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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창 18: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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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창세기18장의 후반부로서 아브라함의 대인관계가 그의기도생활에 미친 영향을 기술한 것입니다.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7절> 아브라함은 손님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갔습니다.그때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해서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이같은 계시는 커다란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는 책임도 지워줍니다.

이 사실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에 비춰어 보면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세상 나라들과 질적으로 다른 거룩한 백성들을 이루게 하고 그들의 거룩한 삶을 통해 다른 나라 백성들도 하나님을 믿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18절> 아브라함은 선민의 조상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어떤 삶을 원하신다는 것과 죄를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확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은 우선 자기 가정에서부터 가르쳐지고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순서였습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 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19절상> 이 말씀은 성경에서 자녀교육에 대한 부모의 책임을 지적한 최초의 언급입니다.

여기서 '의와 공도'란 하나님의 공의에 비추어 사는 올바른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이 사실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서 명백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교훈을 자기 후손들에게 숙지시켜야 할 중요한 책임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같은 절에 나와 있는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19절하>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18절의 말씀들은 19절의 본문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천하 만민에게 복이 되고 그의 후손들이 강대한 나라가 되는 첫 출발점은 그의 가정에서부터 가르치고 실천되는 하나님의 의와 공도였습니다.

우리들은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입니다.<롬4:11> 베드로는 교회를 이루는 우리 신자들을 가리켜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 이라고 부르고 그 목적이 하나님의 빛과 덕을 선전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습니다.<벧전2:9> 이것은 원래 아브라함에게 의도하셨던 뜻의 연장입니다.내용상 본문에 나온 18-19절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들은 아브라함이 알았던 것보다 훨씬 더 밝고 분명한 복음의 빛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도 더 넓고 깊게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꾸어말하면 우리는 십자가에서 비취는 구원의 메세지를 선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과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십자가 위에서 밝히 비취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신구약 성경이 있으며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특권과 책임을 훨씬 능가하는 자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셨을 때 의도하셨던 뜻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아브라함이 받았던 소명처럼 우리 가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야 할 중대한 책임과 의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야만 썩어가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바르게 수행케 될 것입니다.

자녀교육에 대한 말씀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앞두고 언급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아브라함은 악한 세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장으로서 자녀들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끄는 것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단단히 명심해야 했습니다. 우리 자녀들의 영적교육을 맡은 자들은 목사들이나 주일학교 교사들이 아닙니다. 아이들도 물론 교회 구성원이라는 점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하에 들어가지만 일차적인 자녀교육의 책임은 부모들에게 있습니다. 성도로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자녀들을 말씀으로 먼저 양육하지 못하면서 남을 가르치려는 것은 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가장은 자녀들 뿐만 아니라 아내에 대한 책임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자녀교육의 중요성과 지시를 약속의 후사인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내리셨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은 가정이 성립된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가르치며 적용시키는 실천적인 훈련을 철저히 시행해야 합니다. 그런 준비와 훈련은 이를수록 좋습니다.

부모들이 알아야 할 영적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느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곳의 자녀들은 다 멸망 당하였습니다. 그들의 부모들로부터 하등의 영적 교육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은 우리 가정에서도 일어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사례들을 우리들은 목격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자녀들은 온갖 좋은 물질들을 그들의 부모들로부터 받고 자랐습니다. 그들은 풍족한 땅에서 살았으므로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 습니다.

그들의 부모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은 물질의 혜택 뿐이었습니 다. 우리들의 생활수준도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는 많은 물질의 혜택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영적 혜택이 적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녀들을 위해서 금은 보화를 남겨주라 고 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고 그 법도에 따라 살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영적 가르침이야말로 부모가 자식들에게 남겨 줄 수 있는 최대의 유산입니다. 우리는 내 자식을 주님의 말씀으로 잘 훈계하는 일이 강대한 주의 나라와 천하 만민에게 복이되는 일과 직결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애 가정에 없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무관심 하벼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에 대해서 냉담하다는 반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그런 무심한 교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성도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가정에서의 영적 교육과 세상 악에 대해서 성도의 책임이 무엇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엄숙한 실물 교훈 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교제도 나누었고 또 사라에게 곧 있게 될 잉태 소식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또 앞으로 행하실 일까지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마치 친숙한 벗에게 자기의 할 일을 터놓고 애기해 주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같은 밀접한 교재 때문에 성경에서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벗'<대하20:7, 사41:8, 약2:23> 이라고 칭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친근하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소식만 듣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벗에게 심판과 징계의 소식도 들려 줍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대개 나쁜 소식만 받아서 전하였기 때문에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의 특징은 그들이 심판과 회개의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에 남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올린 중보기도는 우리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들도 죽어가는 세상 을 위해 기도해야 할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벧전2:9>

첫째,중보기도는 하나님 중심이며 타인 중심입니다.

중보는 다른 사람들의 축복을 위해서 하나님의 눈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올리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눈으로 본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 함에게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다<20절>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고모라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었습니다. 아브아함 도 중보기도를 위해서는 고모라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하고 그들의 죄악이 깊다는 것을 절실히 느껴야 했습니다. 중보기도는 하나님이 긴급하게 보는 일에 대해서 나도 동일한 관점으로 주시하고 느끼는 영적 감수성 을 요구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 니다.

 둘째, 중보기도는 하나님이 세상 일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믿고 올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직접 방문해서 보고 알려 하노라<21절>고 하셨습니 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시고 혼자 돌아가도록 한 후에 자신은 멀리 초월해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 만사에 직접 관여하시고 뜨거운 관심으로 돌보시며 그 형편을 감찰하십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관심을 끌지 않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악한 일이건 선한 일이건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모두 하나님의 안중에 들어돕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 다. 하나님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들이 생길 때 하나님은 그냥 방치하지 않고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그의 심판은 공의의 심판입니다. 그는 부르짖음 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21절>를 손수 나서서 조사하고 확인한 후에 정확하게 집행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같은 관심으로 공정한 심판을 내리시지 않는다면 중보기도는 무익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변덕을 부리시지 않습니다.

 셋째, 중보기도는 하나님이 청하고 이끌어 주는 기도입니다.

두 천사들은 소돔으로 향하였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현재의 다급한 상황을 직시하고 중재의 기도를 올려야 한다는 초청장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22절>라는 말은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심히 중하다는 말씀이 있은 후 였습니다.이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떠나지 않고 계속 임재해 계신 것은 아브라 함이 지금까지 쌓아 온 제단 기도가 남을 위해서 올리는 중보기도의 새로운 차 원으로 심화되어야 한다는 촉구였습니다. 참 기도는 모든 위선과 치장으로부터 탈피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하나님앞에 나가는 것이 최상의 접근책입니다.

또한 하나님앞에 서 있는 일은 실제적인 측면에서도 퍽 유익한 자세입니다.

아브라함은 기도를 올리기 전에 하나님이 왜 소돔 땅을 멸망시키려 하시는지를 살펴보고 소돔인들의 필요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볼 묵상의 시간을 가졌습니 다. 기도 전에 주님 앞에 조용히 침묵하는 시간은 흥분된 일방적인 탄원이나 횡설수설을 막아 주는 진정제가 됩니다. 기도자에게는 이런 시간이 있어야 마음 을 정리하게 되고 상황판단을 하면서 주의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에 올리는 기도는 구체적이며 문제의식이 강한 능력의 기도가 됩니다. 한편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하나님에 의해 끝났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33절>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알려 주신 계시의 내용을 토대로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이 자기를 날 때까지 계속 기도하였습니다.

시작과 내용과 끝이 모두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 아래서 진행되었습니다. 하나님 의 인도하시는 기도는 기도자로 하여금 담대히 주께 나아가게 하고 믿음의 확신 속에서 탄원케 합니다.

 넷째,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호소입니다.

아브라함이 만약 시편의 말씀처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 어다<시46:10>라는 침묵의 시간을 주님앞에서 가지지 않았더라면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23절>라는 대담한 질문으로 기도를 시작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주 앞에 서 있을 때에 소돔인들 중에는 롯과 같은 의인이 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공의의 하나님이 무차별 심판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25절>라는 호소도 이같은 결론에 대한 탄원이 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외침은 불의가 득세하고 정의가 패배하는 듯한 세상 사건들에 대한 기도자의 고뇌를 반영해 줍니다. 하나님은 물론 공정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적어도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정의가 아쉽기 그지없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몇 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브 라함은 묻고 또 물었습니다. 큰 문제를 안고 올리는 기도는 결코 일방통행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본 기도에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라는 말 뒤에 '아브라함 이 가로되'라는 말이 후렴처럼 계속 따라 나옵니다. 주님의 뜻을 매번 물어보고 끝까지 말씀을 들으면서 드리는 기도는 무턱대고 조르며 매달리는 유치한 기도보다 더 효과적이고 힘있는 기도입니다. 그래소 참 기도는 큰 마음과 큰 뜻을 요구합니다.

 다섯째, 중보기도는 겸비한 정신으로 올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창조주와 조물주 사이에는 본질 적으로 채워질 수 없는 엄청난 간격이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성도들이지만 그 하나님은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거룩하고 엄위 하신 분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심판의 공정성과 같은 문제를 놓고 여쭈며 탄 원하는 이같은 중보기도에는 인간의 유한성을 절감하는 겸허한 자세가 앞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소멸하는 불'<히12:29절>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티끌과 같은 나<27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시73:22절>이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소돔성의 멸망을 알리며 아브라함 앞에 서 계신 분은 벗과 같이 자기 마음의 뜻을 이야기해주는 분이지만 동시에 그 분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25절>시며 온 만물을 장중에 쥐고 계신 절대자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의 제자들을 '친구'라 부르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셨습니다<요15:15> 그러나 그 분은 동시에 세상 역사의 시종을 주관 하시며 마지막 구속과 심판을 위해 재림 하실 '주 하나님'이십니다.<계1:8>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티끌과 같은 우리들이 던지는 무엄한 질문들을 받아주십니다.<렘12:1-6,합1:13> 하나님은 아직도 우리 들의 반응을 환영해 주십니다. 그것이 비록 부정적인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마음 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게 하십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탄원 과 질문이 바닥이 날때까지 그를 ㄸ나지 않고 계속 응해 두셨습니다.

 여섯째,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인격과 섭리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가슴 속에 인단들의 죄악이 얼마나 견딜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소돔성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토해 절감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불의와 폭력과 부도덕과 이기심과 자만들을 일일이 지켜보십니다. 소돔의 악행에 대한 부르짖음이 하나님의 귓전을 때렷듯이 오늘날의 우리 사회가 저지르는 온갓 죄악들에 대한 호소도 하나님의 귀에 선명히 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천사들을 소돔 땅으로 보내셨습니다<22절> 이들의 사명은 죄악의 진상을 조사하는 것이었지만 그 시간은 소돔인들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도 되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소돔인들은 이 천사들을 욕보이려다가 심판을 도욱 불가피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이래로 수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악한 길에서 돌아서기를 간청하셨습니다. 그는 자기 독생자인 예수님까지 세상에 보내어 멸망을 받지 않고 구원될 수 있는 생명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그런데도 세상은 아직도 불신과 불의에 차 있습니다.

 <결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소돔의 죄악을 지적하셨듯이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악한 이 세상을 눈 앞에 보고 있지 않느냐고믈으십니다. 밥멱듯 자행되는 세상의 악행들이 신문과 텔레비젼으로 날마다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런 보도 앞에서 하나님은 우리들을 바라보십니다. 우리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그냥 망할 세상이라고 한숨맘 잣고 있습니까 그것은 비관주의자의 독백입니다.

너무 죄가 많아서 별도리가 없다고 단념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겠다는 불신입니다. 아무리 죄가 크고 망해가는 인간이더라도 하나님이 용서할 수 없는 죄나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서 있는 위치는 어디입니까 우리는 지금아브라함처럼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서 있습니까 주님의 임재 앞에서 이 세상의 죄악들을 마음 아파하며 가까이 나아가 중보의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까 세상은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전파하는 신자들의 복음에 의해서만 구제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멸망보다는 구원을 정죄보다는 용서를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분은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심판을 위해 즉시 소돔으로 가셔야 합니다. 불의의 소돔성은 아주 없어진 것아 아닙니다. 우리들이 날마다 보고 듣는 이 세상의 죄악 속에 소돔성의 불타는 환영이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속히 오셔서 오늘의 소돔성에다 마지막 심판의 불을 지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소돔 땅으로 천사들을 보내셨습니 다. 이제 하나님 자신이 즉시 그 곳을 향해 발길을 옮기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모든 것이 끝나는 종말입니다. 임박한 그날을 앞두고 하나님은 우리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죄악으로 치닫는 이 불의한 백성을 위해 중보의 기도와 복음증거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고 지금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당신은 아브라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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