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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의 축복 (전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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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죽음의 확실성을 깨닫고 죽음 앞에서 날마다 삶을 결산하며 살고, 인간의 전적 부패를 깨닫고 겸손히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려 성령 충만한 삶을 살때,삶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습니까 이제 여기에 삶의 축복이 있습니다. 이 축복을 전도서 기자는 본문에서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1.삶에 대한 감격과 감사

4절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사자가 덩치가 큰 동물이고 밀림의 왕자이기는 하지만 죽어 있는 사자는 산 개보다도 못합니다. 본래 중동이나 이스라엘 문화권에서는 개를 별로 기분좋은 동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개들이 자주 들을 배회했습니다. 굶주린 개가 들판을 배회하는 모습을 보세요 얼마나 보기 흉한 모습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그 래도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선언합니다. 무엇을 이야기 하기 위함입니까 그것은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감격입니다.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감격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생명이 딱 떠나 보세요 그것은 송장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도 생명이 떠나는 그 순간 견딜 수 없습니다.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살아 있는 기적,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해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5절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산 자는 죽음을 대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추구합니다. 생명이 있는 한 회개가 가능합니다. 생명이 있는 한 이 하나님과의 교통이 가능합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인생에 대한 감격입니다.

기회란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는 올바로 살아볼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 뉘우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더럽고 추악한 삶을 산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살아있다면 회개하고 가치 있게 살고 바르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회개도 살아있 을 때, 예수 영접하는 것도 살아 있을 때, 가치 있고 보람된 일도 살아 있을때 해야 되고, 뜻을 세워서 아름다운 일을 창조해 나가는 것도 살아 있을 때 해 야 합니다.

죽은 다음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고후6:2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지금이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입니다. 내일도 내 기회가 아니고 모래도 내 기회가 아닙니다.

구원받을 기회도 지금이고,선택할 기회도 지금이고,뉘우칠 기회도 지금이고, 새로운 생을 결단할 기회도 지금입니다. 이 오늘이 지나가면 영원히 내 날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해보셨습니까 하나님 살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감사합니다 이 삶에 대한 감사,이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감격을 깊이 느껴 보십시오

2.삶에 대한 즐거움

성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삶에 대한 즐거움을 노래합니다.

우리는 살아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인생을 즐기면서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소위 이 즐거움에 관하여 우리는 두 가지 비성경적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쾌락주의입니다.

이것은 즐기는 것에서만 인생의 기쁨과 보람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예 즐거움을 위한 즐거움, 즐거움 그 자체에서 인생의 목적을 찾으려고 하는 이 쾌락주의는 비성경적입니다.

 둘째는 도피주의입니다.

즐거움이 종종 우리를 사치와 방탕으로 몰고 가기 때문에 아예 인생을 즐기려는 그 자체가 악이라고 하여 삶에 대한 모든 즐거움을 거절하고 오히려 자신을 자학하면서 사는 것이 거룩한 삶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도피주의입니다. 이것도 비성경적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두 가지 극단주의 속에 빠져들어가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쾌락주의나 도피주의<금욕주의> 이 두 가지는 본래 하나의 사상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거의 전부는 특별히 바울 서신의 거의 전부는 한 이단 사상을 배격하기 위해서 씌어진 것입니다. 그 이단 사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영지주의입니다.

영지주의란 본래 철학적인 이원론에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이원론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둘로 나누어 버립니다. 그 다음에는 영혼만이 거룩한 것이고 육체는 다 더럽고 악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서로 만날 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영지주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상으로 우리를 몰고 갑니다.

첫째는, 육체는 아무리 노력해 보았자 선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대로 살아도 관계없다 그러나 영혼은 더럽혀지지 않는다 영혼은 영혼이고 육체는 육체일 뿐이다. 우리의 육체는 아무리 즐겨도 영혼은 더럽혀지지 않는다는 사상 때문에 마음대로 육체를 즐깁니다. 육체를 즐기는 것은 차라리 우리의 특권이며 육체는 어차피 성화될 수가 없다는 사상이 우리를 쾌락주의로 몰고 갑니다.

둘째로, 우리의 영혼이 더욱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악한 육체를 억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억압을 통해서 인간의 영혼은 성화될 수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인도나 네팔의 히말라야 산맥에 가면 많은 수도승들이 자기 몸을 칼로 베고 학대하여 자기의 영혼을 거룩하게 하는 데 몰두하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금욕주의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두 가지를 다 금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다 성경적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죽을 때에 영혼이 육체에서 떠난다는 것은 진실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혼과 육체로 둘로 나눌 수 없읍니다. 흙이라는 육체에 하나님의 숨결이 들어가니까 이것이 합해서 살아 있는 한 인격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 육체가 피곤하면 영혼도 영향을 받게 됩니다. 사람의 육체가 피곤하면 영적으로 도 삶에 지장을 초래합니다. 또 우리가 영적으로 범죄하게 되면 육체의 아픔이 뒤따릅니다.영혼과 육체는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상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영혼과 육체는 하나입니다. 육체를 악한 것으로만 보려고 하기 시작하면 큰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초대교회 교인들 가운데서 영지주의의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인 성육신의 사실을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왜 성육신을 부인하게 되었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더러운 육체를 옷입고 올 수 있느냐고 하여 그들은 하나님이 육체가 되셨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입니다.

성경은 신자의 육체를 어떻게 말합니까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전 이라고 말합니다. 성전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적당한 휴식과 영양을 통해서 우리의 육체를 아름답게 가꾸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청지기적 의무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잘 관리해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삶을 즐길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즐거움을 위한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는 삶을 즐길 특권이 있습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는 생각하기를 기도할 때에만 하나님의 일이고,먹을 때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먹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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