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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주를 보았다 (요 2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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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부활은 육신과 영혼의 통일성을 암암리에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과 육신은 희랍의 이원론적 사상에 젖어 영은 선하고 육은 악의 본질이여서 영이 육을 이탈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규정 하는 것 즉 제현상화와 개별화로부터 순수정신으로 해방됨이 선이라 함은 막심한 오류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죄는 욕심이 잉태하여 생기는 것이요, 기원인을 이기주의적 정신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지 육체의 산물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는 영육의 유기적 통일을 강조하여 영혼은 핏속에 깃들여 있다고까지 생각해 왔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육신을 입지 않고서는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성경을 일관한 이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혼과 육신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부패할 육신을 입었던 구속된 영이 썩지 아니할 영체로 입는 것이 부활입니다. 또한 우리는 말세에 처하여 하나님의 궁극적인 메시아 왕국이 이 땅에 실현됨으로 정의의 최후 승리를 기하실 것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여기에 있어 완성된 사회에 적응되는 거주자는 영육간의 완전한 부활체를 소유할 자라는 것을 심연적으로 시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형태 무시간의 영원에의 몰입을 통하여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요 오로지 기생명을 완성시키는 하나님 안에서 죄악을 극복하는 능력을 체득하고 부활체를 입을 때 완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우리의 역사와 이성의 피안에 이 경이적인 부활이 있음을 가르쳤으며, 첫 열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시어서 역사적 사실로서 우리에게 부활의 확증과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복음 전파의 초점이 된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에 죽으심과 아울러 우주의 최종 대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결함 많은 인간 이성으로 이 사실을 그대로 믿는데는 난점이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오랜 역사가 기신실성을 증명하는 성서에 기초하여 다음 열거하는 제의심을 타파하고 부활의 진실 무오성을 변증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적이 예수의 시체를 도적질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적이 시체를 도적질하였다면 적은 사도들의 부활 증거를 반박하기 위하여 도둑 한 것을 여러 사람들 앞에 공시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없었고, 반대로 제자 측이 감추었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허위로 만들어 놓은 부활의 주를 위하여 생명을 바쳐 순교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 예수가 가사상태에서 소생한 것은 아닌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다 쏟았으니 약할 대로 약해진 몸으로서 굴릴 수 없는 무거운 돌문을 인간적 힘으로만 움직이고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의 무덤은 돌로 굳게 인봉 하였습니다. 여기에 신의 능력이 같이하심을 인정 아니할 수 없고 사망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3. 예수를 영웅화하는 조작적 후일 첨부한 기록이 아닌가?
초대 기독교는 그 신앙을 기록상에 두지 않고 그들이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상고한 바요, 손으로 만진 바인 부활의 주를 본 사실 체험 위에 두었습니다. 신약성경 기록 전에 사도들은 예수의 부활을 그들의 증거의 근거로 삼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상 외에도 제의문을 일으킬 수 있으나 하나님의 진리는 신앙으로 알 수밖에 없음을 알고 제의심을 다 내버리고 빛나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살아나셨고, 신실한 제자들은 『내가 주를 보았다』고 생명을 내놓고 외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막달라 마리아가 보았고(막 16:9), 다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보았고(눅 23:13이하), 다음 다른 부녀들이 보았고(마 28:9), 다음 베드로가 보았고(눅 24:33-34)다음 열 제자가 보았고(눅 24:36-43), 다음 열한 제자가 보았는데 이 때 도마는 손에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만져 보았으며, 다음 일곱 제자가 보았으며, 다음 오백여 명의 제자가 일시에 보았고(고전 15:6), 다음 야고보가 보았고(고전 15:7), 다음 승천 시 제자들이 보았고, 그 후 특별히 오시어서 바울로 하여금 보고서 강한 빛을 비추게 하여 땅에 엎드러져 회개하게 하였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대로 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십여 차례에 거쳐서 보았으니 환상이 아니요, 꿈이 아니요, 유령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사실이요 하나님의 권능이요 불변의 진리요 우리들의 구원이 되고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1940여년 전에 오늘 이 새벽에 부활 하시었습니다. 성서기자 마태는 이 사실이 너무도 장엄하고 기부활의 광경을 감히 표현할 수가 없어 『큰 지진이 일어나매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리고 그 위에 앉았는데 얼굴이 번개 같고 옷이 희기가 눈과 같거늘 수호 하던자가 천사의 연고로 인하여 무서워 떨며 죽은 그 사람과 같게 되는지라』라고 무덤 밖에서 그 순간의 이룬 것만 표현했고 주님 자체의 부활의 상세한 광경에 대하여는 붓을 들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이른 새벽에 우리는 그날 이루어진 역사적 사실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날 새벽 미명에 누구보다도 일찍 돌무덤을 향하여 가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의 두발은 매우 빨리 옮겨 놓였으며 그의 마음은 낙망과 슬픔으로 잠겨 있었으며, 그의 손에는 향품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 여인이 신봉하던 주님에게 바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찾고 있는 주님은 그가 일곱사귀가 접했을 때 저를 깨끗케 해주었으며, 저에게 참된 길과 진리를 가르쳐 주었으며, 영생하는 신앙을 체득케 하였으며 거룩한 참사랑을 그 가슴에 넣어 주신 분입니다. 그런데 통분하게도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3일전에 돌아가시어 그 차디찬 시체밖에는 만나 볼 여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 여인 막달라 마리아는 그 시체를 못 잊어서 값진 향유를 바르려고 가는 것입니다. 평소에 겁나던 으슥한 산길도 이제 저의 주님을 사모하는 사랑 앞에는 염두에 둘 여유도 없었고 돌짝밭과 가시의 찔림이 저의 걸음을 조금이라도 늦추게 못하였습니다. 눈물이 앞서는 이 여인의 마음으로 주님 생존시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시체만이라도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가슴이 터지도록 울고 싶은 마음입니다. 무덤에 이르러 보니 오면서 염려되던 입구에 무거운 돌은 이미 옮겨져 있었고 공허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울면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세마포가 개켜 놓였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었습니다. 이제는 시체만이라도 보리라는 희망조차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절망에 떨어진 막달라 마리아는 독자를 잃은 어머니 이상의 비애를 심령에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왠 사람의 발자국 소리에 기진한 몸을 돌이켜 보니 동산지기 같은 분이 서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다』하고 주님의 시신을 요구하였습니다.
주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은 송장까지라도 안아 모시려는 것입니다. 그때 뜻밖에 그 사람의 자비롭고 낯익은 음성 『마리아야!』하는 음성을 들었으니 그는 동산지기가 아니고 돌아가셨던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의 시체는 도둑맞은 것이 아니요, 다시 살아나신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눈물어린 놀랜 눈을 크게 뜬 마리아는 손을 벌리며 감동과 희열의 걷잡을 수 없는 심경으로 주님을 불렀습니다. 돌아가신 주님을 찾는 사랑의 사람 마리아에게 다시 사신 주님은 처음으로 자기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사랑은 웅변이나 천사의 말보다도 지식이나 산을 옮길 만한 능력보다도 더 힘이 있고 영구적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나비가 백합의 향기를 찾아오는 것과 같이 부활의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의 지극한 사랑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으니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성스럽고 사랑스런 주님의 말씀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슬픔의 눈물은 감동의 눈물로 변해 버렸고 기쁨이 전신에 감돌았습니다. 이때까지의 비애는 이 영광의 꽃을 피게 하는 값진 재료가 되었을 뿐입니다. 우리 주님은 역대의 영웅 열사가 약한 토끼와 같이 그 아래 굴복한 분묘를 박차고 다시 사셔서 엄연히 서 계신 것입니다.
에말트는 말했습니다. 『예수가 죽음에서 살아나고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고 하는 이상으로 역사적 확실성을 갖고 있는 것은 없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으며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막달라 마리아는 인간으로서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숨이 가쁘게 제자들에게 달렸을 뿐입니다. 저는 우수에 잠긴 제자들에게 희망을 차지한 천사와 같이 간증하였습니다. 『내가 다시 사신 주의 신령한 몸을 보았다!』
이 부활의 새벽 우리는 생명의 주님과 같이 여기 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내가 주를 볼 수 있는 순간 순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주님은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길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 주님은 생사를 초월한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에 통하고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케하는 바울의 심령에 연결되었고 지금 이 시간 주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신자들에게 깃들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리아의 가슴의 타오르는 거룩한 사랑으로 주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와 같이 이 산을 내려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같이하시는 부활의 주님은 우리를 이 땅에서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즉 우리도 마지막에 주와 같이 부활하게 하시기 위하여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영혼만 중생 영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썩어질 육신까지 썩지 않는 영체로 부활 혹은 변화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육의 완전한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의 차지할 특권입니다.
로마서 10:9의 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원히 사는 조건입니다. 먼저 영이 살고 육신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저 아래 잠자는 동포들 가운데서 살려 달라고 부르짖는 영혼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우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의 참사랑을 받았으면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뒤를 좇아 부활을 증거 해야 합니다.
저들은 『내가 주를 보았다』고 솔직히 생명을 내걸고 증거 하였습니다. 이 외침에 주님은 같이하셨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그리고 로마의 창검을 극복하고 땅끝까지 참 생명의 빛을 전파하게 하였습니다. 세상 지나갈수록 생명의 복음은 사망을 짓밟고 승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더 찬란한 영생의 부활을 약속한 고마운 휴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내가 주를 보았다』고 간증함과 같이 우리도 죽도록 충성하여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벌써 죽음의 구름이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공포와 비굴과 후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와 같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과제는 실생활에서, 교회에서, 현사회에서 생명력있는 사랑의 실천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살아 있는 메세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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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

1. 부산지역 부활절 새벽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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