믿고 현재적으로 천국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구원의 문이 굳게 닫힌 후에 밖에 서서 두드리며 열어 주소서 하되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자 26절을 보십시오. 이들은 이렇게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로 5천 명을 먹이실 때 떡을 얻어먹고 포도주를 만드실 때 잔칫집에서 포도주도 얻어 마셨는지도 모릅니다. 또, 예수님이 자기 동네에 들어오셔 길거리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구경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고 떡도 얻어먹고, 마시기도 했으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지 않았으므로 행악자라 하시고 나는 너희가 어디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시며 두드리는 문을 열어 보지도 않으시고 이 행악자들아 나를 떠나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지 않고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 자들은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힘쓰지 않는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됩니까
29,30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이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의 문으로 들어온 이방인들입니다. 그러나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자도 있습니다.”(30)
실로 유대인들은 예수께 떡도 얻어먹고 음료수도 얻어먹고, 병도 낫고,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할 기회가 먼저 주어졌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치 않았으며 메시아를 죽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넘어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생활을 늦게 출발했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는 놀랍게 성장하고 많은 은혜와 축복을 받고 나중 되었으나 먼저 됩니다. 그러나 무엇이나 좀 된 것처럼 착각하고 폼이나 잡고 육신의 안일과 개으름에 빠지면 신앙이 퇴보되고 결국은 밀리고 영적인 파멸을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전에 이 세상에서 사치란 사치는 다하고 많은 존경을 받건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죽어서 하늘 나라에 이르렀을 때에 그녀에게 할당된 집으로 그녀를 아내 하기 위해 한 천사가 파송 되었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저택을 여러 개 지나쳤으며 그 여인은 한 집 한 집 지나칠 때마다 그것이 자기에게 할당된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이 하늘 나라 중심 도로를 지나 교외의 변두리 지역에 이르렀을 때, 거기에는 훨씬 적은 집들이 총총하게 세워져 있었으나 그곳도 지나쳐서 아주 변두리에 있는 오두막 집보다도 작은 집 앞에 이르렀습니다. 안내하던 천사가 “이것이 당신 집이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여자는 “무엇이라고요 이것이 내 집이라고요 나는 여기서 살 수가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천사가 말하기를 “안되었소만, 우리는 당신이 올려 보내는 물자로서는 고작해야 이것밖에 지을 수가 없었소” 하더랍니다.
Ⅱ.자기 갈 길을 가시는 사명자 예수님(31-35)

예수님은 사명인으로서 외로운 인생을 사셨습니다. 본문에 사명인으로 사시는 예수님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헤롯 안티파스(Antipass B.C 4-A.D 39)의 관할 내에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와서 헤롯이 죽이고자 하니 이 지역을 떠나 피하도록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목숨이 위태롭다고 해서 그 곳에서 도피하시거나 사람을 살리는 일, 복음 사역을 중단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래, 이 땅에서의 사명을 완수하고자 하셨습니다. 그 후 예루살렘에 가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속 사업을 완성코자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이 이 곳을 떠나시도록 하는데는 자기들의 궤계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럴싸한 말을 꾸며대었습니다.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 한다고.......
헤롯은 예수님의 사역이 왕성할 수록 세례 요한을 죽인 죄의식에 시달렸습니다.(눅9:7)
또한, 백성들이 몰려다니다가 폭동이나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자기의 관할 지역 갈릴리를 떠나 주기를 바랬습니다.
한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면 유다로 끌어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바리새인들이 이 말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바리새인들의 궤계를 다 아셨습니다. 다 아시고 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간사하고 교활한 헤롯을 여우라고 하셨습니다. 오늘과 내일 현재는 양 떼들을 섬기다가 잠시 후에는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 인류 구속 역사를 완성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3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래는 내가 길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가 예루살렘 박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이 헤롯에게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굳게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헤롯의 위협에도, 바리새인들의 궤계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으시고 굳굳하게 사명의 길을 가시고 계셨습니다. 사명인 예수님의 자세는 확고부동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래티머(Lattimer)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래티머 목사님이 일찍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헨리 왕이 회중의 한 사람으로 참석한 자리에서 설교할 때였습니다. 그의 친구 목사가 찾아 와서 헨리 왕이 회중에 참석했으니 말조심을 하라고 전달을 했습니다. 이 때 래티머 목사는 강단에 올라서서 독백처럼 외쳤습니다. “래티머! 래티머! 래티머! 말을 조심해서 하라 영국의 왕께서 여기와 계신다!” 그리고 계속해서 “래티머! 래티머! 래티머! 말조심을 해라 왕 중 왕이(예수님) 여기와 계신다”고 했다고 합니다. 래티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 사명인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상의 어떤 왕을 즐겁게 하거나 피해서 자기 생명을 연장코자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신앙하는 바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고 사명인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진리의 길을 가고자 할 때 많은 훼방이 있습니다. 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께 받은 그 사명을 감당함에는 생명도 아까워하지 않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행20:24)내가 살기 위해 넓은 길을 택하기보다 좁은 길을 걸으며 사명에 힘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Ⅲ.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탄식(34-35)

예수님은 오늘과 내일을 열심히 사명인으로 사시다가 모래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18:41) 십자가를 지시러 들어가시면서 예루살렘 성(城) 가까이 오셔서 우셨습니다. 평화에 관한 소식을 모르고 멸망해 갈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은 예루살렘을 향해 있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류 대 구속 사업을 완성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사랑하셨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 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려 함같이 내가 너희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닭은 21일 동안 금식을 하며 알을 품어 새끼를 부화시킵니다. 그 후 항상 병아리를 데리고 다닙니다. 그러나 개나, 고양이가 가까이 오면 깃털을 세우고 날개를 펴고 꼬-꼬-꼬 합니다. 그러면 그 많은 병아리들이 모두 날개 아래로 기어들어 갑니다. 어미 닭은 깃털을 세우고 적을 위협하여 제 새끼를 보호합니다.
또, 봄날 어미 닭은 어린 병아리들을 데리고 뒷동산에 모이를 먹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뒷동산 잔디 밭에 불이 났습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어미 닭은 그대로 서서 타 죽었습니다. 타 죽은 어미 닭을 발로 탁 차 보니 그 속에서 노란 병아리들이 쫓아 나오더란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미 닭은 병아리들이 빨리 빨리 도망가지 못하니까 자기 날개 아래 품어 하나도 상하지 않게 하고 자기는 까맣게 그을려 죽었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자녀들을 그 품속에 품으려고 여러 번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돌로 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 했습니다. 이런 양 떼들을 생각할 때에 예수님은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거절한 이들의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35절을 보십시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거절하므로 A.D70년 8월 6일 로마 장군 디도(Titus)가 이끈 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파괴되고 예루살렘은 멸망을 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거절하므로 파멸을 자초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님들이여 이 시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넓은 길로 가면 찾는 이는 많으나 결국 멸망의 길입니다.

인도의 유명한 성자라 불리는 선다씽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형제를 사랑하다 자신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네팔 전도에 나섰을 때, 자기 친구 한 사람과 동행을 하며 그 산을 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도중에서 추위를 못이기고 쓰러진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혹독한 추위라서 자기들도 생명의 위기를 느낌으로 같이 가던 친구가 그냥 가자고 합니다. 굳이 고집을 부리던 친구는 이렇게 추위에 죽어 가는 행인을 두고 자기 혼자 살겠다고 앞서 갔습니다. 그러나 선다씽은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그 추위에 떨면서 길 옆에 쓸어져 있던 그 행인을 들춰 업고 계속 산길을 걸어갑니다. 가다 보니 먼저 혼자 살겠다고 길을 떠났던 친구가 그 혹독한 추위를 이기지 못하여 쓰러져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다씽은 들춰 업은 사람으로 인하여 힘을 쓰고, 힘을 쓰다 보니 온 몸에 땀이 나서 추위를 이기고 살 수 있었습니다. 이 선다씽의 뜨거워진 체온으로 등에 업혀 죽어 가던 사람도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에는 축복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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