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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는 간절히 빌더라 (행 1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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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한해의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모든 일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게 되면 누구든지 자신의 행동을 평가해 볼 기회를 가지게 된다. 조용한 시간 뒤 돌아 보는 기회를 가지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눈에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속 마음을 꿰뚫어보시는 분이시다. 잠언 16:2 기록된 말씀이다.

 사람의 모든 행동에는 반드시 그 동기가 숨겨져 있다. 동기가 좋으면 결과도 좋고 동기가 나쁘면 결과도 나쁘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보람있는 행동은 인생을 값지게 하고 가치있는 인생이 되게 하지만 천박하고 무모한 행동은 그 일을 행한 인간으로 천하고 바람직 하지 못한 인생으로 전락 시키고 만다. 어떤 사람의 행동이 미숙하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본능적이고 이기적인 동기들을 가지고 있을 때 느끼는 보편적인 정서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행동을 면밀히 연구한 한 교육가는 행동에 대한 동기를 단계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것은 모두 일곱 단계인데 ....

 ① 벌을 받을까 무서워서 하는 행동 ② 보상이나 즐거움 때문에 하는 행동 ③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행동 ④ 법과 규정을 따르기 위하여 하는 행동 ⑤ 자기 스스로의 참여심과 책임을 느끼면서 결정하는 행동 ⑥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가 믿는 가치관이나 신념에 의하여 행동하는 단계로 일종의 자기 철학에 의하여 행동하는 단계 ⑦ 모든 사물과 사건을 분명히 보고 그 속에 내포된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지혜와 통찰력을 가지고 행동하는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세번째 까지는 일반적으로 어린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행동이다. 다른 사람이나 사건이 동기가 되어서 행동하는 단계를 의미한다. 나머지는 그 행동의 동기가 행동하는 사람의 내적 결단과 신념 철학에 의하여 행동하는 단계를 보여준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그 행동이 어린 아이들의 그것일 수는 없다.

 헤롯이 교회에 속한 몇몇 사람을 죽일 때에 요한의 형 야고보를 죽인 일이 발생하였다. 이 일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아주 기뻐하였다. 헤롯으로서는 아주 조심스럽게 행한 일이었다. 뜻 밖에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내친김에 베드로 까지도 옥에 가두게 되었다. 헤롯의 행동은 앞의 일곱가지 행동단계에서 어느 것일까 틀림없는 소아적인 행동규범에 속하는 것이다.

 1. 헤롯은 유대인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을 계획을 세웠다.

본인의 생각은 그렇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대세가 그러니까 따라간다는 생각이다. 자신의 생각은 조금도 개입되지 않은 것 같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러지 않아도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신경이 쓰이던 차에 야고보를 잡아 처치하였는데 반응이 괜찮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큰일 낼 사람들이 저지르는 행동이다.

 예수를 재판한 빌라도를 살펴보자. 그는 예수에게서 아무 죄를 찾지 못한 사람이다. 그는 백성들에게 솔직하게 말하였다. '아무 죄도 찾을 수 없노라.' 그러나 백성들의 목소리가 거세게 들리자 손을 씻으면서 말했다. '나는 이 일에 상관하고 싶지 않다.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하라.' 이것이 빌라도의 행동이다. 자기의 생각이나 판단이 틀린 것이 아니지만 더 이상 그 일에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아쩌랴 !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고 그의 이름을 싫도록 복창하고 있다.

 헤롯은 베드로를 잡아 옥에 가두었다. 베드로가 옥에 갇힌 것은 이번이 처음있는 일이 아니다. 이미 4장과 5장에서 한차례씩 갇혔던 일이 있었다. 이번에는 마침 유월절이었다. 요세푸스에 기록된 것을 보면 헤롯 아그립바는 하루도 빠짐없이 희생제물을 드리면서 자기의 신앙심을 나타내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유월절에 피흘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유월절 절기를 지키고 돌아가는 많은 백성들 앞에서 베드로를 처치하는 것이 환심을 사는데 더욱 좋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헤롯은 절기가 지나는 동안 군사 네 사람이 한 조가된 4 패에게 옥문을 지키게 하였다. 네 사람에게 지키게 해도 좋을텐데 16명을 동원한 것은 베드로에게는 경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한 것이 분명하다.

 2.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베드로의 구출이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베드로는 구출되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온 교회가 간절하게 기도한 결과였다. 본문이 말하는 교회는 오늘날과 같은 건물형태를 가진 것이 아니다. 주후 300년까지 교회의 형태는 존재하지 않았다. 본문의 교회는 가정교회이다. 가정교회란 어느 한 성도의 집에서 예배하기 위하여 모이는 형태를 말한다. 빌레몬 1:3에 보면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면서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한다.'고 기록하였다. 빌레몬과 그의 가족들과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인 공동체를 일컫는 말이다.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대단한 힘을 나타내는 공동체이다.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바울은 '광야교회'라는 말을 사용하였다.(행 7:38)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젖과 꿀이 흐른은 가나안 땅을 향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광야교회는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에게서 생명의 도를 받았다. 오늘 우리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생명의 도를 받아 간직한 곳이다. (믿습니까 ) 그리스도를 모실 뿐 아니라 생명의 말씀을 소유한 교회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당시의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간절한 기도제목은 무엇인가 사도 베드로의 석방이다. 옥에 갇힌 사도 베드로의 자유를 위하여 교회는 기도하였다. 성도들은 이 기도제목을 가지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모인 것이다. 그들은 모여서 기도하였다. 그들의 기도 모습을 담은 필림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어떠한 모습이라고 생각되는가-묵상하는 기도였을까-정중한 기도였을까-다급한 목소리였을까-울부짖는 목소리였을까

사도행전에 나타난 기도의 모습들은 모두 [열정적인 기도]였다. 분명하다.

행 1:14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2:1 오순절 날이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 소서. 스데반의 기도 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 께 부탁하고 ...

16: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 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

16:25 밤 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본문에 나타난 교회는 분명한 기도제목을 가졌다. 그것은 투옥된 베드로의 석방문제였다. 교회는 이 문제를 가지고 집중적으로 기도하였다. 열심을 다하여 기도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였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사 65:24)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은 사도행전 16장에 기록된 사건과는 구별된다.

바울과 실라는 함께 찬송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지진이 나며 옥문이 열리는 일이 벌어졌다.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베드로는 어떤가 베드로는 두 군사 틈에서 잠을 잤다.(6) 두 쇠사슬에 매어 누워자는데 사건이 벌어졌다. 주의 사자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일어나라'하였고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하였고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하였다. 베드로는 환상을 보는 줄 생각하였다.(9) 베드로는 둘째 파수를 지나고 성으로 통한 쇠문을 지나 한 거리를 지날 때에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하나님의 사람 베드로는 잠을 잤어도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교회가 있어서 놀라운 사건이 나타난 것이다. 12:12를 보자.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교회는 기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예루살렘 성전을 숙정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자. 내 아버지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있는 교회는 사도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옥에 갇혀 있는 노사도를 위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의 사자가 옥문을 열어주었다.

 지금 우리의 소원, 우리의 기도제목은 무엇인가 다음으로 우리는 기도한 것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요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말한다.

요일 5:14-15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 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 는 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교회의 중요한 실수는 기도한 것에 대한 믿음이 약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지금 베드로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대도 그들은 그것을 믿지 못하였다.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미처 대문을 열지 못하고 베드로가 풀려나왔다고 해도 믿지 않고 도리어 미쳤다고 말하였다. 로데가 힘 써서 말해도 그러면 베드로의 천사라는 것이다. 이렇게 왈가왈부 하는 동안 문 두드리기를 계속하는 베드로를 대문에서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교회가 기도하면서 기도의 내용을 믿지 않는 것은 대단한 실수이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마 6:33)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사람들은 그 뜻을 붙잡고 기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도한 것은 받은 줄 믿고 행동하여야 한다. 믿음이란 기도와 행동이 일치할 때에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기도 따로 행동 따로의 신앙은 위선일 뿐이다. 저물어 가는 1995년의 마지막 주일을 지내면서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자신을 살펴보는 좋은 시간들을 가지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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