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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워지는 바나바 (행 04:3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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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성경의 인물중 누구를 가장 좋아하십니까 저는 많은 인물중에 옥합을 때뜨린 마리아를 가장좋아합니다. 마리아를 생각할 때마다 아름답고 향기롭고 충격적으로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계산을 초월한 사랑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을 알고 게십니까 그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 아닌데도 이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이 뭉클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다윗이 죽으면 왕권에 대한 라이벌이 제거되는 셈이고 그렇다면 자기가 쉽게 왕이 될 수 있었지만 그에게는 왕보다 한 인물이 더욱 중요했기에 왕좌를 버리고 친구를 택했습니다. 그는 업적이나 감투보다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보여주는 삶을 살았읍니다.

 또한 성경에서 예수님에 의하여 높이 평가된 사람이 누구인 줄 알고 계십니까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선지자 세례요한, 그의 외침앞에 사람들은 누구나 나와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새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분명히 그시대의 영웅이였고 정신적인 지주였습니다.

그런데 에수님이 등단하자 마자 요한을 따르던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이때 요한의 제자중 한사람이 볼멘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요즘 말로 쉽게 바꾸면 선생님 이래도 되는 겁니까 선생님의 제자들 까지 예수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선생님은 질투도 안나십니까라는 뜻일 겁니다. 이때 세례요한은 그 유명한 그는 흥하여야 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라는 고백을 합니다. 주인공은 바로 저분이시요 자기는 들놀이일 뿐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요한의 대답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목베임을 당하여 죽은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이 그가 우리의 신앙적 모범이 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의 야심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했던 신앙때문인줄 압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계산을 초월한 마리아의 헌신,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요나단의 휴머니즘,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요한의 신앙성, 이 모든 가치를 한몸에 지니고 있었던 한 사람을 아십니까 바로 바나바를 말입니다. 오늘은 이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저는 요즈음 이 사람이 자꾸 그리워 집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제목을 그리워 지는 바나바라고 정해 보았습니다. 왜 이사람이 그리워 집니까

1.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너무나 타산적이요 계산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시대에 계산을 초월하고 살았던, 그리고 더 높은 가치를 위해서 헌신할 줄 았았던 바나바가 그리워 집니다. 본문은 바나바에 대한 첫번째 에피소드입니다. 36-7절에 보면 성도들이 교회사역을 위해 자신의 밭을 팔아 헌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나 이때나 부동산처럼 확실한 재산이 없었나 봅니다. 이사람 바나바도 자기의 밭을 팔아 하나님께 헌납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가난했으면서도 가난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도들은 가난했지만 풍성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풍성은 바나바가 붐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원래 요셉이었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바나바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36절) 이는 격려의 아들 권고하고 위로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바나바로 인하여 권고 받고 위로 받고 도움 받은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별명을 붙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붐속에서 관심있는 현상은 바나바의 헌신으로 바나바가 존경 받고 칭송을 받는 것을 보고 나도 바나바처럼 존경을 받아 보았으면...하는 사람들이 생겨 난다는 것입니다. 그중 한사람이 바로 다음 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밭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팔고보니 너무나 아깝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을 뚝 떼어서 감추어 두고 사도들에게는 전체인 것인양 갖다 바쳤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기들도 바나바와 같이 존경을 받겠지 하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온 결과는 존경과 고임이 아니라 비극적인 종말이었시빠니다. 그들의 헌까신의 동까;가는 주님앞에 정말로 드리고 싶어서 보다 바나바의 인기가 탐나서 드린바것입니다. 그들의 헌신의 따옥;가는 분명히 불순한 윳까신적 동기였습니다. 시기로 시작한 헌신이요 과장된 헌신이요 거징된 헌신이었습니다. 바나바의 헌신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바나바의 헌신은 남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헉다신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이만큼 헌신하고 이 만큼 드려/아으니 내가 교회안에서 이 만큼의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는 의식조차 없었던 사람입니다. 요즈음 교회가 가지고 있다,가 문제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것자;가 아니겠습니까 바나바는 자기가 드린것에 대하여는 일체 왈가왈부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저 사도들 발앞에 두었다고만 했지 이것을 어디어디에 써야합니다. 라고 주장한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어느교회는 자기가 드린 헌금에 대하여 이렇게 쓰여져야 합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드리는 것이 아니라 투자하는 것에 불과한 것자;가니다. 우너하는 소유요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 될때 비로소 드린것이 되는 것마입니가.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위해 쓰여질 때 나의 뜻대로 쓰여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거기에 족할 줄 아는 헌신이 참헌신인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제물들을 기억하십니시오. 주님앞에 드려진 제물들은 피가 다빠진 완전히 죽은 제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앞에서 날뛸래야 날뛸 수 없는 것입다미다. 주님앞에 드린것자,다 모두 자아가 준어야만 온전한 제물이 더가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살아계셨으면서도 죽은 제물과 같이 순순히 쓴잔을 마셨습니까 하나님의 어린양 제물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의 헌신은 철저히 이렇게 드리는 헌신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소위 헌신,봉사, 헌금...들자리 자기 PR을 동기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은데 ,자;다정받으려는 동기,체면의 동기,...이러한 동기가 남무하는 상황속에서 바나바의 헌신은 우리에게 숙연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마치 옥합을 깨뜨린 여인같이,초월적인 헌신을 하고 드려진 것으로 만족했던 이 바나바가 얼마나 그리워지나 모릅니다.

여러분은 이 바나바가 그립지 아니한지요.

 2.또하나 바나바가 그리워지는 이유는 이 세상모든 것보다 인간의 소중함을 알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사회는 경쟁사회이기에 성취를 최고의 목표로 삼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사회 모든 분야에서 전쟁을 치루고 있습니다. 입시전쟁, 취업전쟁,생존경쟁, 수출경쟁, 출근전쟁...등 이미 우리는 전쟁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정말로 심각한 것은 목표만을 추구학다 보니 인간성은 짖밟히고 인간을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어버리고 마는 인간성 상실에 더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서 행9:에 나오는 바나바의 또다른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던져주고 잇습니다. 행9:의 첫머리는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잡으려고 살기등등하여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해빠니다. 그러나 다메석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변한후 제잗르과 사귀고자 제자를 찾아가나 제자들은 그를 경계하여 믿어주질 않습니다. 이때 바나바가 등장하여 사울의 신원을 보증합니다. (27) 내가 자;가사람을 보증하겠습니다. 이사람은 참으로 에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이 사람은 장차 주님의 큰 일군이 될것마입니다.

우리는 이;사람을 믿어야합니다. 여러분, 내가 자;사람을 봐으할테니까 믿어 주십시오.그의 보증과 변호 덕분에 바울은 비로소 사도로서 첫걸음을 시작한 것마입니다. 그때 그가 바울을 변호해 주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의 바울이 있었겠습니까 바나바의 가다간에 대한 자;가러한 태도는 비단 바울의 경우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해서도 다 마찬가지 였습니다. 행15:에 기록된 마가에대한 바가울과의 의견충돌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1차 전도 여행기간중 떠나간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자는 바나바와 그런사람은 데리고 갈수 없다는 바울과 의견이 대립된 것입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열심히 변호합니다. 이 사람에게 한번더 까시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번의 실수로 어찌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실수때문에 더 열심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마가도 데리고 갑시다가.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갔거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먼훗날 마가는 바나바의 마가대로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말년에 마가에 대한 고백을 보면 이 복음의 사역을 위해 내가 동역자가 필요하가니마가 요한을 내게 보내주십시오 바울이 이렇게 말할 정도로 그는 훌류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만약 바나바가 마가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오늘날 인감성은 대단히 변해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목표를 성취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심지어 교회안에서 까지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얼마나 바나바가 그리운 시대입니까 이러한 상황속에서 여러분은 바나바와 같이 살지 않읏;가렵니까 한사람에 대한 가능성을 보고 그 가능성을 키워주는 사람, 비록 그의 과거가 우리를 실망시;켰어도 그가 가진 한가지 장점이 주님이 붙잡히는 그날, 그가 큰 인물이 될것을 믿고서 바나바와 같이 외치지 안으시겠습니까 비판하기 보다, 버리기 보다, 포기하기 보다.... 그 사람을 믿어주며 힘들고 약하고 쓰러져 있는 형제의 손을 붙잡고 함께 가자고 소리치는 바나바...

요나단같은 이사람이 부럽지 않습다;가까

3.마지막으로 바나바가 그리워지는 또하나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신앙때문입니다.

행11:에는 바나바의 떠다른 아름다운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 목회자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나바가 부임한 그날부터 안디옥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사라미들이 몰려옵니다. 바야흐로 바나바의 인기는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일을 바나바가 혼자 감당하기 어렵자 그는 바울을 초청하여 함께 동역하싸기 시작합니다. 이때 바나바가 옹졸한 목회자여/아다면 바울을 데리고 오는 것을 꺼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인기나 명예, 성취욕보다도 하나님의 일이 더욱 중요한 관심사였씁니다. 그래서 바울을 불렀거 그가 오자마자 교회는 더욱 부흥하기 시작합니다. 바나바의 판다은 적중했습니다. 바나바의 천가가로 사울은 바울되었고 바울은 바울되기 위한 일터의 현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있었기에 비로소 안디옥 교회는 세계선교의 센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행: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표기가 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장 이전에는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기록되었지만 이일 후에는 바울과 바나바가로 바뀌고 있습니다. 세계선교위 주체가 바나바에서 바울로 옮겨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가장에서 바나바의 불평이나 원망은 전혀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침묵으로 기쁘게 서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가. 바울이 자기의 뒤를 이어서 하나나가의 사역을 계속 감당하는 이것이 전혀 섭섭하지 않았던 이사람,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라미었습니다. 자기의 인기, 체면,목표보다도 주님의 사역이 더욱 활발하기를 원했던 바나바, 여러분은 이 사라미이 그립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다면, 주의 교회가 좀더 부흥될 수 있다면 이른바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주를 섬기리라고 살았던 사람 바나바, 자기의가 체면이 세워지는 것, 그것은 그의 일차적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 받고 존경 받는 것, 역시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자가 주의 일이 부흥되기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승리하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거가이 나타나기를 원했던 사람,수많은 까사람들이 구원 받기 우너했던 사람,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숙하기를 원했던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이 목적이 이루어 지기 위해서라면 자기는 조용히 사라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이 그립지 않으십니까 어쩌면 오늘의 한국교회가 더욱 필요로 하고 있는 인물이 있다면 바울보다는 와릴마려 바나바일지 모릅니다.

모두가 지도자만 되려가는 이시대에서 바나바와 같이 섬기는 자가 얼마나 필요합니까 어떠한 자리가 위대한 자리입니까 청와대에 가야만 위댜한 자가리입니까 국회에 가서 큰소리 쳐야만 위대한 자리입니가 장(長)자가 붙는 회전의자에 앉아야만 위대한 자리입니까 진정으로 위대한 자리는 그 자리가 큰자리라 위대한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세우신 그자리에 이름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그일을 감당할때 비로소 그자리가 우가대한 자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자긴는 바울이 될 수 없음을 잘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발견하여 그를 세우는 것이 자기의 사명임을 알았던 이사람 바나바, 그래서 바울을 자기 자리에 세우고 자기는 무대뒤로 조용히 사라지면서 그는 흥하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요한의 고백이 가능했던 바나바, 여러분은 이 바나바가 그리워 지지 않습니까

4.에필로그 우리모둔 다 바울이 될 수 없습니다. 전세계를 세차례난 걸쳐 여행하면서 복음을 증거하는 바울이 될 수 없을럼다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는 바나바는 될 수 있습니다. 넘어져 있는 한사람을 일으켜 세우며 성도님 일어나야 합니다. 집사님 수고하셨습니다. 전도사님 힘을 내십시오 이 한마디를 통해서 바울같은 일군을 만드는 바나바가 될 수 있습니다. 그가 인정받고 높임받는 사실보다 다른 사람이 더 높임받기를 원했던 바나바, 사실 기독교 역사는 이 많은 바나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바울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바나바도 필요합니다. 이 바나바가 되가지 않으시게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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